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기사단의 운명
시칠리아섬 남단 포잘로에서 몰타섬까지는 뱃길로 채 100km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부드럽게 지중해의 물살을 가르며 2시간 가까이 남으로 향하던 배는 이윽고 몰타공화국의 수도인 발레타에 도착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해안가에 영화에서나 보던 성벽 요새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한눈에도 그곳이 문명국임을 알 수 있는 고색창연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나타났습니다. 정통 유럽의 이국적인 모습입니다. 농업이 주업이라 어딜 가도 온통 올리브와 오렌지 밭만 보이던 시칠리아에서 출발해서인가 몰타는 마치 사라진 전설의 도시처럼 보였습니다. 더 이상 지중해 남쪽으로는 없을 것만 같은 아프리카 아닌 유럽 도시가 두둥~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섬에 가까워지자 그 성벽 위로 빨강 바탕에 리본 모양의 하얀 십자가기가 펄럭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몰타기사단의 도시 몰타섬에 도착했습니다.
유럽 중세의 끝 십자군 원정엔 3개의 주요 기독교도 기사단이 참전을 했습니다. 가장 먼저인 1099년에 창설된 몰타기사단과 1119년에 창설된 템플기사단, 그리고 1190년 창설된 튜튼기사단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부여한 사역인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9차 원정에 걸쳐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1291년 2백년간 온 유럽을 시끄럽게 한 십자군전쟁의 최후의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올 오어 나씽,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에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한 아크레에서 전면전이 펼쳐진 것입니다. 그 공성전엔 위의 주력 3개 기사단이 모두 참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각각 다른 모양의 십자가를 표식으로 삼은 3개 기사단의 망토가 전장 이곳저곳에서 휘날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 유럽에선 그 전투의 승리를 위해 온 유럽인들이 매일 동네 성당에 모여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해 4월 6일에 시작된 전투는 5월 18일에 십자군의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기나 긴 십자군전쟁도 함께 끝이 났습니다. 이후 발생한 몇 번의 전투는 산발적이고 패주의 과정에서 벌어졌기에 별 의미가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성지라 주장하던 무함마드의 이슬람교도가 그들의 예루살렘을 지켜낸 것입니다. 패잔병이 된 다국적 연합군인 십자군은 이제 그곳에서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이후에도 십자군은 유럽 내에서 그 땅을 넘보던 오스만제국과의 전투 등을 위해 또 결성되기도 했지만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가 빠진 십자군은 그 존재 가치가 매우 미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십자군의 기사단들은 어떤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일단 그들은 실업자와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군대로 교황의 명을 받아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하는 신자들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 그 기사단의 가장 큰 임무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전투와 의료, 구호 사업을 하던 기사단이었는데 그 선한 싸움에서 패배함으로써 이제 그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기사단의 보스이자 최고 명령권자인 교황의 힘이 그가 주창한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바람 빠지듯 약해져 그들은 매우 난망했을 것입니다. 기업으로 치면 CEO의 경영권은 약해지고 주요 먹거리 사업이 사라진 것입니다.
마치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유신 시 개혁파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도쿠가와 막부파의 갈 곳 없는 사무라이들과 같은 기사 팔자가 된 것입니다. 주군과 직업을 잃은 사무라이들은 로닌(낭인)으로 전락해 범죄조직인 야쿠자의 전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1895년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그들이 해결사로 동원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실제로 십자군전쟁의 많은 기사들은 철수 후 유럽을 떠돌며 약탈을 일삼거나 바다에서 해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호구지책 앞에서 우아한 사명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전기사단으로도 불리는 템플기사단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파리에 본부를 둔 기사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럽 전역에 조직을 갖추고 무역과 금융 등의 각종 사업으로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성지 순례자들을 인솔하며 물자와 돈도 이동시키며 막대한 이익이 발생한 것입니다. 어두웠던 중세에 생긴 최초의 국제 은행과 다국적 기업과도 같은 역할을 한 그 기사단이었습니다. 그것 아니고도 성지 순례자들의 기부와 헌금, 귀족 출신인 기사들의 조건인 독신자 신분으로 인해 그들의 물려줄 대상 없는 상속 재산도 기사단의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기사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템플기사단의 경우 그들의 부가 어느 정도였냐면 지중해의 키프로스섬을 매입해서 소유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사단의 부가 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의 막대한 재산을 탐을 내 그것을 빼앗으려는 기독교도 왕이 등장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필립 4세가 바로 그 악당입니다. 잦은 전쟁으로 빚이 많았던 그의 눈에 용도가 끝난 템플기사단의 재산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고 그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기사들은 종교재판을 통해 모두 화형을 당했습니다. 아비뇽 유수로 이미 교황청까지 장악한 필립 4세였기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기고 보르도의 주교를 클레멘트 5세 교황으로 앉혔습니다. 왕권 아래 교권인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르반 2세 교황이 시작한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교황권은 그렇게 추락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1291년 아크레 공성전이 끝난 지 21년 만인 1312년 템플기사단은 지구상에서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영화나 게임 속에서 다시 살아나 많이 보이는 그 기사단입니다.
튜튼 기사단은 3차 원정 기간인 1190년 아크레에 세워진 야전병원이 기사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템플기사단과는 달리 아크레에 본부가 있었습니다. 유럽 민족의 기원 중 하나인 튜튼족은 중부 유럽을 거점으로 뿌리를 내려 오늘날 독일 민족인 게르만족의 전신으로 봅니다. 그래서 튜튼기사단은 독일기사단으로도 불립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은 오늘날 폴란드의 마르헨부르크 등 동프로이센 지역으로 본부를 옮겨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동구 슬라브인이 믿던 정교회와 이교도의 종교를 개종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한 것입니다.
그 튜튼기사단의 후예가 세운 나라가 프로이센입니다. 비스마르크 시대에 접어 들어서는 독일제국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히틀러는 튜튼기사단을 그들 민족의 중요한 기원으로 보고 그 기사단의 표식인 검은 십자가를 나치의 심벌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단이 세운 오리지널 프로이센이 위치했던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막을 올렸습니다. 튜튼기사단은 1808년 유럽의 동쪽을 탐을 낸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그들을 보호하여 1834년 비엔나로 본부를 옮기고 활동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기사단장도 주로 합스부르크 사람들이 맡았습니다. 이것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함께 공존했던 복잡한 역사에 기인합니다. 현재 튜튼기사단은 특별한 활동은 없고 과거 선배 기사들의 정신과 명예를 추존하고 있습니다.
몰타기사단은 1099년 1차 십자군원정 시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기사단답게 아크레에서 철수하면서도 예루살렘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키프로스섬을 새로운 본거지로 선택하였습니다. 언젠가 재탈환할 날을 기약하며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둥지를 튼 것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왕국의 왕인 보두앵 4세(에드워드 노튼 분)의 군사 고문으로 출연한 제레미 아이언스(티베리아스 역)는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넘어가자 키프로스로 떠난다고 하며 기사 발리안(올랜도 블룸 분)에게 "너는 어디로 갈거냐?"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연기한 티베리아스는 당시 키프로스섬의 주인인 템플기사단이나 나중에 그곳에 둥지를 튼 몰타기사단 소속으로 보입니다.
몰타기사단은 예루살렘에 설치된 병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의료 지원 활동을 해오던 단체가 전투까지 수행하는 기사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사단은 구호기사단, 요한기사단으로도 불렸습니다. 이후 키프로스섬을 거쳐 로도스섬으로 본부를 옮겼는데 이 시기엔 로도스기사단으로 불렸습니다. 1522년 로도스섬에서 오스만제국에 패해 쫓겨난 기사단은 8년간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방황하다가 1530년 몰타섬에 정착해 오늘날까지도 불리는 몰타기사단이 되었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왕가의 일원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가 갈 곳을 못 정하고 헤매던 기사단에게 스페인의 영토였던 몰타섬을 제공한 것입니다. 몰타섬은 1492년 스페인 통일 이전부터 시칠리아와 함께 통일의 한 축인 아라곤왕국에 소속된 섬이었습니다. 임대 조건은 매년 기사단이 매 1마리를 황제에게 진상하는 것이었습니다. 몰타의 매의 기원입니다.
카를 5세는 기독교 수호 측면도 있지만 지중해를 휘저은 북아프리카 해적과 오스만제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전투력을 갖춘 몰타기사단에게 그 섬을 넘겨준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 기대에 걸맞게 몰타기사단은 1565년 벌어진 오스만제국과의 리턴 매치인 몰타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이끈 기사단장 발레트의 이름을 딴 발레타가 몰타의 새 수도로 정해졌습니다. 그들이 입도하기 전부터 수도였던 임디나에서 나와 기사단의 본부가 들어선 발레타로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그 승리로 인해 기사단은 몰타섬이 그들의 영원한 성이고 도시이고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의 판을 뒤엎은 나폴레옹이 등장하며 그 기사단의 운명은 또 바뀌었습니다. 하필이면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노렸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원정 길에 아프리카와 가까운 몰타섬이 그의 눈에 띈 것입니다. 중간 경유지와 후방 보급처로 그만한 장소가 없었을 것입니다. 몰타에서 가장 가까운 튀니지는 300km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몰타기사단은 그 섬에서 쫓겨나갔습니다. 또다시 유랑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거기엔 나폴레옹이 천하무적이기도 했지만 같은 기독교도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기사단의 신조도 작용했습니다.
이후 몰타기사단은 1834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턴 전투 기사단이 아닌 설립 시 요한기사단의 본연의 임무였던 의료 활동 및 인도주의와 봉사활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부가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교도인 박용만 전 대한상의 회장이 기사단장입니다. 아마 문재인 정부 시절 바티칸을 방문해 교황을 알현했을 때 교황은 대통령보다 박용만 기사단장을 더 반겼을지 모릅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그를 수호하는 기사단장이 왔으니 말입니다. 그런 특성으로 몰타기사단은 영토는 없지만 UN에서도 바티칸과도 같은 주권 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본부인 로마의 마지스트랄 궁전은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치외법권을 인정받는 지역입니다.
1830년 몰타기사단이 몰타에 오기 전 그 섬은 사도 바울의 섬이었습니다. 서기 60년경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려 압송 시 풍랑으로 그 섬에 표류되었습니다. 성경의 사도행전에 멜리데로 나오는 섬입니다. 몰타에 3개월을 머문 그는 치유의 은사를 발휘해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보블리오(푸블리우스)를 비롯한 도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습니다. 그래서 보블리오는 몰타의 초대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몰타는 기독교의 뿌리가 깊은 지역입니다. 사도 바울을 기리는 몰타섬 내 대성당도 서구에서는 매우 빠른 5세기경에 건축되었습니다. 고도 임디나에 바로크 양식으로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내부는 고요하고 경건하지만 역시나 매우 화려합니다.
몰타의 옛 수도 임디나는 마치 근세 도시 안에 있는 중세 도시 같습니다. 그리고 판타지 게임에 나오는 성과도 같아 보입니다. 작지만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아름다운 고성입니다. 다리를 건너 성문을 통과해 좁고 굽은 골목길을 몇 바퀴 돌아도 지루함이 없습니다. 한낮임에도 미화원이 쓰레기를 치우는 것으로 보아 관리에도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임디나입니다. 그래서 임디나는 마치 현대에 들어 일부러 옛 건축 자재로 세운 테마파크와도 같습니다. 그 임디나 중앙 광장에 성 바울 대성당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강화도 크기의 작은 나라 몰타엔 위의 성 바울 대성당만큼이나 유명한 대성당이 하나 더 있습니다. 몰타기사단이 들어온 후 천도한 발레타에 1577년 건축한 성 요한 대성당입니다. 몰타기사단 최초의 이름인 요한기사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아 그들의 수호성인과도 같은 성 요한은 사도 요한이 아닌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6촌형입니다. 그를 기리는 성 요한 대성당은 역시나 바로크풍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인데 기사단은 그 성당 안에 많은 그들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으로 성당 안 이곳저곳에 기사단의 심벌인 몰타십자가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 성당이 몰타기사단의 본당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당 지하엔 그 기사단을 상징하는 예술품도 하나 남겼습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경계선에서 활동했던 카라바조의 작품입니다. 헤롯왕의 명으로 목이 잘리는 세례 요한의 처형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카라바조는 살인죄로 쫓기는 와중에 몰타섬에 들어와 기사단의 보호 아래 1608년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참수당하는 성 세례 요한>입니다. 작품에서 망나니에 의해 목 눌림을 당하는 요한의 머리는 이미 하얗게 질려 있습니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그 옆엔 헤롯왕의 의붓딸인 살로메가 그의 목을 담기 위해 은쟁반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매우 상징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입니다. 성 요한이 순교하는 모습이기에 이 작품은 그의 이름을 딴 성당에서 별도로 독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소중하게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방 입구에 몰타기사단의 십자가가 뚜렷이 장식된 것으로 보아 기사들은 지금도 세례 요한과 그가 순교하는 그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그림 외에도 카라바조는 그 성당에 작품을 하나 더 남겼는데 그 작품은 주인공이 세례 요한이 아니라서인가 위의 그림만큼 대우는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방이 아니고 그냥 벽에 걸려있는 그림입니다. 어려운 히브리어 성경의 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해 성경 대중화에 기여한 제로니모를 묘사한 <성 제로니모의 필사>입니다. 역시나 카라바조의 상징성과 사실성이 드러난 작품으로 그림 속 제로니모는 구도자와도 같은 엄숙함으로 하느님의 신성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해골은 죽음마저도 해탈한 그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 동굴 수도원에서 30년간 성경 번역과 수행에만 매달린 그였습니다. 그 작품을 보면서 만약 이 그림이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제로니모 수도원에 있다면 그곳에선 <참수당하는 성 세례 요한> 이상으로 독방에서 VIP 대우를 받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사도 바울과 만찬가지로 몰타섬에 머물다 로마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3개월을 체류한 사도 바울은 죽으러 가는 길이었고 15개월을 체류한 카라바조는 사면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시칠리아를 거쳐 로마로 가던 중 급작스런 병으로 죽었습니다. 몰타섬에 체류할 때에도 기사단원으로 임명되었지만 소란을 일으킨 그였습니다. 꽤나 성질이 불같은 사고뭉치 카라바조였습니다.
1798년 나폴레옹이 몰타섬에 입성한 후 프랑스의 착취에 신음하던 몰타인들은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넬슨 제독이 섬을 봉쇄해 프랑스는 물러나고 1800년부터 몰타는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미션을 달성한 영국도 몰타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며 그 섬을 영국령으로 삼았습니다.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해군기지로서도, 당시 인도로 가는 중간 경유지로도 최적의 영토가 저절로 굴러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몰타는 1956년 거의 영국 본토로 편입될 뻔도 했습니다. 결국 몰타는 196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몰타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지금도 영연방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방문해서 본 몰타는 거의 영국이었습니다. 몰타어와 함께 영어가 공용어이다 보니 거리의 간판은 다 영어이고 어딜 가도 영어만이 들렸습니다. 특히 관광객으로 꽉 찬 화려한 수도 발레타는 천상 영국 도시였습니다. 물론 자동차와 차도도 영국처럼 우리와는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몰타는 우리나라에서 영어 연수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통 영국 영어를 영국보다 싸게 배울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보이는 사람들도 백인과 인도인, 아랍인 등 영국스러워 도무지 이탈리아와 가까운 나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탈리안만 넘쳐나는 가장 가까운 시칠리아와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국민 소득도 4만 5천불 가까이 되어 4만불 정도인 이탈리아보다 높습니다. 앞으로 그 차이는 더 벌어질 듯합니다.
몰타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몰타십자가입니다. 이 글 맨 앞에서 제가 입도하며 가장 먼저 보았다는 그 빨간 깃발 속 십자가입니다. 그 깃발은 몰타의 국기가 아닙니다. 몰타 국기는 발레타 시내에서 딱 한 번 봤습니다. 하지만 몰타십자가는 깃발은 물론 가는 곳마다 외벽이나 간판, 그리고 상점 내 각종 기념품에 새겨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 요한 성당 내부는 마치 그날 아침 기사단이 와서 미사를 보고 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입구부터 온통 그 기사단의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카라바조의 그림방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기사단 단장의 이름을 딴 수도 발레타는 더욱 그러합니다. 몰타기사단이 번듯하게 만든 도시이니까요.
몰타기사단은 그들의 본부를 옮길 때마다 최초의 요한기사단에서 로도스기사단, 몰타기사단으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사단의 본부가 로마라면 로마기사단으로 개명하는 것이 관례적으로는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1798년 몰타섬에서 추방되고 로마에 정착한 기사단은 더 이상 이름을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기사단이 과거처럼 전투 기사들을 거느리지 않았기에 말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지금 로마의 몰타기사단은 주권이 있는 국가로 인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과거 몰타섬에 있을 때처럼 말입니다. 여권도 발급이 됩니다.
어쩌면 몰타기사단은 본래 그들의 영토였고, 그들의 깃발이 지금도 펄럭이며, 선배 기사들의 많은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몰타섬을 특별한 시각으로 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마치 유대 민족이 그들의 성전이 있던 시온을 그리워하며 시오니즘 운동을 펼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언젠가 수복해야 될 실지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의 상태는 디아스포라 중이고 로마의 본부는 해외 망명정부가 될 것입니다. 시온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듯이 그렇게 돌아갈 날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주권만 있고 영토는 없는 나라이지만 영토까지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몰타기사단은 과거 카를 5세에게 매년 헌상했던 몰타의 매 한 마리가 아니라 수천 마리 이상도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여행자의 재미있는 상상에 불과합니다. 현재 몰타공화국과 몰타기사단은 매우 사이가 좋습니다. 발레타에 들어와서 보니 몰타기사단 깃발과 몰타공화국 국기는 트리톤 분수를 사이에 두고 함께 펄럭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