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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Nov 25. 2022

추일서정(秋日抒情) 123

릴케, 김광균, 이효석의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 들판에 많은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 마지막 열매를 알차게 익게 하시고 / 이틀만 더 남녘의 햇볕을 주시어 /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소서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짓지 않습니다 / 지금 외로운 사람은 이후에도 그렇게 남아 / 밤새워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 그러다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질 때면 /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릴케의 가을이 시작됨을 알리는 시입니다. 가을은 시인으로 하여금 많은 시를 양산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계절에 비해 짧은 시간임에도 그 계절이 주는 시상이 다른 어느 계절보다도 다양하고 풍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시인을 위해 그 짧은 가을은 친절하게도 케이크 조각 마냥 또 셋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초추(初秋), 추(仲秋), 만추(晩秋), 이렇게 말입니다. 봄, 여름, 겨울도 그렇게 부를 수는 있지만 실생활에서 잘 들리지는 않습니다. 계절 중 느낌적으로도 가장 긴 겨울을 예로 들면 그것을 우리가 초동, 중동, 만동 이렇게 부르지는 않으니까요. 그것은 타 계절이 가을처럼 뚜렷한 구분점이 없어서도일 것입니다. 겨울은 그저 춥다는 한 단어로도 충분할 수 있으니까요.


교과서에도 실린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기억해보면 거기엔 '초추의 양광(陽光)'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정원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의 양광이 떨어질 때 대체로 우린 슬퍼한다"는 구절입니다. 이렇듯 작가인 안톤 슈낙은 그냥 가을이라고 하지 않고 콕 집어서 초가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그 새는 이어서 바로 올 중추의 결실을 못 누리게 된지라 그 어느 시기보다도 초추에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죽은 것이 작가 눈엔 더 슬퍼 보였나 봅니다. 물론 이 글은 시가 아니고 수필입니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우리나라 <애국가>의 3절에도 이렇게 가을이 등장합니다. 애국가의 가을은 가을의 정점인 중추일 것입니다. 중추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천고마비의 가을입니다. 그 중추의 또 가운데 중추절이라 불리는 추석이 있습니다. 애국가의 가사도 시(lyric)일진대 현재 그 시를 쓴 작사가는 공식적으로 없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윤치호라는 설이 유력한데 그가 누구이든 정확히 밝혀지길 바랍니다. 명색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노래인데 그 노래 절반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것이 왠지 정통성이 없어 보여서도 그렇습니다. <아리랑>처럼 자생적으로 발생한 민요라면 모를까요. 행안부 홈페이지에도 애국가는 작곡가 안익태만 있고 작사가는 공란으로 되어있습니다.


추일서정 1. 가을 시의 대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맨 위 릴케의 시 제목은 <가을날>입니다. 독일어인 원제(Herbsttag)로도 정확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쓴 시점은 내용으로 보아 가을 초입인 초추가 분명해 보입니다. 방금 마감한 여름을 과거분사형으로 찬미했으니까요. 릴케의 가을은 이제 수확의 계절인 추를 향해 가고 있어 보입니다. 시의 중간부에서 그는 다디단 마지막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이틀만 더 따스한 햇볕을 달라고 주님께 기원하니까요. 맛난 와인도 등장하고요. 하지만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그의 가을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시의 끝부분에 등장한 고독한 사람이 밤새 긴 편지만을 쓰고 읽고 하다가,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질 때 불안스러운 모습으로 이리저리 길가를 헤매니 말입니다. 만추의 정경입니다.


이렇듯 세 단락으로 나뉜 릴케의 <가을날> 시는 가을을 시간에 따라 초추, 추, 만추로 3등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기별로 다른 그의 서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해석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쓴 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체코,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을 전전하며 살던 그였기에 세기말과 20세기 초 유럽의 가을날도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구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장미를 꺾다가 파상풍으로 죽은 낭만적인 시인으로 한동안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51세의 나이에 패혈증으로 죽은 그였지만 그는 사망 시 그의 병명을 모르고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11월 23일은 역시 가을날의 시로 유명한 우리의 김광균 시인이 타계한 날이었습니다. 1914년에 태어난 그는 1993년에 사망을 하였습니다. 사실 우린 그가 일제 강점기에만 활동한 시인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비교적 오랜 기간 생존하고 시를 썼음에도 그렇게 생각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시인 이외의 직업이 하나 더 있어서도 그랬습니다. 그는 동생의 변고로 인해 1950년부터 가업인 건설실업이라는 무역 회사의 사장을 맡으며 그로부터 약 30년 동안 시를 멀리 했습니다. 시인이 기업인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한국경제인협회 이사, 무역협회 부회장을 맡을 정도로 그는 사업에 열중했으니까요. 포탈에서 김광균을 검색해봐도 그는 프로필에 시인과 실업인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추일서정>, <와사등>, <설야> 등 제목만 들어도 그 낭만성으로 가슴 한 구석을 울렁거리게 하는 시인이 기업 경영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설야> 속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집니다. 1982년 그는 다시 시인으로 돌아왔습니다.  


추일서정 2. 가을날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 김광균, 1914~1993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 포화에 이지러진 /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 포플러 나무의 근골 사이로 /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 한 가닥 구부린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시인의 대표작인 <추일서정>입니다. 어쩌면 이 시는 우리 국민이 가을 하면 떠올리는 첫 번째 시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교과서에 나와서도 그렇고 도입부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가 워낙 강한 시구여서도 그럴 것입니다. 가을을 시로 쏟아내는 시인들이 많다고 했지만 그들이 그려내는 가을 중 가장 많은 시기는 초추, 중추, 만추 중 만추일 것입니다. 이유는 위의 시처럼 그때에 낙엽이라는 오브제가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만큼 낙엽은 시인, 아니 문인들에겐 강하고 매력적인 소재라 하겠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인데 그 심상에 올리면 비유할 것이 참 많은 것이 낙엽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위의 시도 제목은 전체 가을을 나타내는 <추일서정>이지만 시에서는 낙엽이 있는 만추의 서정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시인은 만추일서정, 이렇게 제목을 달지 않았습니다. 시인에게 가을은 곧 만추였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김광균 시인은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이 시를 발표했습니다.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서슬 퍼런 시기에 그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이렇게 낙엽에 비유하여 시를 쓴 것입니다. 시에 폴란드를 등장시킨 것은 이전 해인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민감했던 시인은 세계사의 시류를 시에 넣은 것입니다. 당시 무너진 폴란드의 정부국외로 도피해 파리에 망명 정부를 설치했습니다. 그 망명 정부가 발행한 화폐는 당연히 아무 가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낙엽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만큼 낙엽은 쓸모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겠지요.


양재천 수변의 가을날


낙엽이 못 쓰는 지폐가 되었듯 비유는 계속 등장합니다. 구름은 셀로판지로, 길은 구겨진 넥타이로, 기차의 매연은 담배 연기가 되었습니다. 시에서 등장하는 도룬 시는 폴란드의 중공업 도시인 토룬(Torun)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곳으로 과거 한자동맹 때부터 발달한 유서 깊은 도시인데 그곳에 독일군의 포탄이 날아갔으니 그 가을 하늘은 낙엽처럼 볼품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당시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도 그러했습니다. 시에선 기울어진 풍경에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허공에 돌 하나 던지는 것뿐이라고 자조하는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렇게 그는 돌팔매질하는 심경으로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슬픈 그의 <추일서정>입니다. 


김광균 시인은 김기림,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의 선봉에 선 깬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도시적인 감성과 세련된 기교가 더해져 마치 어떤 이미지를 보는 듯합니다. 추일(秋日)보다 먼저 온 설야(雪夜)에 밖에서 내리는 눈 소리를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표현했던 그였습니다. <설야>는 <추일서정>을 발표하기 2년 전인 1938년에 쓴 시라 하니 그 시절 여인들의 옷이라곤 모두 한복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의 한복은 벗을 때 무어라 의성어로 표현하기 힘든 소리가 납니다. 시인은 그 소리를 겨울밤 멀리 눈 내리는 소리로 비유한 것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시는 곧 회화라고 하는 모더니즘이 식민지 시절 한 젊은 시인에 의해 마음껏 구현되었습니다.


낙엽은 시인이 그러했듯 대개 절망의 아이콘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인간의 삶이 희극과 비극으로 절반씩 나눠져 있다고 할 때 변하고, 늙고, 생명을 다하고, 떨어져 나가고, 나뒹굴고, 버려지고, 쓸리고, 태워지고, 썩는 낙엽만큼 더 비극적인 자연 소재는 많지 않기에 그럴 것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서 등장인물이 그렇게까지 마지막 잎새를 낙엽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끝까지 사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김광균 시인과 같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활동을 하였지만 그 시절 같은 낙엽을 다르게 본 작가도 있었습니다. 역시 우리에게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잘 알려진 이효석 작가입니다. 그는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만추에 낙엽을 태우면서 나는 매캐한 연기에서 갓 볶은 커피 향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곤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이 나서인가 낙엽 타는 냄새에서 맹렬한 삶의 의욕까지 느낀다고 했습니다. 낙엽을 태운 그는 낙엽의 연기와도 같은 목욕물 위에 피어오르는 김 아래로 그의 전신을 담궈 마치 안갯속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기듯 천국 같은 느낌에 빠지는 것을 꿈꿉니다. 지상 천국이 별개 아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뜨거운 불에서 시작해 뜨거운 물로 이동한 그의 낙엽을 태우는 의식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고 불에 자기 몸을 태워 젊어진 불사조 피닉스처럼 낙엽을 태운 그는 다시 소년이 된 듯 용감해졌습니다. 이제 그는 백화점에 가서 찧은 커피를 사 오고 집에 와선 바로 닥칠 겨울에 장식할 크리스마스 트리와 즐길 스키를 생각하며 즐거움에 빠집니다. 전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전위적인 그의 모던함에 매우 놀랐습니다. 1938년, 그 엄혹한 시절 만추에 낙엽을 태우면서 이런 삶을 살고, 생각을 다니요? 과연 외모만큼이나 앞서간 모던 보이 이효석 작가였습니다.


추일서정 3. 가을의 끝을 낙엽을 태우면서 즐긴 모던 보이 이효석, 1907~1942


동시대의 인물이지만 참으로 다른 김광균 시인과 이효석 작가의 낙엽입니다. 각기 다르게 절망과 희망을 노래하는 가을날의 서정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낙엽을 대의적인 측면에서 공적인 소재로 등장시킨 시인과, 개인의 소확행을 위한 사적인 소재로 등장시킨 수필가의 다른 관점에서 온 차이일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이효석 작가의 낙엽이 더 겨울에 가까운 낙엽일 것입니다. 수북이 쌓여 태워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낙엽도 희망을 이야기한다면 충분히 그런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이면 봄이 멀지 않은 것처럼 낙엽은 겨울보다도 먼저 그 봄을 준비하니까요. 위에서 나뒹굴고, 쓸리고, 태워지고, 파묻히고, 썩은 낙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새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거듭나니까요. 돌아올 봄을 찬란하게 만드는 훌륭한 재료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다고 지적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까지 불현듯 생각나는 저의 추일서정입니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 가을바람이 땅에 낙엽을 뿌리면 /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1년 전 11월엔 이곳에서 이효석 작가와 <낙엽을 태우면서>에 대한 글을 <낙엽을 찍으면서 - 2>란 제목으로 썼습니다. 윗글에서 이효석 작가의 글을 짧게 소개한 이유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을 위해 남깁니다. 아, 당시 제목은 낙엽을 카메라로 찍었다는 얘기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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