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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Oct 20. 2019

집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집은 나에게 있어 판타지다. 가장 많이 하는 상상이 내 집을 어떻게 설계하고 꾸밀까이다. 반복되는 상상이 지겨울 법한데 아직 놓지 못하고 있는 걸로 봐서 정말 재밌나 보다. 아니면 아직 내 집이 없어서 일 수도 있고, 아직 내 집을 직접 지어보지 못해서 일수도 있다.


이 소설은 건축을 소재로 한다. 국립현대 도서관 설계 경합 때문에 전 직원이 여름 별장에 머무르며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약간 달콤 삽 싸름 한 삼각 로맨스가 양념처럼 가슴을 두근두근 하게 한다.


도서관이라는 공공 건축물을 설계해가는 과정이 디테일하고 재밌다. 글로 건축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무라이 소장은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남들에게 멋있고 아름답게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쓰는 사람의 목적에 맞고 편리해야 한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인데 지켜지기 어렵다.


그 건물에 어떤 목적이 있고, 어떻게 이용될 것인가가 설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작품성을 우선하다가 사용할 때의 편리성을 희생한 건축물이 놀랄 만큼 많다. 구조도 플로어 플랜도 쓰는 사람의 편의를 위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라이 설계사무소의 굳건한 원칙이었다. p119


무라이 소장은 소설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미국 유명 건축가의 제자로 나오는데 ‘라이트'는 건축의 문외한인 나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카우프만 저택(낙수장)의 설계자이다.



설계를 할 때 전체와 세부사항을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한다. 숲만 보다 보면 나무를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다 보면 숲을 보지 못한다. 둘 다 보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우선순위를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둘 다 중요하다. 도서관에서는 사람들의 동선도 중요하고, 책이 곰팡이 나지 않게 통풍도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 맞게 책장이 디자인되어야 하고, 사람들이 앉는 의자나 테이블의 위치도 결정된다.


“가구는 좀 더 뒤에 생각하자는 이구치 군 생각도 이해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은 토털 계획이 중요하지.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야. 물론 이구치 군도 그런 거야 알고 말한 거겠지만 말이야. 세부와 전체는 동시에 성립되어가는 거야.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반복해서 사람 모습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본 일이 있나?”
“손가락 같은 것은 놀랄 만큼 빠른 단계에 완성돼. 태아는 그 손가락으로 뺨을 긁기도 하고 열었다 닫았다.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건축에서 세부라는 것은 태아의 손가락과 같아. 주종관계에서의 종이 아니야.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이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p173


주인공이며 신입사원인 사카니시는 의자를 스케치하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스웨덴 유명 건축가인 아스풀른드 평전을 참고한다. 그의 대표작인 스톡홀름의 ‘숲의 묘지’는 몽환적이면서 조화롭다.



건축은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 시대의 숨결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빈집은 아무리 훌륭해도 죽은 집이다. 사람과 함께 변하며 증축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집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있다. 무라이 소장에게 여름 별장이 소중한 이유는 자기 연인인 후지사와가 근처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다.


“몸을 굽히고 들어가는 작은 출입구를 통해서 다다미 두 장 짜리 다실에 들어가는 것은 입구도 실내도 극한까지 작고 좁게 함으로써 안과 밖의 구별을 강렬하게 인상 지으려는 것이었지만, 보통 집도 마찬가지야.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들어오지 않는 것,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등 뒤에 남기고 자기만 안에 들어간다는 얘기니까.”
“그렇지. 밖에 남기고 온 것은 죽은 자이고 밤의 어둠에 사는 그 무엇인가이고, 비, 바람, 번개, 달, 별 즉 자연이야. 인간한테 안과 밖이라는 개념이 태어난 것은, 자의식 같은 것이 태어나 내면이 자라게 된 것은 자기들 손으로 집을 만들게 된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 p336


건축은 준공이 되어야 생명이 부여된다. 무라이 소장은 일생일대 역작을 설계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경합에 떨어지며 준공은 물거품이 된다. 설계사무소 사람들은 흩어지고 각자의 길을 간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다.


하지만 나중에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신입사원이었던 사카니시가 어찌어찌하여 빈집이던 여름 별장을 인수하게 되고 그곳에 남아있던 국립현대 도서관 모형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건축을 시작하게 된 그 여름 별장과 기억은 자기 마음에 각인되어 영원히 상실되지 않는다.


기억 속에만 남는 것은 부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너무 좋았다고,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그때만 생각하면 그리울 정도로 각인됐다고 한다면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p60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 거지"


p62

목소리란 참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거 같고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을 잘 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 남는다. 그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p113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효율이라든가 쓰임새 같은 것을 고려해서 기존의 사물을 개량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어. 프로테스탄트의 원점은 애당초 그런 것이었으니까.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유럽에서 급속하게 확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범용성을 철저하게 생각한 개혁이기 때문이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라는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면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베끼던 사본보다 몇백 배 빨리, 대량으로 인쇄하는 것이 가능했지. 게다가 그때까지 터무니없이 크고 무거웠던 탁상용 성경을 루터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사이즈로 바꿨어. 또 대부분의 사람이 읽지도 못하고 읽으려고도 하지 않은 라틴어가 아니라, 책의 세계에서는 천시되던 독일어로 번역했지. 덕분에 성경은 급속히 널리 읽히게 된 거야. 프로테스탄트들의 실용성에 대한 감각과 신뢰는 이런 데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어"


p180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독서라는 것은, 아니 도서관이라는 것은 교회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혼자 가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p202

“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주위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이쪽은 인명은 물론 가재도구도 전부 무사해.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야. 그런 사태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까? 마지막은 운을 하늘에 맡기고 천우신조 덕이라고 생각하면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철저하게 방재를 한 주택은 요새지, 주택이 아니야. 살기 편할지 어떨지 의심스러워. 요새에 산다는 건 늘 재난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과 같으니 말이지.”


p287

“고객이 시키는 대로, 납기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라는 건 물론 아닐세. 만일 고객이 불평하거나 변경해달라고 했을 때 마감이 임박할 때까지 주물럭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 자네가 잘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어. 그런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라도 늘 시간은 봐 둬야 하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설계사무소가 있는 것은 한정된 시간을 사람 수로 늘리기 위해서이기도 해. 혼자 하면 하루 걸릴 일이 둘이 하면 반나절이면 끝나지. 도서관 설계 같은 것은 나 혼자 하다가는 오 년이 지나도 안 끝나. 내가 자네들한테 맡기는 것도, 자네들이 나한테 맡기는 것도 협동이라는 거지. 제자니 보스니 하는 상하 관계하고는 별개야. 신뢰지. 그렇지 않으면 같이 일 할 수 없어.”


p316

“그게 재미있는 점인데 뻔뻔한 꽃에 한 해 줄기나 잎사귀는 패기가 없어요. 줄기에 맥이 없거나 잎사귀와 잎사귀 사이가 이상하게 휑하거나 뭔가 전체적으로 감칠맛이 없고 힘이 없지요. 꽃이 에너지를 다 뺐어간 것처럼. 큰 비라도 내리면 제일 먼저 고개를 숙여버리고, 한 송이만 잘라서 꽃병에 꽂으면 그 순간 의기소침해진 것처럼 생기가 없어지죠. 뻔뻔한 꽃들은 떼를 지어요. 고독에 약하지.”


“사람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주장이 강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은 막 퍼지지요. 조용한 사람은 져버려요.”


p328

자연의 형태나 색채가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태어났다면 예컨대 꽃에게, 새에게 나무에게 이다지도 많은 종류와 변화가 초래되었겠는가. 박새의 가슴께에 흑백으로 그려진 무늬는 왜 그렇게 생겼는지, 각각의 개체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형태나 색은 그것을 지니는 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 옛날부터 시간을 들여 찾아왔고, 그냥 계승되어가는 것이다.


p415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의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그렇게 악취미로 생각되던 니시하라 캐티드럴 성 베드로 대성당도 지금은 주변 풍경의 중심이 되고 조용한 침착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사람과 시간이 그 대성당을 키운 것이다.

모형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한 채 서서,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억누를 수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쓰러져가는 건축물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증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과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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