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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더 인간적이다?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by 푸른청년

왜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휴머노이드 로봇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까?


살다 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얼마나 돈이 더 되느냐’라는 걸 느낀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세상에 살다 보니

결국 인간성이라는 것이 돈보다 사람을 우선시하는 걸 의미하게 돼버린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우선시하는 것 같은 로봇들에게 인간미를 느끼는 것 같다.


돈이 우선 이어서일까

장애인에게는 세상이 더욱 혹독하다.

한 사람 몫을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까지 필요로 하니까

더구나 한 사람 몫이라는 판단은 장애인 스스로가 내리는 게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이름뒤에 숨은 타자들이 판단한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장애인 같은 약자를 더 살기 좋게 쓰이기보다, 강자를 더 강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된다.


한 사람 몫을 못하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이다.

성장이라는 것은 사회에 수긍하고 몸을 맞추는 과정이고, 그 과정은 폭력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남편과 사별한 엄마.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언니.

가장 의지하고 보듬어야 할 가족이

긴 병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해결할 틈이 안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잖은 상처를 줬지만

그 상처를 해결할 틈도 없이 또 새로운 상처가 쌓였고, 이전에 쌓였던 상처는 자연스럽게 묻혔다.”


이런 절망 속에 낙마사고로 고장 난 로봇기수 콜리를 우연히 얻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콜리를 고치고 가르치며 상처와 그리움을 극복해 나간다.


삼차원의 우리가 일차원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그리움이 곧 기억인데 기억을 포기하는 거라 말한다.

기억이 곧 고통이기 때문에,

현실이 행복해야 고통의 기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연골이 망가져 안락사를 눈앞에 둔 경주마 투데이의 달리는 장면이다.


“고작 이틀에서 14일로 삶을 연장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길까?”


살면서 수없이 맞닥트리는 질문이다.

하지만 잠깐이지만 영원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으면 기회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은 '희망고문이 아니다'라고 작가는 강변하는 것 같다.


“틀렸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세상에는 원래 이유가 없었어.

인간들이 이유를 가져다 붙인 거지.

그러니까 순서를 따지자면 이유 없이 생겨난 게 먼저야.”


그렇다. 원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유를 만든 것이다.

잠깐 삶이 연장된 것이 무언가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시도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인간과 로봇이 다른 점인 것 같다.

로봇은 확률에 따라,

아니면 알고리즘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지만,

인간은 그냥 감정에 따라 별별 이유를 다 만들어 도전하는 것 같다.


질게 뻔해 보이더라도,

여기에 카타르시스가 있다.


소설에서 로봇이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주창한 로봇 3대 원칙에 따라 사람을 더 위할 거라는 sf적인 믿음에 기반을 두는 것 같다.


따라서 로봇이 더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너무 계산적으로 살지 말라고 로봇에 빗대어 말해 주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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