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말리 - 에르베 르 텔리에
“수십억의 가상 존재들이 자기가 가상임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이 질문이 이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 같다.
어느 날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비상 착륙하고, 3개월 후에 동일한 승객들을 태운 똑같은 비행기가 다시 나타난다.
이는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이 사건이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된 세계라는 증거라며, 온 세계의 사회, 정치, 종교, 과학계가 난리가 난다.
책을 보는 동안 미드 <매니페스트>가 떠올랐다.
이 드라마는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가 사라졌다 나타났는데, 승객들은 5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도착한 걸 알게 되고, 신비한 계시를 받으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내용이다.
물론 처음 설정만 비슷하고 내용은 다르다.
sf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둘 다 재밌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재미에 철학적 질문의 묵직함을 더했다. 강추한다.
“초기술 문명이 ‘가짜문명’을 시뮬레이션할 확률이 ‘진짜’ 문명이 존재할 확률보다 1000배 더 높아요.”
'이 우주가 시뮬레이션된 우주일 확률이 높다'라고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 근거에 대해서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마 확률상으로 이 우주에서 인간이 생겨나 스스로 진화하고 우주를 인식하는 이 과정이
너무 희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다.
또 하나는 예전부터 혼자 품었던 의문인데,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수학이라고 하는데,
수학은 인간이 그 개념을 정의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주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만 이상한가?
아무튼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된 세계라는 설정은 영화 매트릭스부터 시작해서 sf 장르의 단골 설정 이긴 하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시뮬레이션된 세계라는 점이 온 세상에 분명해졌을 때
이 사회가 특히 정치, 종교, 과학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명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또한 각 개인에게는 특히 비행기 탑승자에게는 자신과 똑같은 존재가 3개월의 시차를 두고 각각 존재하고, 서로 만나기도 하며 때론 갈등하고 공생하는 것을 보여준다.
일단 자신이 가상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 소설은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존재의 의미부터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실존은 존재에 앞선다. 그것도 꽤 한참”
찾아보니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다.
좀 이상하다. 사르트르는 실존과 존재를 같은 의미로 말한 것 같은데, 작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의미로 쓴 건지, 번역가가 잘못 해석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프로그램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패러디해서 '지금 시뮬레이션이 확실한 이 세상에서는 존재가 프로그램일 것'이라는 것이 데카르트 2.0이라고 말한다.
아 그래서 실존은 존재에 앞선다고 한 것인가?
존재가 프로그램이니까.
'가상일지라도 존재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앎이 무슨 소용이 있나?”
“과학보다는 미스터리를 귀히 여겨야 한다.”
“진리는 결코 행복을 낳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의 행복한 자로 사는 편이 좋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그냥 가상의 세계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났다.
그동안 사람들은 가상의 세계라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저 선량한 포퍼는 반박 가능성이 없는 이론은 과학도 아니라고 했건만”
즉 어떤 이론이 과학적이려면 반증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됐다. 반증 가능하면 그 이론은 성립하지 않지 않나? 그런데 왜 그게 과학이지?
아마 과학은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관측과 실험의 영역이고, 관측과 실험은 언제나 잘못될 수 있다.
그게, 반증 가능한 영역이라는 의미 같다.
난 그렇게 추정했다.
그렇다면 시뮬레이션된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사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가 시뮬레이션된 존재지만 스스로 생각한다면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냥 우리의 할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우리가 가상인 것이 완전히 같지는 않겠죠”
“실례지만 그 둘은 같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설령 내가 생각하는 프로그램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존재합니다.”
내가 가상이든 실재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니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창조자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창조자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는 없다.
“궁극의 구원자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해야 해요.”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인공지능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단계가 오면, 즉 의식이 생기면 우리도 인공지능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