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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Nov 18. 2022

하늘에 하느님/하나님은 하나? - 2

그런데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 이외에 왠지 기독교일 것만 같은 종교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유대교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인 유대 지역은 기독교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이고, 그도 유대인이기에 그렇게 생각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이슬람교가 기독교가 아닌 것처럼 유대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입니다. 일단 유대교는 기독교를 규정하는 중요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메시아는 "구약 성서에서, 초인간적 예지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 "신약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세계 종교가 된 지금 구약의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한정하지 않고 만인을 구원하는 왕 정도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전의 이런 구약의 정의는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 인정하지만,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약의 정의는 유대교 본산인 이스라엘 국어사전에선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기독교는 세계 각지에 많은 교파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유대인이 역사적으로 기다려 온 메시아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의 유대교에선 이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작품 속 두 사내처럼 말입니다. 하물며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중엔 예수를 구약 시대 이후로 숱하게 왔던 선지자급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같은 종족임에도 찬밥 대우를 하니 예수 생전 가라사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누가복음 4:24)라고 체념성 발언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유대교엔 예수의 생일인 크리스마스도 없습니다. 유대인은 크리스마스를 우리 불교 신자들이 생각하는 정도의 공휴일로 인식할 것입니다. 이것은 요즘 들어 서구에서 크리스마스 인사로 그간 독점해온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이외에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도 점차 많이 들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동족인 유대인에 의해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미하엘 문키치, 1844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다소 놀랍게도 그들이 섬기는 무함마드(마호메트)보다 세상에 먼저 온 예수를 선지자로 확실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생전에 벌인 기적들도 인정합니다. A급 선지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은 존재는 당연스레 진정한 선지자로 추앙받는 무함마드 하나뿐입니다. 그 종교의  파운더이니까요. 즉, 기독교의 메시아는 서기 1년에 세상에 온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슬람교의 메시아는 570년에 온 무함마드인데, 유대교의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구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준 3개 종교 간 가장 뚜렷한 차이일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더 논하자면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그날은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가 태어난 12월 25일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크리스마스이지 정교회의 크리스마스는 아닙니다. 태어난 날은 같은데 그날을 카운트 한 캘린더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캘린더는 그레고리력에 기초하는데 정교회는 로마 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5년에 선포한 율리우스력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에 등장하는 그 가이사가 만든 캘린더입니다. 그래서 정교회의 시간은 세계 표준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교회답게 예수 생전에 사용했던 캘린더를 따르는 것이 정통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율리우스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의 발달로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1582년 그레고리 13세 교황은 그간 벌어진 오차를 수정하여 그의 이름을 딴 그레고리력을 제정하고 율리우스력을 폐기하였습니다. 그 그레고리력에 현대 과학으로 추가적인 오차까지 잡은 것이 지금 세계가 사용하는 최종 캘린더입니다. 본래의 그레고리력과는 미세하게 다르지만 그래도 그 캘린더는 오늘날까지 그레고리력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레고리력을 제정한 그레고리 13세 (1502~1585)


그런데 정교회는 오늘날까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율리우스력에 따른 1월 7일입니다. 서방 모든 국가들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환하게 밝힌 오색등이 다 꺼진 1월 초에 그들은 크리스마스 미사를 드리고 축제를 즐깁니다. 그렇듯이 크리스마스와 함께 기독교 2대 축일인 부활절을 카운트하는 방법도 정교회는 다릅니다. 동방 정교회 입장에선 서방 카톨릭의 교황이 주도해서 만들고 이름까지 붙은 그 캘린더를 따르고 싶지 않아서도 그렇게 해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레고리력이 제정된 시기는 교회의 동서 대분열로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했던 때였으니까요.


경전으로 보면 유대교는 기독교의 구약에 해당되는 제1 경전 타나크(Tanakh)와 바빌론 유수 시 그곳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집대성한 제2 경전인 탈무드가 있습니다. 타나크는 거의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쓰여있어 히브리 성경이라고도 불립니다. 유대교 율법서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토라는 이 구약(타나크)의 앞부분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의 5권을 가리킵니다. 이집트에서 유대인을 탈출시킨 모세가 썼다고도 알려져 모세오경으로도 불립니다. 물론 그 안엔 모세가 하느님께 직접 하사 받은 십계명도 들어있습니다. 1세기에 출현한 기독교는 본래 유대인의 경전인 이 구약에 예수 출현 이후 제자들이 쓴 복음서인 신약이 붙어 완전체가 된 바이블(Bible)을 경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나중인 7세기에 출현한 이슬람교는 이 구약과 신약 내용 중 그들의 종교에 위배되는 내용을 제외한 것에 무함마드가 저술한 코란(Koran)이 더해집니다. 이슬람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장점을 더해서 만들었다는 근거가 될 경전의 유래입니다.


성직자의 경우 기독교는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 모두 신과 인간의 중간에 성직자가 있지만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는 성직가 없습니다.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귀에 많이 들리는 유대교의 랍비는 율법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지 성직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예배를 인도합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도 공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맘이라 불리는 예배의 인도자는 지식인이든 무식자이든, 부자든 거지이든 누구나 예배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신 알라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면일 것입니다. 예배를 보는 장소도 기독교는 성당, 교회 등으로 불리지만 유대교는 시너고그, 이슬람교는 모스크라 불립니다.


프라하에 소재한 화려하고 독특한 예루살렘 시너고그, 유대인의 표식인 다윗의 별이 정면에 보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타고 올라가면 그 꼭대기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 족보 중간쯤엔 유대 왕국을 통일한 다윗과 지혜의 왕 솔로몬도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뒤늦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으로 인하여 이렇게 화려한 유대인의 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그는 무슬림에겐 이브라힘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슬람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으로 안 내려가고 그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 쪽으로 내려갑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이집트 출신 이방인인 여종 하갈을 통해 먼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즉, 측실을 통해서 난 서자였습니다. 하지만 정실인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자 그는 16세 때에 친모와 함께 추방을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됩니다. 상속과 후계를 염려한 사라가 아브라함을 독촉해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먼저 태어났음에도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버림받은 이스마엘을 선조로 생각하는 이슬람교와 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섬기는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서로 배척하는 데에는 이런 뿌리 깊은 배경도 작용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원전 바빌론 유수에 이어 1차 유대-로마 전쟁(66~73) 등으로 멸망해 디아스포라를 겪으며, 유럽 어디에 정착하든 주변인으로 고립되어 생활하고, 20세기 들어선 히틀러에 의해 대학살로까지 이어진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주도 세력이었기에, 이후 서양의 역사를 주도한 기독교도들에 의해 배척을 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든, 신화든, 종교든, 세상사와 인간사는 땔감을 땐 굴뚝에선 반드시 연기가 나듯이 필연적인 인과 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뿌리 깊은 연유로 기독교 대 유대교, 유대교 대 이슬람교, 이슬람교 대 기독교의 반목하는 역사가 이어져 온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아브라함>, 게르치노, 1657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창세기 21장 17~20절)   


아, 그런데 하느님은 이스마엘 모자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위의 구약 창세기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는 이스마엘입니다. 그와 엄마 하갈이 광야에서 아브라함이 내쫓을 때 싸준 식량과 물이 다 떨어져 생사를 헤맬 때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렇게 그들을 살리고 큰 민족을 이루라는 축복까지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대로 이스마엘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선조가 됩니다. 이렇듯 육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이스마엘 모자를 버렸지만 영의 아버지인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위의 구약 창세기 내용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3대 종교가 모두 공유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광야에서 생사를 오가던 이스마엘과 하갈을 살려주고 축복한 신은 기독교의 카톨릭과 정교회에선 우리말로 하느님으로 불리지만 개신교에선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는 개신교 성경이기에 하나님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하느님은 히브리 원어로는 여호와(Jehovah), 또는 야훼(Yahweh)가 됩니다. 사실 여호와나 야훼든 이것이 불분명한 것은 하느님이 직접 내가 누구라고 밝힌 것을 들은 사람은 그로부터 십계명을 전달받은 모세가 유일하므로 모세만이 정확한 그분의 이름을 알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야훼 하느님은 이슬람교에서는 알라(Allah)가 됩니다. 영어 성서에선 가드(God)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위의 창세기에 이스마엘 모자를 살린 같은 사건에 등장한 그 신은 다 다르게 불리지만 다 같은 신일 것입니다. 종교마다 하늘에 계신 그분에 대한 인식과 섬김의 방법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분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요,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다스리는 절대자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세상에 딱 한 분밖에 안 계시는 유일신인 데다가 사는 곳도 같고, 하는 일도 같은 그분이 종교마다 다르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일 것입니다.     


코란을 읽고 있는 이슬람 신자 (출처, pixabay)


지난 9월 저는 구 유고슬라비아 여행 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방문했습니다. 그 나라는 20세기 말 그곳을 포함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등 6개 나라로 쪼개지는 연방 해체 과정에서 후유증이 가장 컸던 나라입니다. 제가 방문했던 그날도 버스로 통과하는 곳의 도로 양 옆 가옥과 건물마다 내전 당시 박힌 선명한 총탄 자국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더 심하게 내전(1992~1995)으로 몸살을 앓은 것은 위의 다른 유고 연방의 국가들에 비해 종교가 상대적으로 균등한 비율을 보이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종교별 신자수 분포는 이슬람교 40%, 세르비아 정교회 31%, 로마 카톨릭 15% 등으로 폭넓게 퍼져있습니다. 이렇게 한 종교로 치우쳐 있지 않기에 주변국인 세르비아는 자국계 정교회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크로아티아는 자국계 카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을 침공하고 메이저 종교인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세르비아는 정교회 신도수가 84.6%로, 크로아티아는 카톨릭 인구가 86.3%에 달할 정도로 구 유고 연방 국가들 중 이 둘은 거의 강력한 단일 종교 국가들입니다. 그런 나라들이 종교적으로만 보면 가장 평등해 보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탄압한 것입니다. (출처, 외교부 홈페이지)


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두 도시를 방문했는데 먼저 간 도시는 이곳에서 일전에 올린 <유 고 유고슬라비아(You go Yogoslavia)?>에서도 소개한 모스타르였습니다. 모스타르 시내에 진입하면 일단 눈에 띄는 것이 이슬람 모스크의 첨탑입니다. 하지만 그곳엔 동방 정교회 성당도 있고, 서방 카톨릭 성당의 십자가도 눈에 띕니다. 그리고 시내를 걸으며 보니 유대교의 예배당인 시너고그 터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인구 11만의 이 중세 도시에선 역사적으로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이 도시를 관통하는 좁은 네레트바 강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서로 사이좋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 강엔 평화를 상징하는 다리인 스타리 모스트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전 시 1993년 그 다리는 무참히 폭파되었습니다. 1566년 오스만 제국 때 건립되어 오래된 다리라는 뜻을 가진 다리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그간 모스타르 시민들은 여호와와 알라 두 신을 섬기며 역사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해왔는데 그 교류의 상징이자 실제인 다리가 끊어졌습니다. 아래 사진 좁은 강 왼편엔 알라 신이 살았고, 오른편엔 여호와 신이 살았습니다. 아, 지금도 살고 있겠지요. 이렇듯 정작 그곳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렇게 다른 신을 섬기며 함께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곳에 살지도 않는 외부인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평화를 깬 것입니다. 종교에 정치가 개입되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 다리는 강에 빠진 파편들을 모아 2004년 복구되었습니다. 평화의 상징이 부활한 것입니다. 재건축 준공식엔 현재 영국 국왕인 찰스 3세를 비롯한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을 하여 그 다리를 건넜습니다. 제가 방문한 그날도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자유롭게 오갔습니다. 기독교 지역에서 이슬람 지역으로, 이슬람 지역에서 다시 기독교 지역으로 말입니다.


내전 시 폭파된 모스타르의 다리와 복구된 오늘날의 다리. 왼편은 이슬람 타운, 오른편은 기독교 타운


모스타르에서 남서쪽으로 30분 정도 차로 가면 메주고리예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인구 2,3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그곳엔 연중 내내 그 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 방문객들은 순수 여행자와 성지 순례자로 구분됩니다. 그곳이 1981년 성모 마리아가 출현한 성모 발현지이기에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포르투갈의 파티마와 같은 곳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에도 많은 신자들이 와서 야외 미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십자군 원정 때 순례자들의 의료 문제를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몰타 기사단의 십자가 로고가 박혀있는 건물과 그 앞의 구급차도 보인 것으로 보아 이곳은 정교회가 아니고 카톨릭 성지임이 틀림없습니다. 교황청은 이곳을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성모 발현지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프란체스코 교황은 2018년 이곳에 교황청 상주 특사를 파견하고 그 이듬해 신자들의 순례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였습니다. 이슬람교가 메이저인 국가에, 그다음으로는 기독교의 정교회가 다수이고, 카톨릭 신도수는 고작 15%인 국가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주고리예를 방문한 성지 순례자들의 야외 미사 모습, 2022. 9


지금까지 저는 서구 문명의 큰 축인 히브리즘의 종교인 기독교의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와 그 주변의 유대교와 이슬람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주로 두드러진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한 비교점들은 훨씬 많겠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영성과 교리는 배제한 인간의 관점에서 본 내용들만 집어서 언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지역도 인접해 있어 이렇게 덜 이질적인 면도 있겠으나 기독교와 멀리 떨어진, 예를 들면 동양의 불교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너무 멀리 가는 것일까요?


아래 내용은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가 쓴 신문 칼럼인 <新유대인 이야기>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그는 국내에서 유대인 전문가로 손꼽히는 학자입니다. 생각해보니 과거 한 조찬 모임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네요.


"높은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하느님께 가는 길도 이와 같지 않을까? 틀린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이다. 종교마다 올바르게 사는 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이를 유대교에서는 '율법', 기독교에서는 '복음', 이슬람교에서는 '코란', 불교에서는 '다르마', 힌두교에서는 '요가', 도교에서는 '도'라 부른다." (출처, 조선일보, 2022.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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