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라면서 일찍이 귀에 익숙한 로마의 황제들이 있습니다. 영어로 줄리어스 시이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라 칭하는 옥타비아누스가 있고 폭군으로 이름값을 올린 네로가 있으며 늑대 젖을 먹고 자란 건국 시조 로물로스, 그리고 기독교와 관련해서 신앙의 자유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와 국교로 선포한 데오도시우스 황제 등이 있습니다. 이들 정도가 학창 시절 교과서에 등장했던 로마의 일인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인지의 원천이 전혀 다른 또 한 명의 황제가 있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그 이름이 역사책이 아니라 국어책에서 발견되기에 그렇습니다. 바로 제목에 보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입니다. 긴 이름에도 불구하고 입에 착 붙는 이름의 이 황제는 견인주의 또는 금욕주의라 불리는 스토아 철학파의 다섯 황제인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로 서기 161년에서 180년까지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고교 국어책에 우리나라 1세대 수필가인 이양하 님이 쓴 페이터의 산문이라는 글에 이 황제의 이름과 함께 그가 쓴 수필 명상록(Meditations)이 소개됩니다. 사실 이양하 님의 이 수필은 창작물이라기보다는 거의 대부분 황제의 명상록 중 주요 내용을 발췌해 번역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원전을 바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양하 님 이전에 이 명상록에 먼저 감명을 받은 영국의 심미주의 비평가 월터 페이터가 쓴 쾌락주의자 마리우스라는 글에 등장하는 명상록의 내용을 번역해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수필의 제목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어쩌고가 아닌 페이터의 산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2세기에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수필 명상록은 19세기 서구 영국의 월터 페이터를 거쳐 20세기 우리나라의 이양하 님에 의해 교과서에 실려 우리가 그 생소한 황제와 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긴 시간, 먼 거리를 달려 오늘날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만큼 시대불문 장소불문 위대한 글이기에 동서양의 작가들이 서로 자기의 이름을 걸고 이 책, 이 글을 인용 소개했을 것입니다.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20년 재위 기간 중 틈틈이 기록한 그의 사색이자 철학의 결과물입니다. 내용 중 세상만사는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동서고금을 대표하는 이 금언이 거의 주제처럼 가장 많이 알려진 위대한 고전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황제는 마치 우리의 세종대왕처럼 왕궁의 도서실에서 조용히 철학을 연구하고 글만을 썼을 것 같은데 실제 그의 인생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재위 기간 내내 이민족 간 국경 전쟁으로 제국 변방을 떠돌아 실제 로마에 머문 기간은 5년여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통치 기간 중 기아, 홍수, 질병 등 재난이 끊이지 않아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는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운명이 그래선가 죽음까지도 편안한 로마의 황궁이 아닌 변방 야전에서 맞이하였습니다.
어느 날 난 학교 졸업 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 철인 황제를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 서기 2천 년 아무 정보 없이 보던 어떤 개봉 영화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이 들린 것이었습니다. 글래디에이터.. 아, 이 인생 영화 도입부에 그가 짠하고 등장한 것입니다. 아니 이 분이 바로 그분? 영화관이라 아무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내 머릿속에선 그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 영화 속 황제의 용모와 느낌이 딱 국어책의 그분 같았습니다. 선한 인상과 인자한 목소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현생입니다. 황제를 연기한 배우 리처드 해리스는 개봉 2년 후 그 황제처럼 사망했습니다.
영화와 역사는 다릅니다. 황제는 글래디에이터 영화에서처럼 아들 코모도스에게 암살당하지 않았습니다. 사인은 병사입니다. 그의 임종을 낭만파 화가 들라크르와가 그렸는데 아래 그의 작품 안 오른쪽에 서있는 붉은 옷의 키 큰 남자가 바로 아들 코모도스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언인데 삐딱한 자세로 서있는 그의 모습으로 보아 부자간 사이는 영화처럼 좋지 않았던 게 정설인 것 같습니다. 황제가 죽은 곳은 영화 속처럼 게르마니아 지역 로마 북동쪽 국경선인 도나우강의 최북단 군사 기지인 빈도보나 근처로 알려져 있습니다. 빈도보나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입니다.
러셀 크로우가 맡은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은 동명의 인물은 있으나 역할로 보면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입니다. 일단 영화에서 그가 황제의 유언으로 내내 떠받드는 공화제는 당시 상황상 허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정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200여 년 가까이 잘 이어온 제정 로마를 별 이유 없이 공화제로 되돌린다는 것은 좀 뜬금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 아우구스투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200여 년은 팍스 로마나로 불릴 정도로 로마 최고의 번영기였는데 굳이 제정을 끊을 이유와 동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글래디에이터를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공화주의 정치 철학이 개입되었다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코모도스는 아버지를 이어 무난히 황제에 오르고 로마를 다스립니다. 영화에서처럼 그는 실제 검투사로 많은 경기에 출연을 합니다. 그가 무예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인기를 위해 서커스 정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측근에게 암살을 당하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가 선대 황제들처럼 좋은 정치 철학을 가지고 로마를 잘 다스렸다면 후대의 사가들은 그때를 오현제가 아닌 육현제의 시대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은 로마 시내 카피톨리노 광장에 기마상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말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로마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철인이 다스리는 국가라 하였는데 바로 그 철인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이상을 위해 고단한 그의 여정을 달려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