언더그라운드2 약속된 장소에서 -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를 뉴스로 접하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 사건의 배후가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의 ‘아사하라’란 교주이고 그 사진이
뉴스에 대문짝 만하게 났었다.
왜 이런 테러를 저질렀을까? 이런 의문과 함께
왜 사람들은 이런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걸까?가 더 궁금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많다.
그 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하루키도 비슷한 의문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옴진리교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인터뷰집이다.
하루키는 최대한 자신의 가치판단은 빼려고 노력했다고 서문에 밝힌다.
기억이란 불안정하기 때문에 개인적 이야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 이야기가 집적되어 만들어진 집합적 이야기 안에는 강력하고 확실한 진실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루키는 옴진리교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다수의 관점을 가지길 바란다고 썼다.
옴진리교에 가입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은
다른 여러 종교에 다녀봤지만 옴진리교만큼 새로운 관점과 문제 개선을 위한 실천에 적극적인 종교는 없다는 것이다.
사이비에 빠지는 부류 중 하나는 정말 순수한 사람들인 것 같다.
너무 순수해서 현실에 잘 맞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진지한 사람들이다.
너무 진지해서 물질적인 세계보다 영적인 세계를 더 추구한다.
옴진리교는 통제할 수 없는 욕망(식욕이나 성욕)이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말한다.
옴진리교는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를 점차 낮춰감으로써 개개인의 힘을 증대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부에서 보면 정신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 즉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고,
그에 대한 개선 및 해결책을 주는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순수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어 혹하게 하고
명상이나 호흡 수련을 통해 자신을 통제하고 문제를 개선하는 느낌을 주어 빠지게 한다.
이렇게 빠지게 되면 일상에서 웬만한 현상에는 동요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해탈이나 초월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탈이 목표가 되고 나면 자칭 해탈자를 맹목적으로 따르게 된다.
해탈자가 ‘그것이 옳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내가 엿볼 수 없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해탈을 위해 자기를 버리라고 하는 데 있다.
불교에서도 자기를 버리라고 하는데 무슨 문제일까?
불교에서는 자연과의 합일을 위해 자신을 버리라는 것이고,
사이비들은 교주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라고 한다는 점 같다.(내 생각이다).
지하철 사린 같은 테러 범죄는 그런 자기 상실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말한다.
자기가 사라지면, 사람은 무차별 살인이나 테러에도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옴진리교가 한 일은
번뇌의 근원적 해결을 마련해 주기보다는,
자기를 버리고 시키는 대로 순종할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결국 종교의 본질 아닐까?
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종교 아닌가
사이비는 이 대상이 신이 아니라 다만 교주인 것이고.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맡겨두면 된다.
지시가 내려오면 그 지시대로 움직이면 그만이다.
이런 상태가 온갖 번뇌가 사라진 상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한 가지 진리를 추구할수록 더 편협해지는 경향이 있다.
수행을 할수록 점점 모르는 상태가 되기 쉽다.
스스로 주화입마에 빠지기 쉽게 된다.
어쩌면 수행은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번뇌와 고통을 없애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이런 사이비 종교를 통해 그 길이 얼마나 쉽게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음을 보았다.
만약 지금 가야 하는 길이 여러개가 아니라 하나만 보인다면 그건 나락으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부모에 대한 정이나, 멋 부리고 싶은 마음이나,
남을 미워하는 것 같은 번뇌는 인간에게 당연한 것이다.
어쩌면 해탈이란 번뇌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번뇌와 잘 지내는 상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