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청년 Jan 12. 2020

역겨움이 익숙해지면

김언수 장편소설 설계자들

1.

2016년 프랑스 추리문학 대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엔 실패했고 억대계약료로 미국에 판권이 팔렸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여기서 ‘설계자들’은 살인을 설계하는 놈들을 뜻한다. 타깃이 정해지면 트래커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일 것인지 세밀하게 준비해서 킬러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살인청부업이 성황을 이룬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정권이 들어오고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대기업들이 돈을 벌기 시작할 때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안기부 같은 데서 그냥 남산으로 끌고 가 고문하면 됐지만 민주정권에서는 그럴 수가 없으니, 은밀히 이들을 고용했고, 대기업들은 경쟁자들을 없애기 위해 이용했다.


아무도 책 보러 오지 않는 ‘개들의 도서관'이라는 살인청부 업소를 위장으로 운영하는 구세대 보스 ‘너구리 영감’과, 그 밑에 있다 나와서 외국 유학까지 하고 번듯한 보안회사를 운영하는 신세대 보스 ‘한자'와의 갈등과 경쟁 구도가 한 축이다.


2.

주인공 ‘래생(來生)'은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입양되어 키워지며 너구리 영감 밑에 몇 안 남은 킬러 중에 하나이고 에이스다. 원래 킬러는 타깃과 말을 섞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소설이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이미 파국을 예고 한 건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선 악하기만 한 악당은 없다. 배신한 킬러만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이발사'도 식물인간 딸이 볼모로 있었듯이 극악무도한 악당도 알고 보면 다 사연이 있다.


부모님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고, 동생은 다리를 잃고 복수의 일념으로 설계자의 조수가 된 ‘미토'는 악마를 잡기 위해 자신도 악마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래생을 이용한 마지막 설계를 하고 자신도 죽으려 한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이런 지옥 같은 세상을 판을 깨고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낌으로 안다.


래생은 자기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행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은둔생활 중에 만난 여공과의 동거생활도 행복할 때쯤 도망 나오고, 마지막 순간에 미토 대신 죽음을 택한 이유도 미토에 대한 사랑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3.

래생은 자기가 좋아하던 선배 킬러가 타깃이 된 창녀를 죽이지 않고 조직을 배신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생활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 목숨을 담보로 살려준 그 창녀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도 다시 창녀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을 작가는 익숙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겨움이 익숙해지면 바깥으로 내던져졌을 때의 두려움이나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역겨움을 견디는 게 더 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왜 자기가 이렇게 살아가는지 자각하지 못하며 익숙함에 매몰되어 살아간다. 설계자들도 살인을 설계하지만 왜 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모르고, 킬러들도 다만 주어진 일에 충실하게 설계한 대로 실행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품일 뿐이다. 그리고 이게 익숙해서 그냥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 살아가도 좋은 것일까?’하고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이 판을 깬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냉소를 보낼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홍콩 누아르가 비장한 것은 지옥 같은 세상에 냉소를 던지고, 결국엔 자기희생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처럼 한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역겨움이 익숙해지면 이 판을 끝낼 때다.




p197

바람잡이 여자가 파마머리 여자를 이 청부 사무실까지 데리고 오느라고 몇 달 동안이나 공을 들였을 것이다. 목표를 정하고, 정보를 캐내고,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고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그리고 때가 되면 “왜 그렇게 억울하게 살아요? 다른 길도 얼마든지 있는데" 하면서 슬며시 바람을 넣는다. 바람잡이 여자가 단골로 쓰는 “누구나 인생에는 한 방이 있대요" 따위의 말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웃기는 소리다. 인생은 멀리서부터 복잡하게 꼬여온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 방에 풀리지 않는다.


p212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에는 창으로 찔린 자국이 있지. 창녀와 포주는 농부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직업이고,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아들이 한 일도 살인이었지. 그 이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었지. 문명이건 예술이건 종교건 하다못해 평화도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것이 인간이란 종이야. 인간이라는 종은 처음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거지. 살인자의 편에 기생하거나 아니면 상대편을 주이거나.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지. 인류는 그런 아포토시스로 지금까지 버텨왔던 거야. 그게 이 세계의 참모습이지.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그것을 멈추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결국 누군가는 포주와 창녀와 청부업자 노릇을 하며 살겠지. 웃기게도 그래야 세상이라는 수레바퀴가 또 돌아가는 거고.”


p224

“그러려면 일단 평범함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해. 그리고 평범함 자체가 되어야 하지. 사람들은 평범한 것들을 눈여겨보지 않고 눈여겨보더라도 쉽게 잊어버리거든. 하지만 평범함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야. 기억에 남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들고, 기체처럼 가볍고 모호하게 떠다니다가 점점 사라지게 만드는 것, 마치 공기처럼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 같이 사람들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가게 해주는 것. 그런 몸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

작가의 이전글 이것이 인간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