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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un 24. 2023

사후 시집가는 여인들

영혼결혼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제 영혼결혼식은 거행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저명인사 중에도 그런 분이 있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서양에선 로맨스의 소재가 될 법도 한 이 영혼결혼이 현대는 물론 먼 과거에도 있었다는 기록을 찾기 힘듭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이 다 나올 법한 그리스 신화에도 그것은 나오지 않으니까요. 결혼하자마자 사고로 죽은 아름다운 신부를 살리기 위해 저승까지 찾아가 지하 세계의 신인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를 리라 연주로 감동시켜 그녀를 빼오는 데까지는 성공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가 그나마 이런 영혼결혼과 가장 유사한 소재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도 에우리디케를 이승인 지상 세계까지 데려오는 데까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무사히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본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으니까요. 하데스의 주의 사항을 무시한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중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쓴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혹여 나올 법한 이 영혼결혼식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동양이었다면 몬태규와 캐플릿, 앙숙관계에 있는 이 두 가문의 대립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 어린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여워서라도 양가의 어른들은 일시적이나마 화해를 하고 그 둘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고 그 스토리의 대미를 장식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엔 현대는 물론 이조시대에도 이런 망자()와 생자(者) 간의, 또는 망자들 간의 영혼결혼식이 거행되곤 했습니다. 유교가 성행했고 귀신이 많이 살았던 나라라서 그랬을까요? 총각귀신과 처녀귀신을 만들지 않거나 그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제 글은 주로 저의 경험에서 비롯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험은 그간 글들의 소재가 되었던 통상의 경험과는 달리 지극히 사적인 제 가족의 관혼상제(冠婚喪祭) 중, 상(喪)에서 비롯되기에 쓰기를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장례 문화와 관련되어 우리 사회의 변화된 흐름을 보여주는 내용이 있기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자판을 두드립니다. 그러므로 장례를 다룬 글이지만 추모의 글은 아닙니다.


최근 저의 누나의 상을 치르었습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50대 초반에 쓰러져 기나 긴 시간 오랜 병마로 고생하다가 60대 후반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와는 적잖은 나이차가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막내인 저를 꽤나 챙겨주고 보살펴준 누나였기에 남다른 사이의 남매지간이었습니다. 다행히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와 줘서 누나가 가는 길은 그렇게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렇듯 통상적인 상가의 상을 치르었는데 제가 그 와중에 좀 놀랄만한 일이 장례식 마지막 날에 있었습니다. 유교국가였던 우리나라에선 통상적인 일이겠지만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인천 장례식장을 떠나 화장지에서 한 줌 재가 된 누나의 유골은 시집인 경상북도 상주의 매형 집안의 선산 가족묘에 안치되었습니다. 그곳 장지에 도착하자 빈소에서는 보지 못한 분들까지 포함하여 많은 시댁 분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집성촌(集姓村) 성격의 마을이기에 매형의 친형제는 물론 사촌, 육촌 형제분들이 다 나와서 누나 장례의 마지막 일정인 묘지 작업을 진행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선 저의 생각과는 달리 친동생인 제 역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전 이틀간 인천의 장례식장에서부터 그날 아침 화장지에서까지는 그래도 상주를 제외하곤 망자와 가까운 제가 이런저런 일을 챙기며 장례식을 살폈는데 누나 시집의 장지에서는 그곳에 온 일반 손님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어떤 가벼운 현안이 발생해도 그것은 김씨 성을 가진 매형 친지들끼리 의논을 해서 결정을 했지 제겐 그 어떤 논의조차 없었습니다. 그곳에 망자의 친정 식구는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없어도 상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매형 친족들에 의해 진행된 장지에서의 행사는 비석이 세워지고 난 후 제사 음식과 함께 술 한 잔을 올리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생전엔 기독교 신자였던 누나였지만 그 또한 별 상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듯이 그곳에선 모든 것이 시집의 법대로 따라갔습니다. 누나가 살아있을 때엔 몰랐지만 죽고 나서야 여자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실감한 현장이었습니다. 결혼을 했어도 계속 인천의 친정집 부근에 살았기에 시집은 갔지만 물리적인 외형을 갖춘 다른 성씨의 집으로 시집을 갔다고는 느끼지는 못했었는데 그날 장지에선 누나가 진정 시집을 갔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생전에 누나는 상주에 있는 시집을 과연 몇 번이나 갔을까요? 건강했던 시절 명절이나 시집의 경조사 발생 시에만 그곳을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나는 죽어서는 이제 시집에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누나의 묘가 있는 가족묘 단지엔 먼저 고인이 된 시부모와 그 윗대의 사돈어른들이 상단에 잠들어있고, 하단엔 아직은 비어있지만 매형의 친형제들과 사촌형제들, 그리고 그 배우자들의 묘들까지 조성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누나가 죽었기에 제가 처음 가 본 누나의 시집이자 매형의 고향집도 누나가 잠들어있는 그 묘지와는 불과 20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누나는 죽어선 완벽하게 시집의 식구가 된 것입니다. 현재 그 집엔 장자인 매형의 큰형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후 이렇게 온전하게 시집을 가는 여인이 비단 저의 누나뿐일까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며 결혼한 거의 모든 우리나라 여인들은 비슷한 삶과 죽음을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할 예정일 것입니다. 그녀들과 결혼한 남편들의 대다수가 농어촌을 떠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도시나 지방 도시에 경제적인 기반을 잡고 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들은 시집을 갔다고는 하나 시집에서 살지 않고 시집과는 먼 도회지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시집이라는 말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과거엔 "얘야~ 시집가거라"란 가요가 대놓고 유행할 정도로 과년한 여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부추겼지만 지금은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시집을 가라는 말은 하기 힘든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집이란 용어 자체도 대신 성(性)이 드러나지 않는 결혼이란 말로 바뀌어서 통용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시집에 해당되는 장가라는 말도 전보다는 덜 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신혼집이 시집과는 멀리 떨어진 대신 친정집과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꽤나 오래된 일로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면서부터 생긴 현상입니다. 그에 따라 부부간에 생긴 아이들에게도 그만큼 자주 교류하는 외가가 친가보다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법에선 일상에서 통용되는 친척(親戚)이란 말 대신에 친족(親族)이 명시되어 있는데 과거엔 친족의 범위를 친가 쪽 8촌까지로 규정했지만 요즘은 외가 쪽도 똑같이 8촌까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녀평등에 위배되어 그렇게 확대된 것인데 그것과 상관없이 외가가 가까워진 요즘의 세태를 정확히 예측해서 개정한 온당한 조치로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완전 핵가족 시대에 사는 아이들이 과연 8촌 혈족()이 누군지 알고 지내며 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친족의 범위에 외가 쪽 혈족은 확대하는 대신 친가 쪽 혈족은 축소하여 맞추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세태에 맞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8촌까지로 굳어진 것은 과거 친가의 그 혈족까지가 죽으면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 친족이기에 그렇게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교의 영향입니다. 법률상으로 친족은 이런 8촌까지의 친가와 외가 혈족 이외에 결혼으로 맺어진 배우자와 그(녀)의 4촌까지를 인척(姻戚)이라 부르며 그 범위 안에 넣고 있습니다.      


과거 농경시대엔 큰아들이 결혼을 하면 그 신혼부부는 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사는 것이 보편 룰이었습니다. 시집온 새색시는 그렇게 시집에 들어와 살림을 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장남은 그 집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습니다. 그 시점에 시집 곳간의 열쇠도 그 집에 시집온 맏며느리에게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유교의 룰대로 제사를 책임지는 장남의 비중이 컸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그 밑의 차남들이 결혼을 하면 그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나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 보금자리를 차리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동네 빈 터에 새로 집을 지어 살림을 내어준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저의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지금은 안산이 된 옛 시흥군이 고향인데 당시 우리집 바로 옆집이 큰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장가를 들면서 마침 비어 있던 본가 큰집 옆 빈터에 할아버지가 새로 지어준 집이었습니다. 지금은 도시화로 사라진 당시 그 큰집과 작은집은 뒤란에 작은 쪽문이 있어서 서로 오갈 수 있었습니다. 크게 보면 한집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엄마는 시집온 것이 정확히 맞았습니다.


그렇게 큰집, 작은집이 한동네에 살면서 이것이 확대되어 같은 씨와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집성촌, 또는 동족촌(同族村)이 되었던 것입니다. 위의 매형 상주의 고향은 아직도 그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동네로 보입니다. 할아버지 형제의 자손과 아버지 형제의 자손이 생겨나며 사촌과 육촌으로, 더 크게는 팔촌으로 얽힌 그들은 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비슷한 또래의 친구 관계로 자랐을 것입니다. 즉, 동네 친구가 같은 항렬의 친족이었던 것입니다. 돌림자를 쓰다 보니 이름 또한 다 비슷하게 들려 어른들이 부르면 여럿이 대답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매형이나 과거의 우리집처럼 일찍이 도시로 이사한 친족들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윗세대에도 있었고, 그 아래 세대에선 더 많은 친족들이 도시로 이전해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후 시집가는 여인들은 모든 기혼 여성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일단 시집이 도시 지역이 아닌 농어촌 시골 지역에 있는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도시에 시집이 있다면 그 도시 안에 시집의 가족묘 조성이 쉽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숫자는 장례 문화의 변화로 점점 줄어들고 있을 것입니다. 공원묘지가 늘어가고, 매장보다는 납골당이 보편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곳에도 시집만을 위한 가족묘지 공간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점차로 사망한 부모 묘의 위치가 자녀들이 찾기 편한 곳으로 바뀌어가는 요즘 세태이기에 시집과는 상관없는 장소에 묘가 결정되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엔 윗대의 조상 중심으로 묘가 조성되었다면 갈수록 아랫대의 자녀 중심으로 묘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장지 결정의 주도권이 집안 어른에서 자녀들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누나의 경우는 죽어서 시집을 가는 세대의 거의 마지막 막차를 탔다고 생각합니다. 빠르게 바뀌는 장례 문화로 그런 장례 조건을 충족하는 가문이나 가족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정책에 의해 과거 제 생가처럼 도시화나 지역 개발로 본래 있던 동네는 물론 그 동네의 어른들을 모신 선산의 가족묘지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고, 이장하고, 화장하는 경우들도 계속해서 늘어나니 말입니다. 이런 세태와 상관없이 이 글을 통해 저의 누나의 묘를 아름답게 조성해준 상주의 순천 김씨 시집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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