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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Nov 18. 2023

동서양의 교집합&합집합 이스탄불 <상>

로마/동로마/라틴/동로마/오스만/튀르키예

머리 위 하늘과 발 아래 바다가 누가 더 파란지 경쟁을 할 정도로 화창한 가을날 저는 페리에 올라 해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세기의 바람에 맞추어 하늘엔 이름 모를 새가 비행하고 바다엔 오색빛을 띤 요트들이 레이스를 하고 있어 그 배들이 밀어내는 물결과 함께 이국적인 느낌이 몰려왔습니다. 맞습니다. 이곳은 이국입니다. 유럽인지 아시아인지 모를 어느 바다 위.. 그 와중에 날씨가 좋아 다행이란 생각도 불현듯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1주일 전 제가 그 바다를 반대 방향으로 건널 때엔 날씨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땐 나쁜 날씨로 하늘과 바다가 우중충하고 흐릿했습니다. 대신 그땐 그 바다를 지금 제 위로 보이는 다리를 통해서 차로 건넜습니다. 날씨가 안 좋아 배로 건넜다면 바람은 물론 물살도 세어 건너기가 만만치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갑판 위를 자유롭게 오가며 화사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지도 못했겠지요.


방향을 보자면 그때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간 것이고 지금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제가 유럽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끼어있다니요! 바다라고 하기엔 우리 서울의 한강만 한 그곳에선 제 앞과 뒤로 유럽과 아시아가 있었습니다. 마치 한강을 건널 때 제 앞과 뒤로 강남과 강북이 있듯이 말입니다. 여행자의 입장에선 매우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의식하면 할수록 더 말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일상입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출퇴근을 하니까요. 이제부터 10월의 마지막 주인 오늘은 제게 기념일처럼 생각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래와도 같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로 말입니다. 자 이제 유럽 대륙에 내리면 어떤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저는 지금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 위에 있습니다.


이스탄불을 유럽과 아시아로 나누는 보스포루스 해협. 보이는 지역은 유럽 (2023. 10)


역사상 그 어떤 도시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부귀영화, 산전수전, 평지풍파를 겪으며 오늘날까지 도도하게 그 지위를 유지해오고 있을까요? 축복이라 하면 축복이고 비극이라 하면 비극인 그 도시의 팔자는 위와 같이 그가 속한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공유하지만 그 두 대륙을 다 가진 그러한 운명으로 그 도시는 동양과 서양을, 로마와 동로마를, 기독교와 이슬람을, 카톨릭과 정교회를 다 가진 유일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시대가 흐르고 주인이 바뀔 때마다 도시를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 다 달랐습니다. 때론 비잔티움으로, 때론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니예)로, 그리고 오늘날엔 이스탄불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입니다. 그 도시는 로마 제국(330~395)에서 동로마 제국(395~1204)으로, 그리고 라틴 제국(1204~1261)에서 또 동로마 제국(1261~1453)으로, 또 그리고 오스만 제국(1453~1923)에서 튀르키예(1923~)에 이르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역사라는 카메라의 초점에서 벗어난 적이 없던 핫스폿이었습니다.


서기 324년 대공사가 시작됩니다. 그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동방정제인 리키니우스와 싸워서 이겨 제국의 황제가 된 서방정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정적이었던 리키니우스의 본거지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일찍이 그곳은 동트라키아 지방의 끝으로 그리스 사람들이 터를 잡은 항구였습니다. 이렇듯 최초의 이름인 비잔틴, 비잔티움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도시명입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그곳이 아나톨리아라 불린 동방과 좁은 바다로 연결되어 있어 군사적이나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생각하고 현대화된 도시로의 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드디어 6년의 공사 끝에 그 도시는 화려하게 탈바꿈하였습니다. 수도 로마처럼 포룸과 전차경기장, 원형극장과 공중목욕탕, 신전 등이 들어선 전형적인 로마인의 도시로 바뀐 것입니다. 황제는 이어서 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그곳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이미 결정을 내리고 공사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천도는 아마도 동서양의 모든 역사 속에 등장한 천도들 중 가장 거리가 먼 신수도로의 이사일 것입니다. 검색해 보니 오늘날 가장 빠른 자동차 도로로도 2,234km나 되는 장거리이니까요.


당시 이사는 배로 했을 것입니다. 지중해에서 에게해로, 그리고 좁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 마르마라해로 들어와 그 끝 보스포루스 해협에 도달했겠지요. 그 이사는 단순한 천도가 아니라 문명의 대이동이었습니다. 세계의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가 이동한 것이니까요. 이로써 로마 제국은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 형제가 테베레강을 따라서 일곱 개의 언덕 위에 건국한 이래로 천년 수도(1083년)로 삼았던 로마에서의 역사를 마감하고 비잔티움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스탄불로 옮겨 새로운 로마 시대를 연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272~337)


천도에서 보듯이 콘스탄티누스 1세는 모든 면에서 결단력이 강한 황제였습니다. 근 300년 동안 탄압해 왔던 기독교를 공식적인 로마의 종교로 인정을 했으니까요. 그간 로마인의 종교였던 그리스인의 신화를 밀어내고 신흥 종교로 떠오른 속주 유대인의 종교를 313년 공인해서 그 기독교가 서구 문명사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세계 종교로 커나가는 초석을 제공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 때인 380년엔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사이 파운더의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신수도는 더욱 번성하고 커져만 갔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손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413년 도시의 성벽을 3중으로 굳건히 쌓아 콘스탄티노플을 난공불락이라는 명성을 가진 도시로 만들어 명실공히 제국의 수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1,600년이나 넘게 지났음에도 오늘날까지 이스탄불 구시가지를 보호하고 있는 바로 그 성벽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395년에 로마 제국은 둘로 쪼개졌습니다. 그의 두 아들 중 한 명에게 제국을 양위한 것이 아니라 동과 서로 나눠 주어 각각 통치하게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본래 라틴족의 본거지였던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곳은 서로마 제국이 되었고 신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곳은 동로마 제국이 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와 2세 사이에 낀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였습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겐 아들이고 2세에겐 아버지였습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북부에 살던 게르만 민족의 남하로 백년도 못 가서 476년 멸망하였지만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천년이 넘는 역사를 더 갔습니다. 특히 법전으로 유명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다스린 6세기 중반엔 과거 로마 제국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 오늘날 스페인인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북부 등을 수복하여 대 제국을 이루며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전체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오늘날 이스탄불로 천도를 한 것은 참으로 잘한 것 같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생김으로 인해 전체 로마 제국의 수명이 천년 가까이(977년) 연장되었으니까요.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395) 후 동서로 쪼개진 로마 제국 (출처, 위키백과)


콘스탄티노플이 생기면서 나뉜 것은 국가로서의 로마 제국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의 종교인 기독교도 둘로 쪼개졌습니다. 1054년에 일어난 동서교회의 대분열 사건이 그것입니다. 서로마 제국은 멸망을 했어도 본래 기독교의 구심점인 로마 시내의 교황청은 존속하였기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기독교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중세로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로마라는 제국의 국경과는 상관없는 종교로 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서방 로마의 교황이 갈등을 빚는 양상이 전개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5대 교구인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중에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양대 교구로 힘이 모아졌습니다. 그 두 교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같은 기독교이지만 성상파괴운동을 비롯한 교리와 의식에 대한 이견까지 보이며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성전의 건축 양식도 다르게 말입니다. 서방카톨릭과 동방정교회로 굳어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아슬아슬했던 바가지가 결국 깨진 것입니다. 11세기 들어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9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한이 황제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진 것에 위협을 느껴 로마의 교황인 레오 9세에게 SOS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의 교황청이 조정자 역할을 하는 과정에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양 대주교는 1054년 서로를 파문했습니다.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의 교황을 파문했고,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파문했습니다. 그렇게 이혼한 서방카톨릭과 동방정교회는 이후 견원지간의 관계로 서로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형제와도 같은 같은 기독교였지만 종교적인 교류 없이 지낸 것입니다.


그렇게 무려 9백 년이 흐른 어느 날이 되어서야 카톨릭과 정교회는 서로 화해를 하게 됩니다. 20세기인 1964년 교황인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아티나고라스가 예루살렘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 두 수장은 1054년 그들의 선배가 행한 서로의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과거와는 달리 종교적인 실권이 없는 존재로 바뀐 상태였습니다. 그의 교구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그가 속한 국가의 종교는 이슬람교로 바뀐 지 4백 년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99프로의 국민이 이슬람교 신도인 나라의 기독교 수장이 나선 것입니다. 상징적인 화해로 봐야 할 것입니다.


서방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대표 성인으로 모십니다. 둘은 형제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 일을 하다가 그물을 내던지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승천 후 수제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못박혀 순교를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카톨릭의 초대 로마 교황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동생 안드레아는 동방 지역에서 선교를 하였는데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달려 못박혀 순교를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정교회의 초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추대되었습니다. 카톨릭과 정교회에서 평행이론과도 같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서방 카톨릭의 성인인 베드로와 동방 정교회의 성인인 안드레아 형제를 통해 본 교회의 분열과 화해 성화


교회의 분열로 루비콘강을 건넌 카톨릭과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의 운명을 가르는 엉뚱한 사건으로 발화되기도 했습니다. 서방의 기독교도 전사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해서 멸망시킨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 시 일어난 일로 4차 십자군 원정을 떠난 기사들은 그 도시를 침략하고 약탈해 1204년 그곳에 십자군의 왕국을 세웠습니다. 성지인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해 떠난 성스러운 기사단이 산적이나 해적이 되어 이렇게 같은 뿌리인 기독교도의 도시를 침공하고 아예 눌러앉아 그들의 왕국을 세운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콘스탄티노플에 일어났습니다.


십자군들은 그들이 세운 나라를 라틴 제국이라 불렀습니다. 로마의 정통성을 표방하기 위해 로마인의 뿌리인 라틴족의 나라라고 한 듯합니다. 그 시기 정도면 콘스탄티노플엔 로마인보다 많은 그리스인이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같은 정교회 국가라 긴 시간을 거치며 그렇게 동화되었습니다. 라틴 제국의 건국엔 십자군 전쟁 시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실력자로 떠오른 베네치아인들의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정권 다툼을 하는 내통자를 끼고 손쉽게 난공불락의 그 성의 문을 따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 싸움에 십자군이 용병처럼 이용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라틴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괴뢰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반이 약한 제국이라 콘스탄티노플은 1261년 본래 주인인 동로마 제국의 왕조에게 되돌아갔습니다. 그 57년간 콘스탄티노플의 종교는 동방정교회가 아니라 서방카톨릭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처음 건설되었을 때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그 도시를 새로운 로마(Nova Roma)라 불렀습니다. 라틴 제국을 세운 십자군과 베네치아인들도 그곳을 로마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도 국가와 민족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도 그곳을 로마라고 불렀으니까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 2세는 그를 가리켜 알라신의 대리자인 칼리파로 부르게도 했지만 가장 위대한 로마인인 카이사르로 부르게도 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당하자 러시아의 이반 3세는 이번엔 모스크바를 가리켜 제3의 로마, 또는 새로운 로마라고 칭하였습니다. 제2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이 사라졌으니 그곳을 모스크바가 승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황제를 가리키는 말도 역시 또 카이사르의 러시아 이름인 차르라 불렀습니다. 모스크바는 동방 지역인 콘스탄티노플에 동로마 제국이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을 한 도시입니다. 랜드마크인 바실리 성당을 비롯해 도시가 세련된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들로 채워졌습니다. 팬시한 유럽의 도시 꼴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로마의 주가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그가 세운 파시스트의 이탈리아를 가리켜 제3의 로마라고 부른 것입니다. 같은 시기 독일의 히틀러는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비스마르크가 통일한 독일을 제2제국, 그리고 그가 세운 나치의 독일을 제3제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수도 베를린을 게르마니아란 이름으로 고대 로마의 모습처럼 재건하려고 착공까지 하였습니다. 과거 로마가 그랬듯이 게르마니아를 세계 수도로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듯 제국 로마와 로마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서양사에서 정복자들이 소유하고픈 이름이었나 봅니다. 반지의 제왕처럼 로마를 소유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의 상상화 (출처, 파노라마 1453 역사박물관, 이스탄불)


드디어 오스만 제국의 7대 술탄인 메흐메드 2세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그는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성을 당시로는 획기적인 첨단 대형 대포와 말도 안 되는 작전으로 함락시켰습니다. 우르반이라 불린 그 대포로도 타격은 입어도 성이 무너지지 않자 성에 가까이 함선을 근접시키기 위해 육로로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 성 앞바다에 바로 도달한 것입니다. 금각만(Golden Horn)이라 불린 만을 통과해야 그곳에 도달하는데 만 입구에 쇠사슬을 쳐놔 진입할 수 없어 그렇게 무모한 작전을 강행했습니다. 배에는 바퀴가 없으니 땅바닥에 둥근 통나무들을 깔고 밧줄로 잡아끌며 2km 가까운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저는 역사에서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이 2차 포에니전쟁 때 거대한 코끼리들을 끌고 11월 만년설의 알프스를 넘은 것을 가장 큰 미스터리라 생각했는데 그 미스터리보다 더한 작전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펼친 것입니다. 결국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함락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성의 쪽문이 발각되면서 그 안으로 오스만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가 멸망된 것입니다.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항복하면 안전을 보장하고 총독직을 주겠다는 메흐메드 2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지막까지 이교도와 싸우며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같은 이름의 선조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와 1,123년간 이어진 로마와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 전체로는 2,206년의 대 역사가 마감되었습니다.



*다음 주말 <하>편에선 오스만 제국 치하의 콘스탄티노플과 튀르키예 공화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 제국의 역사, 그리고 도시의 랜드마크인 아야 소피아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공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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