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 서머싯 몸
이 소설은 한마디로 미국 상류층 젊은 청년의 구도 여정기라 할 수 있다.
독특한 점은 작가 본인이 소설 속의 인물들을 관찰하는 화자로서 직접 등장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 표출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래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는 있는가?
신이 존재하는가?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에 답을 찾으러 떠난다.
이런 이상주의자 래리를 사랑하는 이사벨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다.
둘의 대화가 너무 사실적이라 재밌다.
'인간이라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사벨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구도 여행 중에 광산에서 만난 폴란드 남자 코스티는 래리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육체 노동자라고 믿기지 않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말들을 한다.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
신과의 합일에서 오는 행복,
무에서 무가 나올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다.
이 세상은 영원성의 현시
선뿐만 아니라 악 역시 신의 직접적인 현현이라는 등등.
잘 이해가 안 되는 말은 '무에서 무가 나올 수는 없다'였다.
무에서 유가 나올 수는 없다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게 한 게 신이고 창조 아닌가?
찾아보니 무에서 무가 나올 수 없다는 뜻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결국 '이 세상도, 창조주도 무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는 의미 같은데,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다고 말하면 좀 더 직관적인데 말을 꼬았다.
'이 세상은 영원성의 현시'라는 말도 찾아보니
“이 세상이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영원한 어떤 것의 나타남, 즉 현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결국 광부 코스티가 주장하는 세상은
브라만과 아트만, 환생으로 대표되는 힌두교 교리와 비슷한 것 같다.
'이 세상과 나는 하나이고, 이 세상은 변화할 뿐 영원히 무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으로는 작가 몸과 이사벨이 사랑과 타락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다.
'성적 열정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작가 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래 사랑하려면 열정 가지고만은 안된다. 열정은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몸은 '열정 없는 지속은 사랑이 아니라 습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사랑은 열정으로 시작해서 습관으로 지속되는 것인가?
남편과 자식을 잃고 술과 마약에 빠진 소피의 타락에 대해서 이사벨은 타고난 기질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데, 사람이 타락하는 것은 타고난 기질 때문일까? 상황 때문일까?
결국 선택은 나의 의지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과도 비슷하다.
소피는 너무 큰 고통에 스스로 타락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자기 의지로 아무 이유없이 타락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까?
작가 몸이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라고 마귀가 속였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책에서 처음 들어본 주장이고, 충격적이었다.
결국 '인간이 예수 이름으로 죄를 범하게 하려고 마귀가 의도했다'는 것이다.
작가 몸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매우 큰 것 같았다.
예수님이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마음 놓고,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짓나 보다.
여러 방랑 끝에 래리는 인도로 건너가
힌두교 라마크리슈나 선교회에서 신비체험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느끼고,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는다.
보통 우주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첫 번째 질문이
“빅뱅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요?”와 “우주 바깥에는 뭐가 있나요?”등이다.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전제가 우리 머릿속에 너무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주에 시작과 끝은 없다. 무한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라는 말이 갑자기 머리를 탁 쳤다.
무한이 어떤 것인지 그 개념을 정확히 잘 몰랐던 것이다.
숫자도 무한이다. 숫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우주도 무한이다. 우주도 시작과 끝이 없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식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식만으로 부족하니 종교들은 신비체험을 강조하는 것 아닐까?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으로 부족하기 때문 아닌가?
사람은 머리보다 경험을 우선한다.
그래서 구도여행 같은 수행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수행 없이 머리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래리는 왜 그곳에 매료되었나라고 물었을 때 “성스러움”때문이라 말하고 거기서 무엇을 얻었나라고 물었을 때는 “평화”라고 말한다.
어쩌면 모든 구도여행의 시작은 “성스러움”이고 그 끝은 “평화”일지 모른다.
래리가 인도에서 돌아와 얻은 직업은 택시운전이다.
“따뜻한 마음씨가 중요하다.
자제하며 자기완성을 추구하려 노력하다 보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아무리 똑똑하고 진리를 깨달아도 소용없다. 인간이라면 측은지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도움이 된다. 깨닫음만 추구하는 건 소용없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결론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깨달아도 이 정도가 최선 아닐까?
오랜 구도여행 끝에 다다른 결말은 평범하다.
사실 이것도 평범하지 않다.
상류층이 모든 걸 버리고 노동자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해탈한다는 것은 환생의 굴레를 벗는 것'이라고 하는데 환생에서 벗어난다는 게 어떻게 된다는 건지 상상이 안된다. 내 아트만이 브라만이 되어 더 이상 아트만이 안된다는 건가?
항상 깨닫고 난 후에도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아, '깨닫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아마도 크게 깨달으면 마음의 평화가 오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 깨달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겠지 정도였다.
아마 작가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한 것 같다.
결국,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세상에 대해 온 몸으로 죽을 때까지 깨달아 가는 과정이 해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