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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Dec 01. 2022

파리, 생명의 양식

Panis Angelicus for Les Misérables

지난 11월 초 우리 사회에 매우 감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광산 매몰 사건으로 190미터 지하에서 연락이 두절된 채 10일 째인 221시간 동안 갇혀있던 광부 2인이 기적적으로 살아서 올라온 것입니다. 그 두 광부는 구조되어 밖으로 나올 때 들 것에 실려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당히 걸어 나와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갇힌 기간 동안 두 광부는 서로 합심해서 생사의 위기를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식량이 없는 열악한 그곳에서 그 오랜 시간을 버티며 걸어서 나올 정도로 건강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에겐 누구도 예상 못한 식량이 있어서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생환 직후 언론에 득달 같이 소개되어 화제 만발이었던 커피믹스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스타벅스 진출 이후 뒤로 밀려났던 프리마와 설탕을 타서 먹었던 커피 중 동서식품의 그 일회용 커피가 대박 광고 효과를 거둔 순간이었습니다. 그 커피믹스는 광부들이 작업장에서 음료나 디저트 용도로 마셨던 것인데 그것이 위기의 순간 메인 식량이 되어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커피믹스가 생명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엔 문제적 인물인 장 발장이 나옵니다. 그는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 훔친 빵 하나로 최종 19년의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작가는 어지러운 혁명기에 이 소설을 썼습니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 19세기로 계속 이어진 7월 혁명과 2월 혁명 사이인 1832년 6월 봉기를 배경으로 이 소설을 쓴 것입니다. 소설의 제목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입니다. 그런 빈민들은 한마디로 먹을 것이 부족해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의 심경으로 혁명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혁명 초기 왕족과 귀족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냐고 되물을 정도로 그들은 다수인 빈민의 삶과는 무관했습니다. 그렇게 불행했던 19세기의 파리에 살았던 장 발장에게 19년 감옥살이를 안겨준 그 빵은 곧 그와 가족의 생명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인 빵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 빅토르 위고의 대작인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 1862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을 1862년도에 출간을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의 성공으로 선거권을 쟁취한 농민과 노동자의 손으로 루이 나폴레옹을 공화제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그는 1852년 스스로 나폴레옹 3세 황제가 되어 다시 제정으로 돌아간 시절이었습니다. 1789년부터 혁명을 시작했지만 파리의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인 보불전쟁에서 패하고 이듬해인 1871년 사회주의자들의 봉기로 세워진 파리 코뮌이 2개월 천하로 종식된 후에야 프랑스 혁명의 대장정은 마무리되고 오늘날 프랑스와 같은 변치 않는 공화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바다 건너 영국과는 달리 군주인 왕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출간한 10년 후인 1872년 이번엔 한 음악가에 의해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노래가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이란 이름으로 무려 82년 동안 지속된 세상의 혼란과 어려움이 정리되자마자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오듯 그 노래는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13세기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사 기도문이 원전인 이 노래는 이후 많은 작사가와 작곡가들의 손을 탔지만 장원급제와도 같이 최종 낙점된 곡은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세자르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입니다. 당시 파리에서 터줏대감으로 활동했던 카미유 생상스도 이 노래에 곡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원제는 <천사의 빵(Panis Angelicus)>입니다. 라틴어의 이 제목이 우리말로 '천사의 빵'이 안 되고 '생명의 양식'으로 된 것은 개신교에서의 번역이 자리를 잡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전 가사가 여러 손을 거쳤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제목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천사의 빵이든, 생명의 양식이든 성스러운 그 의미를 전달함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 이 노래가 작곡된 비슷한 시기에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65km 떨어진 퐁텐블로 숲 근처엔 당대를 빛냈던 일단의 화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르비종이라 불리는 조그만 마을에 살며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었기에 우린 그들을 바르비종파라 부릅니다. 그들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밀레가 있습니다. 그는 그 농촌에 살며 농부들이 농사짓는 목가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중 <이삭줍기>와 <만종>은 안 봐도 쉽게 떠올려지는 그림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그림 둘은 과거 우리가 개발도상국 시절 어느 동네를 가도 이발소나 목욕탕의 거울 위 액자에서 주로 보이곤 했습니다.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라서 밀레의 그 그림들이 과거부터 우리에게 유입되고 친숙하게 다가왔나 봅니다. 그런데 흔히 목가적이라고 하면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로움이 연상되지만 이 그림들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삭줍기>에서 허리를 굽히고 이삭을 줍는 아낙네들은 그들의 저녁을 위해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들판의 날짐승들을 위해 내어 줄만도 하지만 먹을 것이 없는 그들이기에 바닥을 샅샅이 훑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뒤엔 추수한 밀 노적가리가 높게 쌓여 있지만 그것은 지주인 귀족들의 것이기에 수확은 그들이 했어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만종>에서는 석양 아래 들판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는 부부로 보이는 농부가 등장합니다. 작품은 그들이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친 것에 감사를 드리는 평화로운 모습이 다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 발아래엔 보잘것없는 감자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하루 종일 수확한 것 치고는 너무나도 적은 양입니다. 역시 지주들에게 상납하고 얻어가는 식량일 것입니다.


바르비종 농촌에서 그린 밀레의 대표작인 <이삭줍기>와 <만종>, 각각 1857, 1859


두 그림 다 허리 위로 보이는 것은 추수기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전원이지만 허리 아래 등장인물의 사연은 이렇게 팍팍하기만 합니다. 이렇듯 대도시 파리는 물론 농촌에도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어디를 가든 하층민의 생활은 별반 차이가 없었겠지요. 19세기 혁명기를 살았던 밀레는 <이삭줍기>를 1857년에, <만종>을 1859년에 완성했습니다. 두 그림에서 잘 보이지 않는 이삭과 감자는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작곡한 세자르 프랑크는 1822년 오늘날 벨기에인 리에주에서 태어났지만 1844년부터 파리지엔느가 되어 1890년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습니다. 독일 출신으로 영국으로 귀화해 영국인으로 죽은 헨델처럼 프랑스로 귀화해서 활동했던 것입니다. 혁명의 불길이 내내 이어졌지만 그에겐 파리가 음악 활동을 하기엔 그의 고향보다 좋았나 봅니다. 그곳 파리에서 그 역시도 빅토르 위고처럼 비참하고 가난한 자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바흐 이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로 평가받았던 그는 그래서 충만한 신앙심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생명의 양식>의 완성도를 최고조로 높였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위에서 설명드린 밀레의 <만종>을 보고 이 곡을 작곡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의 최종본 작곡자인 세자르 프랑크 (1822~1890)


그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작곡을 하였든, 아니면 밀레의 영감을 통해 작곡을 하였든 그렇게 만들어진 <생명의 양식>은 이후 파리뿐만이 아닌 온 세계의 비참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노래가 되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육신이 허기진 자에게, 영적으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육과 영을 채워주는 노래가 된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탈리아의 불멸의 성악가인 파바로티는 마치 이 노래를 그가 취입한 노래인양 불러 전 세계에 널리 퍼뜨렸습니다. 특히 그는 1992년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란 공연에서 영국의 록밴드인 스팅과 함께 듀엣으로 오르간이 아닌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만 이 노래를 불러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 노래를 매우 친숙하게 다가가게 하였습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음악을 듣고 느끼는 사람의 감정은 비슷할 진대, 이 노래는 누가 부르고 듣든 그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에 있던 <천사의 빵>은 땅으로 내려와 모든 인간들의 <생명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마음이 빈 자에게 내려주소서

낮고도 천한 자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삼위일체이신 주께 구하노니

주를 경애하는 우리를 돌보사

우리가 마침내 볼 수 있도록

주의 길로 인도하시고

당신이 거하는 빛으로 인도하소서


서기 33년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 그것을 알 리 없는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천오백 년 후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으로 재현한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식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며 빵은 그의 살이고, 포도주는 그의 피라 말씀하였습니다. 오늘날 성찬식의 유래가 되는 최초의 의식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살이라 칭한 빵이기에 그를 따르는 자에게 그것은 곧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의 피라 칭한 포도주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를 따랐던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도 다빈치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그날 저녁을 떠올리며 기도문과도 같은 <생명의 양식> 최초의 가사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18세기 말 세자르 프랑크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에서 유래된 이 노래는 전 세계인의 노래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엔 빵에 관한 일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정확히는 먹을 것, 양식에 관한 것들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설교 시 모인 배고픈 군중들에게 그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여 명의 성인 남자를 먹이고도 12 광주리나 남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또한 그 이전엔 가나 지방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최초의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그만큼 민생이 중요하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사실 종교든, 예술이든, 정치든 민생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좋은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굶어 죽어가는 자에게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여준다고 해서 예술적 감흥이 일어날 리 없을 테니까요. 그 순간 그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생명의 양식인 빵 한 조각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고 이렇게 나서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애를 썼을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의 기원이 된 그날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1490년대


마찬가지로 <생명의 양식> 노래 가사에도 나오는 만나는 구약에서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따라 나온 유대인의 양식이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이 배고픔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준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서 그들의 신인 여호와 하느님이 내려준 생명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만나가 내리자 배고픔은 사라지고 그들에게 평화가 왔습니다. 그들이 먹은 만나는 <생명의 양식>의 원제인 천사의 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양식이 모자라니 천사들이 그들이 먹을 빵을 떼어내어 내려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18세기 말에서 시작한 프랑스 혁명은 비로소 19세기 말에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만큼 진통이 컸지만 프랑스는 민중의 힘으로 제정을 종식시키고 자유 민주주의를 획득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혁명 후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그 이전 세기인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여파로 거의 모든 유럽이 번영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이때 문화와 예술은 프랑스의 파리가 단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자국 출신은 물론 세계 각지의 예술가와 문인들이 파리로 불나방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 부르는 기원이 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음악에선 자국 출신의 생상스, 드뷔시, 비제 등이, 해외파로는 벨기에 출신인 세자르 프랑크와 그 이전부터 파리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롯시니가 있었습니다. 캉캉춤 하면 떠오르는 오펜바흐도 출신지는 독일이지만 프랑스인으로 이 시기 파리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미술 분야는 파리가 더욱 압도적이었습니다. 자국 출신인 르누아르, 고갱, 세잔, 마네, 모네, 쇠라, 시냑, 로트렉, 로뎅 등 이들만으로도 한 시대를 풍미한 미술가들이 넘쳐나는데 스페인에선 피카소, 미로, 달리가, 네덜란드에선 고흐가, 카리브해에선 피사로가, 러시아에선 샤갈이 파리로 와서 몽마르트르 언덕을 가득 메웠으니까요. 문학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혁명기를 거친 빅토르 위고를 필두로 쥘 베른, 에밀 졸라, 모파상, 플로베르, 조르주 상드, 스탕달 등이 파리의 카페를 북적이게 만들었으니까요. 역사상 이렇게나 많은 예술가와 문인들이 한 도시를 채운 적이 있을까요? 르네상스기의 피렌체를 연상하게 하는 19세기 말 파리의 모습입니다. 우린 이 시대를 가리켜 아름다운 시대, 벨 에포크(Belle Epoque)라 부릅니다.


하지만 시대가 아름다워졌다고 해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혁명은 그들이 하였지만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여전히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그들의 가난과 비참한 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밟고 부상한 신흥 자본가의 출현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가난한 자들의 상실감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것은 시대가 더 발달한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하기도 한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이 집대성한 <백과전서>엔 "가난 앞에서 품위가 떨어지지 않고 비천해지지 않을 만큼 강인한 영혼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시민들이 믿기 힘들 만큼 어리석다"며 가난과 그것이 몰고 오는 죄악성에 대한 글이 나옵니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이 빵을 훔치는 것에 대한 설명문과도 같은 서술입니다. 이것은 가난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우리가 가난을 몰아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 앞에서의 감사 기도.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딸이 유화로 그린 <은혜(The Grace)>, 로다 나이버그 (1917~2012)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 연말입니다. 해마다 첨단 기술의 발달로 크리스마스 트리와 크리스마스 미디어는 더욱 화려하고 밝아지지만 여전히 이 사회엔 그 불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춥고 어두운 곳이 존재합니다. 그곳의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 빵 하나를 위해 도둑질을 하는 21세기의 가난한 장 발장은 계속해서 출현할 것입니다. 또한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그들을 위해 있는 보호도 못 받고 죽어간 불쌍한 모녀들도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이 겨울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도, 보호를 해야 할 사람도 모두 <생명의 양식> 이 노래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어디선가 멀리서 그 노래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파리, 생명의 양식> 이 글은 2022년 12월 21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 전당 IBK챔버홀에서 (사)프렌즈오브뮤직 주최로 열리는 음악회의 프로그램북에 들어갈 원고입니다. <파리, 생명의 양식>은 그 음악회의 타이틀로 그 음악회는 인문학적인 주제와 그에 맞는 음악을 선정해서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날 연주될 곡목입니다. 관심 있는 분을 위해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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