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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un 03. 2023

DMZ, 평화를 기다리며

전쟁과 음악

비목과 6.25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비목>입니다. 장엄하고 구슬픈 멜로디에 처연하고 아름다운 가사로 우리 민족 한(恨)의 정서와도 맞게 느껴져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가곡입니다. 사실 이 노래는 배경을 모르고 제목과 가사만 얼핏 보거나 들으면 해석의 오해가 십상인 곡이기도 합니다. 산중 어느 깊은 계곡의 고목을 보고 과거 고향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그것을 그리워하는 노래로 말입니다. 마치 정지용님의 시로 노래가 된 <향수>처럼 말입니다. 이때 '비목'은 '슬픈 나무(悲木)'가 되고, 인트로의 '초연이'는 '초연히'로 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초동 친구' 역시 '초등 친구'로 들릴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이 노래를 듣고 이해하였다면 그것은 완벽한 오류입니다. 이 노래는 6.25 전쟁에 참전해서 싸우다 죽은 무명용사의 허름한 가묘를 훗날 어떤 군인이 보고 그 병사에게 이입되어 쓴 시니까요. 1960년대 강원도 화천 부근에서 군생활을 한 국악인 한명희님은 제대 후 시인이 되어 이 시를 썼습니다. 그 무명용사의 묘가 그의 기억 속에 떠나지 않아 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1969년 <비목>이라는 노래로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특정하지 못한 한 무명용사의 추모곡으로 시작된 노래였지만 이 노래는 어느 순간 그 비극적인 전쟁에서 숨진 모든 장병을 위한 추모곡이자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모든 호국영령을 기리는 대표적인 가곡으로 커졌습니다.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의 음악 교과서에도 실리고, 매년 현충일과 6.25가 들어있는 6월이 되면 가장 많이 들리는 노래가 되었으니까요. 망자를 위한 노래가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비목'은 슬픈 나무가 아니라 '나무 묘비(碑木)'입니다. 돌로 만든 묘비를 비석(碑石)이라고 하듯이 나무로 만든 묘비를 비목이라 부른 것입니다. 돌로 제대로 깎고 다듬을 시간이 없으니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서 십자가 형태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전쟁 영화에서 많이 보던 바로 그 묘비입니다. 2절로 된 이 노래 끝부분엔 그 비목과 함께 돌무덤이 등장합니다. 그 무명용사의 서러움이 알알이 돌이 되어 쌓인 것입니다. 초연히로 들렸을지도 모를 첫 가사 '초연이'의 초연은 초연하다의 초연이 아니라 '화약의 연기(硝煙)'를 가리킵니다. 그 무명용사는 총과 대포의 초연이 가득한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어가며 그리워한 고향의 '초동 친구'는 초등학교(初等學校) 친구가 아니라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함께 베던 '초동(樵童) 친구'입니다. 1950년 6.25 당시는 초등학교도 없던 시절이었지요. 당시는 국민학교라 불렸고 그 무명용사의 입대 나이를 고려하면 그는 일제 강점기의 소학교나 보통학교를 다녔을 것입니다. 오늘날 초등학교는 1996년부터 공식적인 명칭이 되어 1941년부터 불려 오던 국민학교를 대체하였습니다.  


가곡 비목의 탄생지에 조성된 비목과 돌무덤, 강원도 화천 평화의 댐 주변 비목 공원



대니 보이와 독립전쟁


<비목>과 비슷하게 혼동될 소지가 있는 노래로 아일랜드 북부의 민요를 리뉴얼해 만든 <대니 보이>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아 목동아>란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아름다운 멜로디와 함께 목가적인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유난히 푸른 아일랜드의 초원에서 한가롭게 소와 양이 풀을 뜯는 노래로 말입니다. 게다가 이 곡은 색소폰 솔로곡으로도 인기가 높아 끈적한 그 음색과 주법으로 무도장에서 인기가 높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니 보이>는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노모의 애처로운 심경을 표현한 절절한 노래입니다. 여기서 침략국은 역사적으로 아일랜드의 숙명의 라이벌인 영국입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800년간 지배했고 그로 인해 아이리쉬들은 20세기에 들어서까지도 독립을 위한 전쟁을 계속하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한과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래에서 전쟁에 나간 아들은 꽃이 지고, 눈이 쌓이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대니 보이라 사랑스럽게 부르는 어머니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아들을 그리워하며 기다립니다. 그리고 죽어서까지도 아들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들 국기만큼이나 푸른 아일랜드의 정경 (출처, pixabay)


전쟁 속의 모정을 표현한 <대니 보이>는 1913년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8년 후인 1921년 아일랜드는 독립전쟁을 거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아일랜드섬 북쪽 영국의 영토로 남아있는 북아일랜드로 인하여 완전한 독립을 위한 그들의 전쟁은 IRA(Irish Republican Army)를 통하여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1970년대에 IRA는 북아일랜드에서 격렬하게 무장 투쟁을 하였는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강력하게 진압을 하였습니다. 선진국 중의 선진국이라 하는 영국에서 20세기 끝인 1970년대에도 초연이 쓸고 갔던 것입니다. 21세기인 2005년이 돼서야 IRA는 완전 해체를 선언하여 영국과 아일랜드는 오늘날과 같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 이전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에서 체결된 협정이 만든 결과입니다.  



아일랜드섬과 한반도


1999년까지 아일랜드의 헌법 2조에는 "아일랜드의 영토는 아일랜드섬 전체와 그 부속도서 및 해역으로 간주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에 준해 그 이전 IRA는 영국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 입장에선 영국이 그들의 영토 북쪽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1998년 벨파스트 협정을 통해 헌법에서 영토에 대한 이 조항은 사라지고 대신 3조에 "아일랜드의 통일이 민족의 확고한 의지임을 선언하되, 통일은 아일랜드 전체 주민의 동의를 거쳐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첨언하였습니다. 즉, 현재는 영국 영토로 되어있는 북아일랜드지만 다수의 주민이 원하면 다시 아일랜드의 영토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이미 북아일랜드엔 역사적으로 영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고, 그로 인해 종교도 본토민의 가톨릭과 이주민의 성공회로 나누어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투표를 한다 해도 주민이 원하는 대로라면 북아일랜드가 영국도 아니고, 아일랜드도 아닌 완전한 독립국으로 분리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영국 본토 북부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종종 논의되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도 아일랜드인은 헌법에 명시된 대로 아일랜드섬 전체의 완전한 통일을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 1492년 스페인이 국권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그라나다 지역까지 완전하게 수복해 통일국가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아일랜드섬 북부에 남아있는 영국의 영토 북아일랜드


과거 아일랜드 헌법의 영토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합니다. 바로 우리나라 헌법에서 규정한 영토와 거의 같게 들려서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3조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일랜드가 영국을 그렇게 간주해 왔듯이 우리나라도 38선 이북을 차지하고 있는 북한이 우리나라의 영토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세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법상으로 북한은 우리가 언젠가 다시 수복해야 할 우리 영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이 아일랜드의 헌법이 제시하는 것처럼 남북한 주민의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서만이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음악


전쟁에선 총소리와 대포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는 물론 전쟁의 전후좌우로 음악 소리도 함께 들리곤 합니다. 위의 <비목>과 <대니 보이>가 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듯이 말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서곡 <1812년>은 유럽에서 천하무적이었던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것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전쟁 승전곡입니다. 당시 승자인 로마노프 왕가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차이코프스키에게 그 곡을 의뢰했습니다. 그런데 이 곡의 연주 시 후미 하이라이트에선 전쟁의 리얼함을 살리기 위해 특별한 악기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베이스 드럼을 비롯한 모든 타악기의 출력을 높이는 대신 폭죽이나 공포탄, 또는 종소리가 동원되며 야외 연주 시엔 실제 총이나 대포를 쏘기도 합니다. 살상 무기인 총포가 악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객원 연주자(?)로 초빙된 사수와 포병은 발사의 박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입니다.


폴란드의 유명 피아니스트인 슈필만의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피아니스트>는 히틀러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이 배경입니다. 그 영화에서 관객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장면은 아마도 폴란드를 침공한 전쟁보다 음악이 나오는 어떤 장면일 것입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실내로 스며 들어온 파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독일군 장교의 명령에 따라 생사를 건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 장면을 말합니다. 하지만 굶주려서도 죽을 것만 같아 보이는 그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스크린 속 그 장교뿐만이 아니라 스크린 밖에서 그 음악을 감상한 전 세계의 모든 관객들에게 그 어떤 크고 화려한 음악당에서 들은 쇼팽의 <피아노 발라드 1번>보다 황홀한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적어도 그 연주 시간만큼은 전쟁은 잊히고, 침략자도 포로도 없는 무아의 평화만이 흘렀습니다. 잠깐이지만 전쟁을 누르는 음악의 힘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슈필만을 연기한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의 연기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는 완벽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아.. 영화 '피아니스트'의 바로 그 장면


하지만 음악은 전쟁에서 평화만을 연주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로버트 듀발이 연기한 미군 지휘관은 베트남의 마을에 헬기로 네이팜탄을 쏟아붓습니다. 숨어있는 베트콩을 죽이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죽이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그 헬기 위에서 베트콩을 위해 준비했다며 심리전의 일환으로 음악을 찢어질 정도로 크게 틀어놓고 폭탄을 투하합니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의 2부에 나오는 <발키리의 기행>입니다. 음악은 폭탄 소리와 헬기 소리와 뒤섞여 그 살상 장면을 지옥으로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바그너를 들으며 베트남인들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 영화를 연출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은 히틀러가 바그너를 숭상한 것에 착안해 미군이 하는 폭격이지만 그 음악을 선택해 전쟁의 잔인함을 더 부각시켰을 것입니다.    



전쟁의 야만성과 모순성


이렇듯 전쟁은 잔인하며 야만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문명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든 모든 것을 일거에 부수고, 부정하며, 모순으로 만듭니다. 전쟁사에서 단기간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1945년 히로시마 원폭의 경우 초기 4개월 동안 약 17만명이 죽었고, 나가사키에선 같은 기간 동안 8만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단 한 발의 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이 죽었고 쌓아 올린 문명이 파괴된 것입니다. 당연히 사망자의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1910년 우리나라를 침략해 불행에 빠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통해 3천5백만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고,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동남아 국가들을 쑥대밭으로 만들더니, 1941년 미국까지 공격한 일본이 자초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살상의 침략 전쟁을 일으킨 자들을 처벌한 도쿄 전범재판은 결코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그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일본의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고, 단 28명만이 A급 전범으로 기소되고, 그중 우두머리인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만이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맥아더가 임명한 11명의 재판관이 2년 반 동안이나 진행하며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전쟁기엔 하루에도 죄 없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기도 하는데, 평화기엔 턱없이 적게 책정된 몇 명의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기가 도래하면 법에 입각한 제도와 인권이 발동하기에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2년 6개월 간 진행된 도쿄 전범재판, 1946. 5~1948. 12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인류의 역사는 따지고 보면 전쟁과 평화, 평화와 전쟁, 그리고 다시 전쟁과 평화의 연속이었습니다. 역사책을 펼쳐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건이 전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평화의 정의를 전쟁과 전쟁 사이에 잠깐 쉬는 시간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인가 전쟁은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날 것 같지 않은 21세기가 된 오늘날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곤 합니다. 당장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그렇습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일방적으로 끝날 줄 알았던 그 전쟁은 이제 세계를 친(親) 우크라이나 국가와 친 러시아 국가로 나누며,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전체의 싸움으로 장기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벌써 1년 4개월이나 되어가니까요. 약자인 우크라이나는 G7을 비롯한 서방의 자유 진영 국가들을 돌며 그들에게 절실한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인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지라 지난 5월 중순 젤렌스키 대통령의 영부인인 젤렌스카 여사가 방한을 했습니다. 당시 그녀와 함께 온 수행단 중엔 인상적인 멤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유서 깊은 체르니우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었습니다. 조국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알리고 지원을 호소하는 데에 자국의 음악이 함께 하면 더 힘이 발휘될 것이라 생각해서 그들도 함께 왔을 것입니다. 음악은 국경이 없는 언어이니까요. 그런데 그때 방한한 단원들은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남자 단원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서 올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이 연주되기 전부터 음악의 힘이 전해지는 가슴 아픈 뉴스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완전체 모습


2차 세계대전 시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대도시인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고립시켜 그 도시엔 아사자가 속출했습니다. 그곳 출신인 쇼스타코비치는 1941년 그 도시의 참상을 담은 그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는데, 그 도시의 라디오 오케스트라는 아사로 인해 단원이 여의치 않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곡을 연주하고, 그 필름을 서방으로 몰래 보내 나치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런 피해국이었던 러시아가 이번엔 반대로 침략국이 되었고, 이번에 피해국인 우크라이나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러시아인들과 같이 단원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음악을 통해 세계에 그들의 참상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때 음악으로 나치가 성토되고, 서방의 지원이 일어났듯이 우크라이나의 음악도 그런 힘을 발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DMZ, 평화를 기다리며


DMZ(Demilitarized Zone)는 말 그대로 군사적 무장이 금지된 지역입니다. 우리나라의 DMZ는 1950년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한 6.25 전쟁이 동서 간 이념의 대립으로 국제화되고,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서 양측의 합의 하에 1953년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조성이 되었습니다. 그 협정이 지속되는 기간 동안 북위 38도를 중심으로 그어진 휴전선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2km, 남북 총 4km의 공간을 DMZ로 합의한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직접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완충 지역을 둔 것입니다. DMZ가 유효한 정전협정의 유효 기간은 그 협정문 서언에서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로 되어있어 그 시점이 모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73년이 지난 지금도 6.25 전쟁이 끝나지 않은 국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경기도 연천군 28사단에서 바라본 철책선 너머 DMZ (출처, 연합뉴스)

 

이렇듯 정전협정의 부산물로 태어난 DMZ는 완전한 평화를 기다리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통일이 되어 남과 북에 진정한 평화가 오면 그 DMZ는 사라지게 되는 역설적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대신 2억7천3백만평이 넘는 그 넓은 공간엔 평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시설이 들어설 것입니다. 물론 평화를 상징하는 음악도 계속 울려 퍼질 것입니다. 매우 궁금합니다. 그날이 오면 DMZ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말입니다. 그래서 희망합니다. 지금은 남북 2km로 되어있는 DMZ가 남으로 북으로 확장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모두 DMZ가 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말입니다. 그날은 통일의 날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장병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달입니다. 6월 20일 예술의 전당 IBK홀에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DMZ, 평화를 기다리며>란 음악회가 열립니다. 그 음악회에선 한명희님의 <비목>을 비롯하여 그가 쓴 6.25 전쟁의 다른 시인 <산목련 여인>과, 1953년 그 전쟁을 회고하며 김남조 시인이 쓴 <목숨>이 국내 최초로 연주됩니다. 우리나라 작곡의 대모인 이영자님이 그들 시에 각각 곡을 붙인 전쟁 가곡입니다. 또한 고난의 역사를 가진 폴란드가 조국인 쇼팽의 <피아노 트리오>도 연주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음악가인 보리스 리아토쉰스키가 2차 세계대전 중에(1942~1945) 작곡한 <우크레이니안 퀸텟>이 국내 최초로 연주됩니다. 그러고 보니 본문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레닌그라드>와 리아토쉰스키의 5중주는 모두 전쟁 중에 만들어졌네요. 그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유니온(소련)으로 한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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