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내전 청교도혁명
왕가의 나라 영국에서 그들 왕의 시조로 꼽는 이는 알프레드 대왕입니다. 871년에서 899년까지 웨섹스 왕국을 다스렸던 그가 오늘날 영국의 모태이자 주력이 된 앵글로색슨족의 정체성을 세우고 그 민족의 나라인 잉글랜드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겐 영국인 왕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습니다. 우리의 세종 대왕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더 왕은 비슷한 시기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존재불명의 왕입니다. 국가로서의 잉글랜드는 알프레드 후임으로 연장자라 불린 에드워드 왕이 브리튼섬 내에 있던 중세 7왕국을 통일하며 세워졌습니다. 이후 잉글랜드엔 왕가의 시조라 불리는 노르만 왕가를 비롯하여 여러 왕가가 이어지며 오늘날의 윈저 왕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이 속한 웨섹스 왕가가 왕가까지 영국의 원조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이후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바이킹인 데인족의 왕들이 그 왕가에서 왕 노릇을 해서일 것입니다.
알프레드 대왕 이후 천 년 넘게 이어내려 온 영국의 왕가에 왕이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튜어트 왕가의 찰스 1세와 그의 아들인 찰스 2세 사이의 11년 동안이 그렇습니다. 찰스 1세가 죽은 1649년부터 찰스 2세가 즉위한 1660년까지입니다. 그 시절 영국은 의회에서 선출한 지도자가 다스린 공화국이었습니다. 적어도 형식적으론 그랬습니다. 호국경(Lord Protector)이란 직함을 가진 그 국가 지도자는 2대에 걸쳐서 영국을 다스렸습니다. 그것도 본래 기존 왕들이 다스렸던 웨일스를 포한한 잉글랜드만 다스린 것이 아닌 북방의 스코틀랜드와 바다 건너 아일랜드까지 영토를 확장해서 다스렸습니다. 그 호국경이 그곳까지 정복사업을 벌여서 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 전역을 다스린 것입니다.
그 시절 영국의 국호는 잉글랜드 공화국(Republic of England), 또는 잉글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1649~1660)이었습니다. 짧지만 강했던 공화국이었습니다. 하지만 1660년 찰스 2세가 즉위하며 전처럼 왕정으로 원상복귀한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공화국이 다스렸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도 전처럼 독립국가로 원상복귀 시켰습니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온전히 병합한 것은 앤 여왕 시절인 1707년이고 아일랜드까지 병합한 것은 1800년의 조지 3세 때였습니다. 그땐 무력이 아니고 연합법(Acts of Union)에 의거해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영국이라 부르는 국가는 본래 잉글랜드만을 가리켰었습니다. 잉글랜드를 한자로 음차한 영길리(英吉利)가 그대로 영국(英國)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영국 하면 잉글랜드는 물론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까지 포괄하는 유나이티드 킹덤(UK) 전체를 더 많이 지칭합니다. 그런즉 영국은 잉글랜드도 되고 UK도 됩니다.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가 영국 전체의 통합을 주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가의 나라 영국에서 공화국을 탄생시킨 호국경은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정치가이자 군인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과 항상 함께 따라다니는 청교도혁명을 통해서 그렇게 영국에 디퍼런트한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청교도혁명이라 해서 그 혁명을 이룬 집단이 청교도들이라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그 이전 벌어진 유럽의 종교전쟁이나 우리의 동학혁명이나 중국의 백련교도의 난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종교적인 이상과 대의명분을 위해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기 영국 안에선 영국의 국교가 된 개신교와 카톨릭의 갈등, 개신교 내에서도 청교도와의 갈등이 심하긴 했습니다.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 1642~1651)은 찰스 1세의 폭정에 항거한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내전이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나 우리의 6.25전쟁과 같은 내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10년의 내전에 잉글랜드 왕가와 이해관계가 있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끼어들었고 그 모든 것을 깨끗이 평정한 인사가 크롬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혁명은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이라고도 불립니다. 아니 그 사건이 잉글랜드 내전이고 청교도혁명이라고도 불린다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 내전의 결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프랑스혁명처럼 왕이 처형까지 당한 다이내믹한 혁명성은 있었으나, 혁명이 일어난 동기나 진행 과정을 보면 그렇게 혁명스러워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 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이 청교도였고, 그가 집권한 후 청교도 정신을 강조하며 청교도식 법규를 국가 통치에 적용했기에 그런 이름도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청교도는 그 이름에서 보듯이 청교가 아니고 청교도입니다. 종교가 아니고 신자를 가리키는 용어라는 것입니다. 영국은 그 이전인 1534년 헨리 8세 때 수장령을 발동하며 성공회를 믿는 개신교 국가가 되었는데 그 개신교 내에서 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청빈한 금욕주의, 순결성과 함께 신실한 복음주의를 강조한 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을 주도한 신자들을 가리켜 청교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캘빈이나 그의 제자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뿌리내린 존 녹스도 그 영향은 받은 종교개혁가였습니다. 즉 청교도는 특정 개신교파가 아닌 개신교의 여러 교파에 영향을 준 종교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그런 청교도들이 영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가 오늘날 미국인의 선조(Pilgrim Fathers)가 된 것이었습니다.
청교도혁명을 유발한 문제의 왕 찰스 1세는 12년간 의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화를 자초한 것입니다.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왕세자 시절 스페인에 가서 스페인 공주와 결혼할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결혼은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 공주와 했습니다. 거기엔 지참금과 종교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자마자 스페인과 영국은 전쟁에 돌입했는데 그 전쟁에서 영국이 졌습니다. 궁핍해진 찰스 1세는 의회에 돈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의회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스페인에서 왕의 권위가 무소불위인 것을 보고 무지막지하게 그렇게 한 것인데 이것이 그의 실수였습니다. 영국은 1215년 귀족들이 당시 존 왕에게 대헌장을 발동할 정도로 의회주의가 일찍이 발달된 나라였으니까요.
결국 돈이 궁해진 찰스 1세는 의회 승인 없이 톤세, 파운드세 등을 제정해 세금을 마구 걷어들였습니다. 의회는 왕에게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 1628)을 들이밀었습니다. 골자는 잉글랜드인은 왕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그로 인해 처벌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찰스 1세는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곧 다시 선박세를 신설해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이제 의회는 둘로 나눠졌습니다.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왕을 반대하는 의회파로 갈라선 것입니다. 1642년 잉글랜드에서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복잡해지고 살기가 힘들어지니 청교도는 물론 많은 영국인들이 아메리카 식민지로 떠나갔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크롬웰도 그때 친척과 함께 떠나려고 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가 배를 탔더라면 오늘날 영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렇듯 크롬웰은 중앙 정치와는 상관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수학한 케임브리지 대학 근처 헌팅턴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닭과 양을 치는 자작농인 요먼에서 젠트리 계층으로 신분이 상승되며 그 지역 의회에 발을 디딘 성장형 인물이었습니다. 세습되는 정통 귀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일어난 내전은 그에게 입신양명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의회파의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점점 중앙 정치 무대로 올라선 것입니다. 그가 조직한 민병대는 승승장구하며 수도인 런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찰스 1세는 위기를 돌파하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처가인 프랑스에게도 손을 벌렸습니다. 부창부수라고 부인인 왕비도 친정을 동원했습니다. 내전의 판이 점점 커져간 것입니다. 잉글랜드에서 왕당파와 의회파로 둘로 나눠진 의회의 문제가 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 전체로 번져갔습니다. 카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엔 카톨릭으로, 장로교가 우세했던 스코틀랜드엔 개신교로 딜을 하며 그의 우군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떠나 왕정이 당연한 세상에서 왕에게 거역하는 내전은 반란이기에 찰스 1세의 구원 요청이 그에게 먹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전역이 쑥대밭이 되어갔습니다. 찰스 1세는 이 과정에서 살기 위해 갖은 음모를 꾸미고 치사한 짓을 벌이다가 결국 1646년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리고 역시 또 이 과정에서 승승장구하며 의회파의 최고 실력자로 올라선 크롬웰에게 인도되었습니다. 이제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의 존립과 찰스 1세의 생사는 크롬웰의 손에 달렸습니다.
동시에 내전의 승자인 의회파는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크롬웰과 그의 군대의 힘이 너무 커져 버려서였습니다. 당시 독실한 청교도였던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죽이려고까지 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보호 아래에서도 3년 간 잉글랜드 왕의 신분으로 호의호식하며 잘 지냈으니까요. 하지만 왕세자 때부터 스페인을 속여 국가간 전쟁까지 유발할 정도로 어이없는 짓을 벌여온 찰스 1세는 그 마지막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등에 SOS를 치고 크롬웰을 제거하려 했으니까요. 당시 훗날 찰스 2세가 되어 돌아오는 찰스 1세의 아들과 부인은 프랑스로 피신을 가있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원군과 함께 구조를 위해 배를 띄우기도 했고 스코틀랜드에선 일부 왕권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도 왕당파는 2차 내전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찰스 1세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크롬웰은 의회에 찰스 1세의 처형을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의원들의 반대로 부결되었습니다. 훗날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결국 크롬웰은 1648년 그의 군대로 의회를 제압해 반대하는 의원들을 모두 가두는 프라이드의 숙청(Pride's Purge)을 결행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숙청이 아닌 그 사건을 지휘한 대령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의 뜻을 따르는 70여명의 의원들이 찰스 1세의 처형을 결의하는데 영국사는 이 의회에 잔부의회(Rump parliament)라는 조롱성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상 의회가 아닌 엉덩이, 찌꺼기 의회라는 뜻입니다. 결국 1649년 찰스 1세의 재판이 열렸고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크롬웰의 각본대로 정해진 재판이었을 것입니다. 찰스 1세는 재판 1주일 후 그가 평소 연회를 베풀던 화이트홀 궁의 뱅퀴팅 하우스 앞에 차려진 사형대에서 참수당했습니다. 크롬웰은 영장에 서명하러 가며 서명하지 않은 의원들에게 잉크를 뿌려댔다고 합니다.
찰스 1세가 죽음으로서 잉글랜드는 왕이 없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혁명 또는 내전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군대 내부에서의 갈등도 있었고 그의 처형에 반발하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크롬웰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롬웰은 그 전쟁도 모두 훌륭히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한때 한 배를 탔던 의회와의 싸움도 치러야 했습니다. 그는 찰스 1세처럼 그에게 반발하는 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뜻에 맞게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습니다. 크롬웰은 그렇게 내부의 정적을 제거하며 1653년 호국경으로 취임했습니다.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에 서명하며 그는 카톨릭교도와 왕당파가 없는 잉글랜드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의회의 수명은 고작 5개월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면 얼마든지 해산시킬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공화국을 표방했지만 군사독재 정치를 펴나간 것입니다.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재위한 5년간(1653~58) 영국은 강력했습니다. 유럽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라로 올라선 것입니다. 프랑스와 손잡고 여전히 강국인 스페인과 유럽에서 전쟁을 벌여 이기고, 남미에선 금은 쟁탈전을 벌이며 자메이카를 점령했습니다. 프랑스는 감사의 뜻으로 노르망디의 됭케르크를 무상으로 영국에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식민지의 청교도들에겐 가혹했습니다. 같은 청교도이지만 국익을 우선했던 것입니다. 1657년 의회는 호국경인 크롬웰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6주의 고민 끝에 그는 그것을 거절했고 호국경에 재취임했습니다. 그의 속마음은 모르겠으나 표면적으로는 그와 함께 했던 군대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접었습니다. 이미 실권을 다 쥔 그였기에 호국경과 왕이 다른 점은 세습이 되지 않는 것 빼곤 딱히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재취임식은 그 어느 왕보다 화려했고 그가 죽은 후 호국경은 그의 아들인 리처드에게 세습되었습니다. 왕정과 다를 바 없던 공화국이었던 것입니다.
크롬웰은 통풍과 학질로 1658년 59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가 재위 기간 중 왕당파의 왕정복고 시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암살 시도도 물론입니다. 잠재적 위협 인물인 찰스 1세의 아들은 바다 건너 네덜란드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리처드 호국경은 아버지만 못해 국가를 다스릴만한 재목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했습니다. 크리스마스도 없고 스포츠나 예술 이벤트도 없는 청교도식 삶이 지루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크롬웰이 떠난 의회에서 법으로 금지된 왕정복고라는 말이 솔솔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인들에겐 예나 지금이나 매우 익숙한 왕정입니다. 결국 크롬웰의 아들은 호국경이 된 지 1년 6개월 만에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동시에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는 그가 떠났던 고국 잉글랜드로 화려하게 귀환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참수당한 런던의 화이트홀로 입궁했습니다. 왕정복고, 1660년 찰스 2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찰스 2세의 복수는 잔인했습니다. 부왕인 찰스 1세를 폐위시키고 사형을 주도한 의회파에 대한 숙청이 벌어진 것입니다. 10명의 핵심 인사들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방법으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살아있는 채로 심장을 꺼내 보는 앞에서 토막을 내고 내장을 배에서 끄집어 내 불태웠습니다. 그때까지 살아있는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에 묻혀있던 크롬웰을 비롯한 그의 가신들은 관에서 꺼내어져 참수를 당하고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습니다. 찰스 1세의 12주년 제삿날인 1661년에 이루어진 스펙터클한 이벤트였습니다. 크롬웰의 머리는 찰스 2세가 죽는 날까지 의회가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문밖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다시는 의회가 왕에게 맞서지 못하게 한 찰스 2세의 경고였을 것입니다. 현재 크롬웰의 머리는 그의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오늘날까지 왕정인 영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할 수밖에 없는 공화국을 연 시대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것이 청교도혁명이든 잉글랜드 내전이든 그것의 승자로 한 시대를 풍미한 것입니다. 그에게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연상됩니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갈리아의 총독으로 있던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로 진격해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고 기원전 46년 독재관(Dictator)에 올랐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코르시카의 하급 귀족 태생으로 수도 파리로 입성해 1800년 통령(Consul)에 올랐습니다. 용어만 달랐지 크롬웰의 호국경과 같은 직위일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공화국의 꿈을 꾸며 국가 지도자로 올라섰습니다. 차이점은 카이사르는 불과 2년 만에 암살로 죽었고 나폴레옹은 4년 만에 황제가 되며 왕정주의자로 바뀌었습니다. 로마 제국도 카이사르가 죽고 바로 왕정으로 돌아섰습니다. 물론 카이사르도 제 명대로 살았으면 황제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크롬웰이 왕위에 오르라는 의회의 제안을 6주간이나 고민한 것을 보면 이렇듯 누구든 왕은 떨쳐내기 힘든 유혹인가 봅니다.
현재 지구촌 거의 모든 국가가 채택하는 공화국을 이루었음에도 크롬웰은 영국에서 그렇게 반기는 인사는 아닌 듯합니다. 그와 청교도혁명에 대한 찬반논쟁이 끊이지 않으니까요. 그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 반기를 든 청교도인 데다가 천년 넘는 왕가에 11년의 구멍을 뚫어놔서 그런 것일까요? 주지하듯이 영국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왕가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대놓고 실시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실제 그것으로 많은 재미와 이익을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제적이라 할 수 있는 그 시스템을 여전히 옹호하고 실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제 형태라도 말입니다. 물론 내전을 치르다 보니 크롬웰은 찰스 1세는 물론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현재 영국의 왕은 왕정복고한 찰스 2세를 잇는 찰스 3세입니다. 1685년 찰스 2세 사망 후 3백년 넘게 그 이름을 가진 왕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