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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Oct 12. 2019

누운 배 - 이혁진

월급 사실주의

어느 날 배가 쓰러졌다. 왜 쓰러졌는지는 중요치 않다. 회사는 천재지변으로 몰아간다. 황당하지만 결국 보험사도 전손처리해준다. 이게 회사다.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문 기사는 중국에 있는 중소 규모 조선 회사 경영기획팀에 입사한 지 일 년도 안된 전직 잡지사 기자 출신이다. 오 팀장 밑에서 보험업무를 보조하며 회사란 조직에 대해 알아간다.


1부는 배가 쓰러진 후 그걸 수습하는 과정이고 2부는 새로운 사장이 오면서 혁신을 주도하지만 반발에 부딪히고 결국은 실패하는 과정을 다룬다.


누운 배는 회사의 부조리를 의미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불합리와 관행, 부도덕과 비양심, 책임회피와 이기심이 있다. 회사와 회장의 입장을 대변하는 곽상무나 조 상무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회사생활을 통해 수없이 경험했던 것들이 떠올라 분노와 답답함을 느꼈다.


황 사장이 오면서 모든 관행과 불합리를 새롭게 뜯어고친다. 임원들과 팀장들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 대안을 마련할 때까지 달달 볶는다. 많은 성과를 내지만 회장 세력과 내부 반발에 부딪힌다.


회장은 황 사장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자 전문가 홍 소장도 반대한 누운 배를 세우려고 한다. 왜 회장은 누운 배를 세우려 했을까? 회장은 여러 계산이 있었을 거다. 첫째는 황 사장에 대한 테스트다. 불합리해 보이는 자신의 지시를 황 사장이 어떻게 처리하나 보는 거다. 만약 못 세우면 그걸 핑계 삼아 자를 수도 있고, 세우면 보험금도 받았으니 수리해서 팔면 큰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운 배는 이미 썩은 배였다. 황 사장은 여기서 끝난 거였다. 홍 소장처럼 누운 배를 세우는 건 바보짓이라며 떠났어야 했다. 회사에 아직 희망과 미련이 있었던 거다. 이후 황 사장의 혁신은 힘을 잃었다.


황 사장까지 떠나자 문 기사는 회사를 그만두려 한다. 회사는 나빠지고 있고 혹시 좋아진다 할지라도 대기업 출신의 화려한 스펙의 사람들이 영입되어 자기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거다. 반박하기 어렵다.


문기사가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라는 말은 충격이었다.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월급쟁이는 결국 돈과 자기 시간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말에도 새벽에도 밤늦게도 울리는 업무 카톡처럼. 자신의 죽을 시간을 사고파는 ‘인 타임'이라는 sf 영화처럼. 그래서 프리랜서 홍 소장이 “시간을 중히 쓰세요. 늘 젊은 게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기사는 어떤 사람이 된다면 황 사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난 황 사장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적당히 회사에서 자기 살길 찾는 정이사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황 사장 같은 사람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나는 이미 정 이사인지도 모른다.


누운 배를 봤으면 빨리 그곳에서 탈출하는 게 현명한 건지도 모른다.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은 '모든 것은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나 할 뿐이다'라고 본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좋은 것만 있을 수도 없고 나쁜 것만 있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동시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p20

사람들은 원인에 관해 말했지만 사실 책임에 관해 말했다. 생산 부서 사람들은 생산에서 발생하지 않는 원인들을 말했고  설계 부서 사람들은 설계에서 발생할 수 없는 원인들을 말했다. 섣불리 어느 부서의 책임이라고 공격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해두고 싶어 했다.


p43

“회사란 집단이 원래 포기가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돈이 나가도 내 돈이 아니고 책임을 져도 나 혼자 지는 책임이 아니니까요"


p99

최종 보고서라는 것 역시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쓰러졌다. 거짓 같은 참이다. 그 배는 천재지변으로 쓰러진 것이다. 참 같은 거짓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고 전손 처리로 가닥이 잡혔다. 거짓 같은 참이다.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사고라는 중간 보고서가 나왔다. 참 같은 거짓이다. 이제 그것에 따라 발생한 피해액과 배분이 최종 보고서로 나왔다.


p99

문서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문서란 엉성하고 허술한 현실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린 각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가 문서를 우습게 보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문서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현실을, 회사를, 정부나 국가를, 종교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누운 배 한 척이 그렇게 됐듯 사실이라는 것은, 참이나 거짓이라는 것은 힘으로 쥐고 흔들 수 있었다. 세상은 성기고 흐릿한 실체였다. 그것을 움켜쥔 힘만이 억세고 선명했다. 힘은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스운 것도 우습지 않게 만드는 것이 힘이었다.


p139

“결국 줄이다. 남자는 마흔 중반, 쉰 그쯤에서 다 꺾인다. 슬슬 하초에 힘도 달리고 여자도 지겹고. 그러면 눈이 어디로 가는지 아냐? 권력에, 정치로 가는 거다. 조직, 자기 세력이 남자의 지렛대가 되는 거지. 그걸로 서로 넌지시 가늠하는 거다, 누가 더 큰지.

어느 지위 이상 올라서면 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이 되게 시키고, 시키는 대로 해오게 만들고 그걸 내 부서, 내 조직의 실적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해지는 거다.


p181

올바른 목표가 올바른 방법을 찾고 올바른 방법이 올바른 실행을 찾고 올바른 실행이 올바른 역할을 찾아서 각 역할들이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해내면, 올바른 실행이 나오고 올바른 실행이 올바른 방법을, 올바른 방법이 올바른 목표, 즉 이기는 결과로 나오는 겁니다.


p301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그래도 어떤 사람이 된다면, 황 사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게 쫓기든, 저렇게 쫓기든 다 그만 아닌가? 모두 늙고 쭈그러든다. 희미하게 옅어지고 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모든 것이 허무할 따름이고 그 허무야말로 모든 것을 축축하게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중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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