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
영생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끝이 있을까?
장기기증을 위해 복제인간을 만든다는 설정은 영화 아일랜드에서 본 기억이 있다.
처음엔 평범한 영국의 기숙학교 풍경을 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미심쩍다.
“내가 그렇게 창조적으로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모든 게 아주 잘 될 거라고 말씀하셨어.”
특히 루시라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 듯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어.”
그래서 뭔가 학교가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고,
학생들이 그걸 파헤치는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중에 학생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려는 선생님이 있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학생들은 이미 어렴풋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우리한테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이야. 기증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야.”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우리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잖아”
우리가 언젠가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애써 무시하고 살듯이 그들도 마찬가지로 진실을 알지만 모른 척한다. 심지어 기증에 관한 농담으로 희화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학교나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착한다는 느낌이었다.
“잘 들어, 토미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건 중요한 일이야. 그게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에 그런 것만이 아니야. 너 자신을 위해 중요하다고”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선생님들에게 왠지 공감했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었다.
헤일 섬에서의 기숙학교 생활이 끝나고,
코티지에서 그들은 간병인 생활을 한다.
기증을 끝낸 복제인간들을 돌보는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도 기증을 해야 하는 신세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자신이 복제된 근원자를 찾으면
집행유예가 될 거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 끝에 알게 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이 소설은 복제인간에게도 영혼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복제인간도 영혼이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마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나 계급갈등도 비슷한 맥락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님은 로이한테 그림이나 시 같은 건 ‘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라고 했어.
‘영혼을 드러낸다’라고 말이야.”
그래서 기숙학교 교장이 생각해 낸 게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으로 복제인간도 영혼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럼 학생들에게 좋은 것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영혼이 있다는 증명이 한 인간으로서 인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상품을 의미한다는 것이라 느껴졌다.
좁은 닭장에서 키우는 닭이 아니라
방목해서 키우는 닭이 더 행복하고
그래서 더 건강한 닭이 되고
그런 닭을 먹어야 인간에게 더 좋다는 의미 말이다.
이렇게 보면 처음에 괜찮아 보였던 몇몇 기숙학교 선생님들이 애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조력한 것이 된다.
“너희가 게임의 담보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리라는 건 안다.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수 있어.
하지만 생각해 보렴.
너희는 그래도 행복한 담보물이야.”
이건 어떻게 보면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공지능이나 로봇 같은 자신의 창조물을 절대 자신과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듯이
신도 인간에 대해 그렇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들었던 의문은
‘복제인간들이 왜 반항을 안 할까’였다.
기숙사에서도 코티지에서도 그렇다.
그들은 근원자를 찾고 모험을 하면서도
단체로 조직적으로 반항하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게 진짜 행복한 복제인간들을 사육하려고 했던
교장 같은 인간들의 본심인지 모른다.
이건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과도 비슷하다.
지금 이 세계가 평온해 보인다고,
이게 진실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무언가 어긋난 점이 없는지 의심해 보라.
이 책에서 하는 진짜 질문은 이건지도 모른다.
의도를 감춘 거짓은 좋아 보이고,
진실은 고통스럽다.
혹시 우리도 지금 닭장 안에서 행복해하며 살고 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