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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의 분리독립 전쟁, 백년전쟁

중세를 끝장낸 백년전쟁

by 마하

아주아주 긴 전쟁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는 영국해협을 사이에 두고 섬과 대륙으로 완벽히 갈라서 있습니다. 느낌적으로는 비슷한 위도로 좌우에 있을 것만 같은 두 나라이지만 실제로는 그 해협을 경계로 남북으로 위치해 있습니다. 그 해협의 최단 거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도버해협입니다. 영국의 도버와 프랑스의 칼레까지 34km에 이르는 바다입니다. 그런 두 나라의 위치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발발 이전 우리나라에서 비행시간은 런던이 파리보다 덜 걸렸습니다. 시베리아 항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위도가 높은 런던이 파리보다 가까웠던 것입니다. 위도상으로는 런던이 북위 51.5도, 파리 48.5도로 3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렇게 간단히 증명이 됩니다. 현재는 중국,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영공을 통과하기에 그때보다 2시간가량 늘어나 14시간 이상 소요됩니다. 그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나 다양합니다.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적대국으로 맞서며 100년간 벌인 전쟁입니다. 정확히는 116년(1337~1453) 동안의 전쟁이었습니다. 몇 세대를 걸쳐가며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물론 매일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전쟁 중의 하나임엔 분명합니다. 그것을 비슷하나마 능가하는 전쟁으로는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간에 벌인 포에니전쟁이 있습니다. 그 전쟁은 120년간(BC 264~146) 진행되었습니다. 아, 공식적(?)으로는 2천년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1985년이 돼서야 로마제국의 후예인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과 지금은 튀니지가 된 옛 카르타고의 수도 튀니스의 시장이 만나서 포에니전쟁의 종전을 선언했으니까요.


백년전쟁과 포에니전쟁은 전쟁의 양태도 비슷했습니다. 두 전쟁 모두 전황에 따라 통상 1차, 2차, 3차로 구분합니다. 3차 전쟁에서 최종 결판이 났다는 것입니다. 포에니전쟁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한니발은 2차전의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아마 비서양권 전쟁 영웅들 중에서, 그리고 최종은 진 패장임에도 그처럼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인물은 유일할 것입니다. 백년전쟁에서 그에 견줄만한 인물로는 잔다르크가 있습니다. 그녀는 그 긴 전쟁을 끝낸 3차 전쟁의 영웅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에서 그녀가 출현하기까지는 무려 92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대역전의 서전인 1429년 오를레앙 전투에 그녀는 화려하게 데뷔하였습니다. 그로부터 595년 후에 벌어진 2024년 파리올림픽 개막식에서 번쩍이는 갑옷에 하얀 말을 타고 달려온 것처럼 잔다르크는 그때 같은 모습으로 오를레앙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전투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체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잔다르크



얽히고 얽힌 영국과 프랑스


백년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왕위 계승을 다툰 전쟁입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해서 1차전쟁을 시작했고, 백여년이 지나서도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해서 3차까지 간 전쟁입니다. 그것엔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경제적인 이익 다툼도 개입되었습니다. 오늘날 벨기에가 된 플랑드르 지방의 양모업과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 지방의 보르도 와인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도 전쟁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전 시 에드워드 3세는 이 두 지역의 양모업자와 양조업자들을 끌어모아 전투를 치르었습니다. 물론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땅따먹기는 전쟁의 당연한 이슈일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영국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 땅, 프랑스 땅이 99.9프로 정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국경선이 그때 그어졌습니다. 이 글에서 영국과 잉글랜드는 거의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바다 건너 영국을 침공해 노르만 왕가를 개창한 후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가 묘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윌리엄 1세는 그 당시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는 역으로 잉글랜드의 왕은 대륙인 프랑스에 그의 영토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국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공작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즉, 강국인 프랑스의 왕은 영국 왕을 자국의 공작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상류사회에서 프랑스어를 쓰고 예법을 따른 것은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 이후 영국 왕들은 프랑스 공주와 대를 이어 결혼하며 프랑스 내 영토를 늘려갔습니다. 중세 유럽의 국가 지형이라는 것이 결혼하면 지참금으로 영지를 가지고 가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신하 국가 영국의 대륙 영토는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반면에 시간이 흐를수록 프랑스 왕에 대한 영국 왕의 충성도는 점점 희석되어져만 갔습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 와중에 프랑스의 샤를 4세가 1328년 후사 없이 죽으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프랑스 공주에서 잉글랜드 왕비가 된 이사벨라는 자기 아들인 에드워드 3세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왕권은 샤를 4세의 4촌인 필립 6세에게 갔습니다. 카페 왕조의 끝이고 발루와 왕조의 시작입니다. 당시 잉글랜드와 독립전쟁을 벌이던 스코틀랜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친하게 지내왔습니다. 그것은 영국(UK)의 일원이 된 오늘날까지도 만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붙으면 스코티시는 프랑스를 응원하곤 합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로 유명한 독립 영웅인 윌리엄 월레스(1270~1305)가 죽은지 얼마 안 된 시기입니다.


백년전쟁의 시작,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 (1312~1377)


결국 에드워드 3세는 1357년 스코틀랜드의 독립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 2세를 거치며 3대에 걸쳐 이어온 전쟁이었는데 그의 대에서 독립을 허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잉글랜드가 전력이 약해져서 스코틀랜드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에 위와 같은 왕위 계승 이슈가 생겼고, 그 와중에 새 왕인 필립 6세가 역시나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전선을 바꾼 것입니다. 왕위 계승 문제로 가뜩이나 미워 보인 필립 6세였는데 더 미운 짓을 하니 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루비콘강을 건너갔습니다. 잉글랜드 입장에선 두 국가와 전쟁을 벌이기엔 소모가 크기에 지긋지긋한 스코틀랜드를 떼어내고 더 큰 먹거리인 프랑스를 선택한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숙명의 일전, 1337년 백년전쟁의 시작입니다. 플랜태저넷 왕가와 발루와 왕가의 싸움입니다.



기선 제압,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영국해협을 건넌 에드워드 3세의 영국군은 승승장구를 했습니다. 참전 인원은 대국인 프랑스보다는 적었지만 장궁이라는 신무기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플랑드르와 보르도의 가스코뉴 등 대륙의 연합군들이 영국 편에서 함께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곳의 양모업자와 양조업자들은 영국에 붙는 것이 더 이익이 커서 그랬을 것입니다. 플랑드르 입장에서 영국은 드넓은 초원에서 자란 양들이 제공하는 양모의 훌륭한 공급처이고, 가스코뉴 입장에선 영국인들이 워낙 보르도 와인을 좋아했기에 영국은 커다란 수요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백년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는 보르도 와인의 영국 수출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이 대안으로 찾은 공급처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포르투의 도루강변에서 만들어지는 포르투 와인을 대안으로 수입한 것입니다. 포르투 와인의 도수가 일반 와인보다 높은 것은 당시 거리가 먼 영국까지 운송 중 상하지 말라고 와인에 독한 브랜디를 섞었기 때문입니다. 그 레시피가 오늘날까지도 포르투 와인에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백년전쟁에선 주로 잉글리시맨이 등장합니다. 프렌치보다 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명장들의 활약으로 전쟁 중 프랑스의 영토가 가장 쪼그라들었을 때엔 거의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3세 다음으로 등장하는 주요 잉글리시맨은 그의 아들로 흑태자라 불린 에드워드입니다. 그는 백년전쟁 초기 가장 크고 중요한 전투로 꼽히는 크래시 전투(1346)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블랙 프린스는 오늘날까지 영국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습니다. 유난히 흰 피부에 갑옷도 그렇고 검은 옷만 입어서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기록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는 무려 8배나 많은 프랑스군을 크래시 전투에서 물리쳤습니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의 기쁨이 가장 컸을 것입니다. 차기 왕으로서 손색없는 아들로 보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잘난 아들은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가 너무 오래 왕을 했기 때문입니다. 50년 동안 왕위를 지킨 아버지보다 그는 1년 먼저인 45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리처드 2세가 즉위했습니다. 우리 역사의 영정조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흑태자는 이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의 왕인 장 2세를 생포해 영국으로 압송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관례대로 그의 석방 조건으로 높은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프랑스 귀족들에 의해 거부되어 장 2세는 런던의 사보이 궁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 정도로 긴 전쟁이었으니까요.


백년전쟁 전반전의 최고 스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흑태자 (1330~1376)


로댕의 명작 <칼레의 시민>은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제작되었습니다. 크래시 전투의 다음 전투(1347)지가 바로 칼레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성을 포위하고 그들의 항복을 기다렸습니다. 시민들은 1년간 성에서 나오지 못해 아사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왕인 필립 6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잉글랜드에 항복했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항복 조건은 시민 대표 6명의 희생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시민들이 로댕에 의해 조각으로 환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남은 칼레 시민은 물론 그들 자신들도 살렸습니다. 그곳에 와있던 에드워드 3세의 부인인 필리파 왕비의 간청으로 처형을 면했기 때문입니다.



승리가 목전에.. 헨리 5세


백년전쟁 동안 영국은 5명의 왕이 대를 이으며 지휘를 하였습니다. 그들 중 전쟁 후반기에 활약이 두드러진 왕으로 헨리 5세가 있습니다. 그는 초기의 에드워드 3세처럼 프랑스에 왕위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자 군대와 함께 영국해협을 건넜습니다. 식어있던 전장을 다시 뜨겁게 달군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내분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루이 왕세자를 옹호하는 세력, 외척인 부르고뉴 공작을 따르는 세력, 그리고 겹사돈인 아르마냑 백작을 따르는 세력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조국이 백척간두에 섰는데 이러구들 있으니 프랑스가 영국을 이길 턱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116년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가 영국의 본토에 상륙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전투는 오직 오늘날 프랑스 땅에서만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확보한 잉글랜드의 헨리 5세 (1386~1442)


헨리 5세가 이룬 대승은 아쟁쿠르 전투(1415)입니다. 전쟁 전반 흑태자가 이룬 크래시 전투와도 같은 대승이었습니다. 역시나 전쟁에서 숫자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대국답게 언제나 숫자에선 영국군을 앞섰습니다. 아쟁쿠르에서도 영국군은 6천명 정도였고 프랑스군은 최소 5배 이상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무기와 지형을 이용한 전술이 승리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엔 정신력도 일조를 하였습니다. 헨리 5세가 전투 전 병사들의 정신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멋진 연설을 했으니까요. 아쟁쿠르 전투의 그 연설은 역사상 유명한 명연설로 꼽힙니다. 185년 후인 1600년에 쓰인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에도 등장하는 그 연설은 "우리는 적다. 적은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는 한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로 대표됩니다. 넷플릭스의 영화 <더 킹 헨리 5세>엔 그 전투가 자세히 묘사되어 나옵니다.


헨리 5세가 이끈 잉글랜드의 대승 1415년 아쟁쿠르 전투 (존 길버트 1884)


아쟁쿠르 전투 승리 후 협상석엔 샤를 6세를 대신해 카트린 공주가 나왔습니다. 헨리 5세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꽃핀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프랑스 입장에선 샤를 6세가 그때 정신병 걸린 것이 다행일 정도로 카트린 공주는 최상의 협상 카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그 협상으로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섭정하고 샤를 6세가 죽으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다는 소득까지 올렸습니다. 1420년에 맺은 트루아 조약입니다. 이렇게 백년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프랑스는 영국의 왕이 다스리게 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5세가 바로 죽었습니다. 대업이 완수되는 순간 3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 것입니다. 그의 아들은 불과 1살도 되지 않았기에 영국은 공작들의 어지러운 섭정이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프랑스의 샤를 6세도 죽고 샤를 7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프랑스에서도 한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백년전쟁의 최고 스타가 등장한 것입니다.



백년의 대역전, 잔다르크


백년전쟁에서 17세로 추정된 어린 소녀 잔다르크의 등장은 갸우뚱할 정도로 드라마틱합니다. 현실이 아닌 소설과도 같은 대역전승을 거두려면 그러한 스토리밖에 없을 정도로 그녀는 종교적으로 등장하고, 전설처럼 싸우다가, 신화처럼 생을 마감했습니다. 성녀로 나타나, 불세출의 기사로 싸우다가, 마녀로 죽었지만 또 성녀가 되어 영원불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로렌 지방의 신앙심 깊은 시골 소녀가 어느 날 천사의 계시로 프랑스를 구하라는 계시를 받고 실제로 그 모든 것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녀가 사망한 19세까지 불과 2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백년전쟁의 그 100년 동안 그 어떤 왕후장상들도 해내지 못한 일들이었습니다. 전쟁 내내 열세로 국토의 대부분을 영국에게 내준 프랑스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오히려 더 영토를 확장해서 전쟁을 끝냈으니까요. 소설이 아니고 분명한 역사입니다.


잔다르크의 도움으로 백년전쟁을 끝낸 왕으로 기록된 샤를 7세 (1403~1461)


잔다르크의 일생은 기독교적인 체험과 기적의 여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비슷해 보입니다. 어느 날 처녀인 성모 마리아 앞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는 선택받은 그녀가 임신을 한다는 수태고지를 했습니다. 역시 처녀인 잔다르크 앞에 나타난 미카엘 천사는 선택받은 그녀가 프랑스를 구하게 된다라는 것을 고지했습니다. 예수는 작업장에서 아버지의 목수일을 30세까지 도와서 했습니다. 잔다르크는 양과 소를 치며 17세까지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예수는 3년간 공생애를 살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적들에게 몰려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잔다르크는 2년 만에 프랑스를 구했지만 그가 성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적들에게 몰려 화형을 당했습니다. 예수가 유다에 의해 은 30냥에 넘겨진 것처럼 잔다르크는 브루고뉴 공작에 의해 1만프랑에 넘겨졌습니다. 예수는 사후 부활을 하여 영원불멸한 기독교의 성자가 되었고 잔다르크는 사후 명예가 회복되어 카톨릭의 성녀로 시성되었습니다.


잔다르크가 계시를 받았다고는 하나 아버지조차 딸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지함과 영험함은 점차로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해 그녀는 계시대로 샤를 7세를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번쩍이는 갑옷에 백마를 탄 남장 기사가 된 것입니다. 그녀가 찬 칼은 전설 속에서 주인을 기다려온 아더왕의 엑스칼리버처럼 그녀가 천사의 계시로 찾아낸 명검이었습니다. 그녀의 하얀 깃발엔 하느님의 형상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그녀는 첫 전투지인 오를레앙 전투에 나타났습니다. 구국의 전사로 변신한 성녀가 프랑스를 구하러 온다는 예언의 실현, 프랑스군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반면에 영국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오를레앙에서 승리했고 이후 파테와 르아브르 등에서 잔다르크는 승리를 이어갔습니다. 전세가 뒤집힌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잔다르크가 있는 프랑스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잔다르크의 미션, 샤를 7세의 대관식 (파리 판테옹)


잔다르크가 미카엘 천사에게 받은 계시엔 샤를 7세를 랭스 대성당으로 데리고 가서 즉위식을 올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샤를 7세는 왕이지만 즉위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잔다르크는 결국 그 일도 해내었습니다. 랭스까지 그를 호위한 것입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즉위식을 올린 왕은 잔다르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인기와 그녀를 기적과도 같이 둘러싼 기독교가 왕권보다 커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녀의 반대 세력이 싹트면서 그들은 그녀를 마녀로 몰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샤를 7세의 지원을 못 받은 그녀는 콩피에뉴 전투(1430)에서 부르고뉴파에게 포로로 잡혔고 잉글랜드에 1만프랑에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 영지인 루앙에서 잉글랜드파 주교에 의한 종교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재판은 신의 계시와 성녀라는 측면에서 교황청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1431년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그녀는 문맹이라 내용도 모르고 무조건 서명을 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역시나 샤를 7세는 끝까지 나 몰라라 했습니다. 나쁜 왕이고 나쁜 남자입니다.


잔다르크의 반대 세력들은 별 것을 다 문제 삼았습니다. 그녀의 번쩍거리는 갑옷과 안장이 너무 사치스럽다는 등 여자이기에 걸 수 있는 별 시답지 않은 시비도 건 것입니다. 반면에 종교재판에선 기사로서 남장을 한 그녀를 동성애자로 몰기도 했습니다. 심문 내용 중엔 계시를 줬다는 미카엘 천사는 털이 있느냐 없냐, 영어로 말했냐 프랑스어로 말했냐 등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죽고 프랑스는 파리(1437)와 루앙(1449)을 정복함으로써 22년 후인 1453년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3년 후 샤를 7세는 잔다르크를 복권시켰습니다. 교황청은 다시 종교재판을 재개했고 결국 사망 489년 후인 1920년 잔다르크는 성인에 올랐습니다. 그 결정에는 잔다르크의 재판을 주도한 잉글랜드가 이후 카톨릭에서 이탈해 성공회 국가가 되었다는 점도 편안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백년전쟁, 백년의 전황 변화



유럽의 쌍벽, 영국과 프랑스


백년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새로운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번엔 내전입니다. 요크가와 랭카스터가가 귀족간 왕권을 두고 장미전쟁(1455~1485)을 벌인 것입니다. 결국 랭카스터가가 승리해 플랜태저넷 왕조는 끝나고 강력한 왕권을 가진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대륙에서 잉글리시맨을 다 몰아내고 오로지 프렌치만의 강력한 왕권 국가가 되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지방 제후와 기사에 의존했던 봉건 시스템이 끝나고 중앙의 왕이 상비군인 군대를 가지고 통솔하는 중앙 집권의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유럽의 동방에선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동서방 모두 중세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 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백년전쟁의 종식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완벽하게 남남이 되었습니다. 주군과 신하, 왕국과 공국, 왕과 공작 등으로 얽히고, 그로 인해 프랑스 내 있던 영국의 영토가 정리되면서 노르만 왕가 때부터 이어오던 양국의 관계가 청산이 된 것입니다. 영국의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 권리를 명시한 트루아 조약이 최종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그런 이상한 밀월 관계가 모두 무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영국의 왕은 프랑스 내 영토를 주장하지 않게 되었고, 프랑스의 왕은 영국의 왕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국 상류사회에서 더 이상 프랑스어도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잉글리시맨과 프렌치의 독립적인 국가관과 문화가 형성되어 간 것입니다. 그렇게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쌍벽을 이루는 견원지간의 라이벌 관계로 각각 발전해 갔습니다. 두 나라가 다시 손을 잡게 된 것은 400년 후인 크림전쟁 때였습니다. 백년전쟁이 영국과 프랑스의 분리독립 전쟁이 된 것입니다.


영국의 라파엘전파 로세티가 그린 잔다르크 초상화 (1882)


백년전쟁 후 프랑스 내 영국의 영토는 칼레만 남게 되었습니다. 칼레 시민들은 나몰라라 했던 프랑스 왕과는 달리 그들을 죽음에서 구해준 영국 왕비의 은혜를 기억해 영국을 선택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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