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의 땅이라지만 넓은 영토만큼이나 많은 문화예술적 자산을 보유한 나라 러시아입니다. 문학만 보더라도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안톤체호프, 고골리 등 많은 작가들이 있습니다. 음악으로 가면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해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국민음악파 5인조, 쇼스타코비치 등이 줄줄이 연상됩니다.
하지만 미술로 가면 조금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래도 현대미술 쪽에 칸딘스키, 샤갈, 말레비치 등(구 소련 포함)이 떠오르지만 클래식한 미술가 쪽에선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엔 서방의 고야, 고흐, 고갱 같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배운 적이 없고 이후에도 러시아 미술을 접하지 못해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과 음악 대비 균형이 맞아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미술입니다. 아, 저는 그렇습니다.
지인 중에 러시아 미술을 열심히 알리는 분이 있습니다. 갤러리 까르찌나 김희은 관장입니다. 그녀는 요즘은 전쟁으로 경색되어 러시아 내에선 주춤하고 있지만 국내에선 전시회도 자주 열고, 책도 여러 권 냈으며, 강연도 열심히 다닙니다. 물론 다 주제는 오롯이 러시아 미술입니다.
어제 제가 관여하는 인문학교실에서 그녀를 강사로 초빙했습니다. 과연 러시아 미술의 전도사답게 열정적인 강의로 그녀의 시간을 채워나갔습니다. 러시아 미술이라는 제목만 걸어둔 채 비어있는 하얀 도화지와도 같은 청중의 가슴에 은근히 화려한 러시아 미술을 하나하나 채색해 나간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균형을 맞추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대한 대로 역시나 대단한 미술강국 러시아임을 알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강연 전날 김희은 관장이 최근에 출간한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그림 이야기> 책의 독서를 끝냈습니다. 덕분에 그녀가 진행한 동명의 강연은 마치 복습과도 같이 제게 반복효과를 주었습니다. 이 책은 러시아 미술의 입문서와도 같은 책입니다. 작가가 선정한 6개의 주제 안에 분산된 러시아의 미술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러시아의 역사는 보너스입니다. 그만큼 시대적 리얼리즘과 풍속화가 발달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일리야 레핀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뿌리와 흐름 안에서 서구 현대미술의 선구자격인 러시아의 현대미술이 탄생한 것입니다. 마지막 장은 말레비치의 <말 달리는 붉은 기병대>로 끝을 맺습니다. 가자, 전진 앞으로!
이번에도 역시 느꼈지만 붓은 펜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칼보다 강하다는 그 펜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 한 폭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그림을 펜으로 묘사하려면 몇 페이지가 걸릴 테니까요. 그러면서 임팩트는 붓으로 그린 그림에 훨씬 못 미칠 것입니다. 미술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