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새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무기력하다.
너무 평범하다 못해 찌질해 보인다.
그러다 초현실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변화해 간다.
이 책의 주인공 <오카다 도루>도 백수다.
어느 날 키우던 고양이가 사라지고 아내도 사라진다.
그리고 미스터리한 인물들이 나타나며 서로 엮인다.
이 책의 제목인 <태엽 감는 새>는 사라진 아내 구미코가 근처 나무숲에서 우는 새소리가
마치 태엽을 감는 듯한 ‘끼이이익’하는 규칙적인 소리와 비슷하다고 붙인 이름이다.
태엽을 감지 않으면 물체는 멈춘다.
멈추지 않게 감아줘야 한다.
태엽은 삶을 멈추지 않게 해주는 원동력 같은 것일까?
쳇바퀴 돌듯 무기력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여유는 없다.
“알아요?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굉장히 진지하단 말에요”
굉장히 사소하게 보이는 일들에도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진지해서가 아니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여유가 없으니 생각도 없고, 감정만 있다.
보통 사람들은 여유가 없다.
따라서 무기력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는 호기심뿐이다.
호기심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
“용기와 호기심은 비슷한 게 아닐까요?
용기가 있는 곳에 호기심이 있고, 호기심이 있는 곳에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무기력한 일상을 극복하기 위해 장인과 처남으로 대변되는 엘리트들은 끝없는 자기 욕망추구로 합리화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구조적으로는 민주 국가지만 동시에 치열한 약육강식의 계급 사회로서,
엘리트가 되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 살 의미 같은 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한 단계라도 높은 자리로 오르려 한다.
그것은 매우 건전한 욕망이다.”
이 세상을 치열한 약육강식의 계급 사회라고 규정해 버리면 타인을 짓 밝고 올라가려는 자신의 욕망이 합리화된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자기가 규정한 대로 짐승 같은 삶이 된다.
사라진 와이프의 오빠 <와타야 노브로>로 대변되는 엘리트들은 지적인 괴물에 가깝다고 말한다.
“상대의 색깔에 따라 자신의 색깔을 바꾸어 그때그때마다 유효한 논리를 만들어 냈고,
그러기 위하여 온갖 수사학을 동원했다.”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은 공허하기 마련이다.
그 공허를 감추기 위해 감정적인 포장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런 감정적인 포장에 선동되기 쉽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정론에 비하면 훨씬 신선했으며, 훨씬 강하게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대중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선동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확한 논리일 필요는 없었다. 논리로 보이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대중의 감정을 환기시키는 어떤가 하는 것이다.”
사람에겐 논리보다 감정이 중요하다.
감정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다 보면 잘못이나 죄를 저지르기 쉽다.
이런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종종 운명을 핑계 삼는다.
“운명이라는 것은 나중에 뒤돌아 보는 것이지 미리 아는 것은 아닐 것이오”
운명은 과거이지 미래가 아니다.
단지 나중에 되돌아보고 이게 운명이려니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운명이라고 지칭하며 바꿀 수 없었다고 위안 삼을 뿐이다.
“모든 사물은 복잡하면서 동시에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기본 법칙입니다.”
“복잡하게 보이는 것도 그 동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것뿐이죠.
동기라는 것은 말하자면 욕망의 뿌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뿌리를 찾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리저리 포장하다 보니 복잡해 보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영원히 그 외관의 복잡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사물의 원칙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진화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필요한 거예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죽음이라는 존재가 생생하고 거대할수록 우리는 필사적으로 사물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우리의 본질인 욕망의 뿌리를 죽음을 기준으로 사유하고 인식하게 되면, 약육강식 같은 짐승의 세계에서 그대로 있을지, 벗어날지 선택할 수 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층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러니까 너는 저쪽의 현실에서는 나를 진심으로 죽이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그건 네가 어느 쪽의 현실을 취하고, 내가 어느 쪽의 현실을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눈으로 현실을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무슨 무슨 주의나 무슨 무슨 이론이라는 것은 대개 자신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그리고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어. 하려고만 하면 누구라도 가능할 텐데 말이야.”
여기서 ‘하려고만 하면’ 이게 중요하다.
처음은 호기심이고 그다음은 용기다.
호기심과 용기가 한 발 더 나아가게 한다.
“어쩌면 세상이라는 것은 회전문처럼 그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아닐까
논리적인 연속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라는 것 따위도
실제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과 세상의 ‘어긋남’을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세상이 무한 반복된다고 해서 항상 똑같을 수는 없다.
논리적인 연속성이 없는 새로운 조합의 반복일 것이다.
그래서 그 어긋남을 잘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태엽을 감는 동안 우리는 산다.
태엽이 멈추면 죽는다.
태엽은 반복된다.
하지만 그 반복이 항상 똑같지는 않다.
그래서 이 어긋남을 잘 느낄 수 있게,
호기심을 가지고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야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과거인 운명과 다른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이게 내가 생각한 이 책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