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제게 깜놀 후배님입니다. 저의 첫 직장인 광고대행사 오리콤의 후배님입니다. 어느 날 사내에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가야금과 피아노를 위한 슬픔>이란 소설이었습니다. 깜놀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소설을?" 야근과 휴일 근무가 다반사인 광고대행사에서, 하냥 바쁜 대리 쫄따구가, 게다가 글을 주업으로 하는 카피라이터도 아닌 오디오PD인 그가, 중단편도 아닌 무려 세 권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냈다고 하니 깜놀 아니할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1996년도의 일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 후배님의 결혼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깜놀이었습니다. 당대를 주름잡은 여배우와 결혼을 한다고 또 사내에 소식이 쫘악 퍼졌으니까요. 그 소설로 인해 그녀가 진행하는 라디오 음악 방송에 그가 게스트로 초청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주름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의 깜놀은 제게 또 반복되었습니다.
1년 전인 2024년 봄 오래간만에 그 후배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사이 또 소설을 출간했다고 했습니다. 조금 놀랐지만 모 시간이 흘렀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출간 전력도 있고 하니까요. 그래도 예의상 "오!" 하며 깜놀한 척을 했습니다. 그는 후배님이라곤 하지만 저와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소설이 영어 소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번엔 진짜로 일단 깜놀의 탄성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어떻게 영국에서 영어 소설을 출간할 수 있지?"라며 놀란 것이었습니다. 그건 <하얀 전쟁>을 쓴 안정효 같은 소설가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문학으로 분류되는 소설이 됩니다. 제 머릿속에선 그 소설의 내용이 무엇인지 보다는 영어 번역가, 영어 교정, 영국 출판사 등등 절차적인 것들이 먼저 어지러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진행했는지가 우선 궁금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이단 깜놀이 이어졌습니다. 후배님은 처음부터 그 소설을 영어로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헉!" 그가 외국 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가 완전 성인이 된 결혼 후부터이고, 그 기간이 아주 길지도 않은 신토불이 한국인이기에 그랬습니다. 토종이라도 안정효 작가처럼 영문학 전공자이고, 영어를 직업으로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전 그가 영어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 후배님의 깜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영어 소설을 일본에서도 출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본어로 쓰인 소설입니다. "이런!" 삼단 깜놀까지 터졌습니다. 다행히 그의 일어 소설은 번역가가 개입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왜 다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자리에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배님은 저에게 이제 그 소설을 우리나라에서도 출간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위에서 보듯이 한글 원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로 본인이 3년 전에 쓴 영어 소설을 본인이 한글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결심이 섰으니 후배님은 또 지난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거의 새로 쓰는 창작과 마찬가지의 고통스럽고도 긴 시간을 그때부터 또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지난 6월 말 문제의 그 소설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재즈 러버스(Jazz Lovers)>입니다. 제목에서 보듯이 재즈와 사랑이 주제인 소설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오리콤 재직 시 그 후배님의 차를 함께 타고 CF 녹음을 위한 녹음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그는 제가 모를 음악들을 엄청 시끄럽게 틀고 가며 그 음악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는 그의 해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녹음실까지 가는 그 시간이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과연 오디오PD요, 뮤직디렉터답게 그 후배님은 음악엔 진심 열정적인 마니아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재즈 러버스>에는 제목과 표지처럼 많은 재즈 음악이 나옵니다. 하지만 악기는 예상과는 달리 양악기인 피아노와 국악기인 해금이 나옵니다. 후배님의 첫 소설에 피아노와 가야금이 나왔듯이 말입니다. 메시지가 유추되는 등장 악기일 것입니다. 소설 속 나열되고 연주되는 그 많은 재즈들은 제가 90프로 이상 모르는 곡들입니다. 무식의 소치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남녀는 당근 그 곡들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들을 창조한 작가인 후배님의 해박한 재즈 지식이 그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정서는 100프로 이상으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보다도 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으면 그런 선택을 안 했을 테니까요. <재즈 러버스>는 재즈라는 음악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우리 시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최정식 작가님 수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출간을 축하합니다. 제가 후배님에게 깜놀했던 이유는 그간 순간순간 보여준 그대의 집념이 이룬 결과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찍이 그 집념을 발견하고 인정한 후배님의 최고 열혈 팬은 바로 지금 그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분일 것입니다. 후배님이 쓴 첫 소설인 <가야금과 피아노를 위한 슬픔>을 읽고 결혼을 결정했다고 하니까요. 제가 후배님을 여느 후배처럼 후배라 부르지 않고 후배님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딱 내 누님과도 같은 그분입니다. 매우 기뻐하고 계시네요.ㅎ
* 이 글엔 피표준어 표현들이 들어있습니다.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