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는 가을에만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5월의 밤에도 그는 고독했습니다. 그에겐 이루지 못할 여인인 클라라 슈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고뇌하던 그였습니다. 20살에 14년 연상인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계속된 그의 가슴앓이였습니다. 클라라의 남편인 로베르트 슈만이 살아 있을 때엔 존경하는 스승의 부인이었기에 다가갈 수 없었고, 슈만이 죽고 나서는 그녀가 죽는 날까지 선을 지켰기에 그 선을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이' 인생을 산 브람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둘의 관계는 43년 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음악이라는 공통 요소가 있어서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음악의 동지이자 멘토이며 스승이기도 했으니까요. 음악회가 열릴 때엔 비즈니스 파트너십도 공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그런 음악적 관계만으로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브람스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 곁에 더 가까이 있고파서도 슈만이 죽은 후 그녀의 8남매를 부양했을지 모릅니다. 한마디로 시종일관 클라라에게 지극정성인 브람스였습니다. 그런 그들의 관계는 그녀가 죽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아니 그러고도 그는 1년을 더 갔습니다. 1년 후에 그도 죽었으니까요. 클라라가 죽었으니 그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요? 그들이 죽은 1896년 클라라는 77세였고, 1897년 브람스는 64세였습니다.
비가 세차게 뿌린 어제 5월의 밤 그런 고독한 브람스를 생각하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브람스가 특별히 매료됐던 우드인 클라리넷이 출연한 트리오 음악회였습니다. 브람스의 많은 곡들 중에서 클라라와 연관된 서정성 깊은 곡들이 비 오는 봄밤을 더욱 적셔주었습니다. 애절하게 낭만이 흐르는 밤이었습니다.
하지만 '낭만적인(romantic)'과 '낭만주의(romanticism)'는 다릅니다. 브람스와 클라라가 살았던 19세기를 관통한 낭만주의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그 안에서 파멸되어 가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여과 없이 음악이나 미술로 표출했던 사조였으니까요. 자유, 분노, 슬픔, 억압 등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아름답고 몽글몽글한 사랑 이야기만 있는 낭만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브람스는 그렇게 대세가 된 낭만주의 사조 속에서도 베토벤이 추구했던 고전주의의 기조를 끝까지 잃지 않으려 애쓴 음악가였습니다. 어쩌면 그런 그의 흔들림 없는 고전적인 음악관이 그의 평생의 여인이었던 클라라를 끝까지 지켜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그랬다고 하니 불현듯 든 생각입니다.
어제 - 아 시간이 자정을 넘겼네요 - 연주회엔 브람스와 클라라에 대한 강연도 진행되었습니다. 강연과 연주를 병행해주신 구자은 피아니스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마치 평생 피아노와 함께 했던 클라라로 분한 것만 같은 그녀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열정적으로 브람스를 연주한 홍채원 첼리스트와 김유연 클라리네스트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적어도 어젯밤만큼은 타이틀이 무색하게 고독할 리 없는 브람스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