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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Jan 04. 2020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대인이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는데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자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호송됐다.


수용소에서 생사를 가르는 기준은 ‘일을 잘할 거 같은가'이다. 도착하자마자 심사하는데, 잠깐 훑어보는 1~2초 사이에 누구는 가스실로, 누구는 노동수용소로 보내진다. 이렇게라도 포로들을 살려둔 이유는 독일이 전쟁 막바지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스실로 갈 만한 사람들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는데 종교적 비하의 의미다. 이곳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왼쪽 팔뚝에 ‘174517’ 같은 번호를 문신으로 새기고 그 번호로 불린다. 번호를 보면 언제 왔고 어디서 왔는지 등을 알 수 있다.


200여 개의 코만도(작업반)가 있고 각각의 코만도에는 카포(반장)가 있다. 노역은 너무 힘들고 배급량이 적어서 노역 중에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곳에서 특권층은 카베(의무실)와 같은 곳에서 특정 임무를 부여받아 고된 노역을 면제받는 해프틀링(포로)을 뜻한다.


생존에 유리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정신적으로는 미치광이라서 멘털이 붕괴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또는 독일어 및 다른 언어에 능통한 사람들이다. 유럽 각지에서 잡혀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 나라말만 한다거나 하면 몸짓, 발짓에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여 의사소통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배급받는 빵이 곧 돈이다. 담배 한 가치는 빵 하나, 담요는 빵 두 개 하는 식이다. 자기 물건은 언제 없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잘 때나, 씻을 때도 담요에 싸가지고 다녀야 한다.


작가는 수용소를 ‘포로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라고 말하지만 수용소가 얼마나 나쁜 곳인지 설명하며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 생활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어 수용소도 다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고 느끼게 한다. 글에서도 독일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심지어 별다른 증오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 포로의 시선에서 자기가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만 썼지, 그 후에 알게 된 배경이나 사실을 쓴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용소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조직을 만들고, 동정을 얻고, 도둑질을 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살기 위해서 도덕이나 윤리는 사치다. 하지만 동물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게 사람 마음이다. 이런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다만 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목표다. 수용소는 감옥과는 달리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는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어쩌면 지금 지옥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조언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단지 지금 생활을 견디기 위한 수단일 뿐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처음 수용소에 같이 왔었던 90여 명의 이탈리아 인들 중 1년이 지난 후 살아남은 사람은 20여 명이었고 러시아 해방군이 들어왔을 때 최종적인 생존자는 4명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참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냈고, 14권의 책을 냈으며, 이 이야기로 수많은 강연을 다녔던 작가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40년이 지나서 자살했다.


그는 왜 자살을 했을까? 자기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자기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인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학살이 그것도 불과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에 유럽 한복판에서 자행됐는데 왜 그 많던 유럽의 지성인들은 외면했을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무지를 획득하고 자신은 별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려면 질문하면 안 된다. 부조리가 있어도 외면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이런 수용소가 유지된다. 작가는 이런 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묻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민주주의 정치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과 의지를 남에게 위임하는 것인데, 우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우리가 신중하게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수용소의 포로로 살고 있는걸 수도 있다.




p57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p106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p125

우리에게 수용소는 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용소는 게르만식 사회구조 한가운데에서 시간제한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일 뿐이다.


p134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메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p136

가스실로 가는 무슬림들은 모두 똑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사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끝까지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근본적인 무능력 때문에, 혹은 불운해서, 아니면 어떤 평범한 사고에 의해 수용소로 들어와 적응을 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다.


p148

엘리아스는 육체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내부로부터의 절멸에 저항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존자가 된다. 그는 이런 식의 생존 방식에 가장 적합하고 표본적인 인간이다.


p149

앙리의 이론에 따르면 집단학살을 피하기 위해,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 조직을 꾸미는 것과 동정을 얻는 것, 그리고 도둑질이다.


p179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는게 우리의 지혜였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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