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수난과 쾨니히스베르크

by 마하

양재천에서 칸트는 익히 유명한 인사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칙사 대접을 받는 그이지만 그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 양재천의 명물로 톡톡히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재천을 양분하며 아름다운 천 가꾸기로 맹렬한 경쟁을 하고 있는 강남구와 서초구 중에서 서초구역에 서있는 동상입니다. 아니 앉아있는 동상입니다. 아마도 양재천변의 강남서초 구민들 중 그와 사진 한번 안 찍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이역만리 양재천까지 온 칸트는 여기서 수난을 겪었습니다. 수난(水難)입니다.


언덕 위로 올라간 양재천의 산책인 칸트


사진에서 보듯이 양재천엔 두 개의 칸트 동상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만 있습니다. 첫 번째 보이는 칸트가 현재 있는 동상입니다. 두 번째 칸트는 사라졌습니다. 2017년 처음 세워진 그 동상은 2022년 8월 큰비가 왔을 때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갔습니다. 그때 칸트 동상은 양재천 안 인공으로 조성된 미니섬에 있었습니다. 한강으로 치면 여의도와 같은 하중도에 면적은 아주아주 작지만 그만의 왕국처럼 조성된 곳에 우아하게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벤치 끝에 앉은 것은 수시로 그를 보러 오는 그의 팬들을 위한 빈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여름의 비는 칸트를 비롯한 그의 왕국을 초토화시켰습니다.


2022년 수해로 지금은 사라진 칸트


당시 양재천에서 그 비로 칸트만큼 큰 수해를 본 곳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천의 또 다른 명물인 천변의 도서관이었습니다. 제가 가본 도서관들 중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손꼽는 양재도서관의 지하가 침수되어 문을 닫은 것입니다. 주민들을 위한 서초구립 도서관입니다. 전기가 작동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 그 도서관은 무려 8개월간 휴관을 하고 이듬해 3월에야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생각보다 수리 기간이 길었던 것은 당시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전기 기술자들이 모두 고임금을 받고 경상북도 포항으로 집결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그 큰비로 문제가 된 포항제철 공장의 전기시설 복구가 더 시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2022년의 그 큰비는 전국적으로 재해를 안겨주었습니다.

칸트 동상을 관리하는 서초구는 그때 떠내려간 동상을 수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운지 5년도 안 됐지만 이미 스타의 반열에 오른 그의 동상을 곧바로 복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리로 고스란히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본래 위치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언제든 그렇게 큰비가 또 오면 또 수난을 당할 것이기에 안전한 지대로 옮긴 것입니다. 대신 양재천을 산책하는 주민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공연도 종종 열리는 천변 무대의 스탠드 중앙 VIP석에 그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전후좌우로 사람들이 그를 에워쌀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결정되면서 그의 앉은 자세도 바뀌었습니다. 본래 동상이 떠내려 가며 손상도 되었겠지만 바뀐 자세에 맞춰 새로 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미스터 칸트는 멀끔해졌습니다.


동상 옆엔 "칸트, 언덕을 오르다"란 문구를 부착했습니다. 그가 그곳으로 이사한 이유를 새겨 놓은 것입니다. 저는 문구 중 '언덕'이란 단어에 주목합니다. 왜 칸트 동상을 옮기며 언덕이란 단어를 썼을까요? 스탠드가 조성된 곳이 본래 지역보다 높은 지대임은 맞지만 굳이 언덕이란 단어를 찾아서 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칸트의 고향이 언덕이기 때문입니다.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왕의 언덕이란 뜻의 도시에서 그는 태어났습니다. 아니 태어난 것뿐만이 아닌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평생 집에서 100마일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집돌이로 유명한 칸트입니다. 주민들의 산책로로 사랑받는 양재천에 온 이유이기도 한 산책의 대마왕인 그는 산책도 매일 똑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로 했습니다. 그렇게 루틴의 대마왕이 된 칸트였습니다.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는 지금은 사라진 왕국인 프로이센의 수도였습니다. 오늘날 독일의 정신적 고향으로 불리는 매우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왜냐하면 칸트의 조국 프로이센과 후신인 독일이 태동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군원정이 끝나고 그 전쟁에 참전한 기사단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성전기사단으로 불리는 템플기사단은 본부가 있는 파리로 가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많은 재산을 탐낸 필리프 4세가 억울한 누명을 씌워 기사단을 해체하고 전원 화형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구호활동을 주로 했던 성요한기사단은 키프로스와 로도스섬을 거쳐 몰타섬에 정착했습니다. 오늘날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몰타기사단입니다. 독일기사단으로 불리는 튜튼기사단은 북부 발트해 근방으로 이동해 그곳에 자리를 잡고 동방정교회와 비기독교인의 개종 사업에 열중하였습니다. 오늘날 폴란드와 발트3국 지역입니다. 프로이센은 그 독일기사단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프로이센은 1618년 베를린 지역을 근거지로 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합병을 통해 프로이센공국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1701년 프리드리히 1세 때에 왕국을 선포하며 유럽의 신흥 강자로 올라섰습니다. 그 프로이센왕국과 그때까지 독일 지역 내 편입되지 않았던 제후국들과 자유도시들이 합쳐져서 1871년 독일제국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프로이센프랑스전쟁(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 수상과 빌헬름 1세는 나폴레옹전쟁 때 수모를 안겨준 프랑스의 심장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선포식을 거행했습니다. 하지만 그 빌헬름 1세 황제도 그 이전 왕위 대관식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올렸습니다. 역대 프로이센왕국의 모든 왕들이 왕의 언덕이라 불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올린 것입니다. 쾨니히스베르크가 독일의 정신적 고향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독일제국을 선포하며 그때부터 수도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옮겨갔습니다. 유럽 중앙으로의 서진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8세기 프로이센왕국 지도


칸트(1724~1804)는 프로이센왕국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그의 생 전부를 보냈습니다. 튜튼기사단의 단장인 알베르트공작이 1544년에 세운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를 다녔고, 그 대학에서 오랜 강사 생활 뒤 46세의 나이에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천재성에 비해 꽤나 늦게 교수가 된 것은 그가 원하는 철학 교수 자리가 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 이전 그는 학교 측에서 제안한 다른 학문의 교수 자리를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나와 할레 등 독일 다른 도시의 대학에서도 훨씬 좋은 조건으로 일찍부터 스카우트 제안도 있었으나 그것들도 거절했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와 철학을 그만큼 사랑했던 칸트였나 봅니다.


1770년 철학 교수가 되면서 그는 20년에 걸쳐 그 유명한 비판 3종 세트를 저술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 비판>(1790) 등 저를 비롯해 우리가 내용은 잘 몰라도 잘 알려진 그의 결과물이 그때 나온 것입니다. 물론 그 전후로도 많은 철학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근대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근대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부터 흘러 나왔다"고 그를 정의할 정도로 말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산 칸트는 허약한 몸이었음에도 규칙적이고 절제력 있는 생활로 80세까지 살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프로이센은 물론 도시 전체의 슬픔이었습니다.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가고 모든 성당에서 조종이 울렸습니다. 그의 유해는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역대 프로이센의 모든 왕들이 대관식을 올린 장소입니다. 특이한 것은 성당 내부가 아니라 외부 벽에 그의 묘지를 조성했습니다. 저의 상상입니다만 산책을 워낙 좋아했던 칸트였기에 그렇게 밖으로 빼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1861년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에서 거행된 빌헬름 1세 왕위 대관식 (아돌프 멘첼 1861)


칸트는 죽고 나서 수난 아닌 수난을 겪게 됩니다. 이번엔 위의 양재천과는 다른 수난(受難)입니다. 그가 직접 위해를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가 지도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아울러 그의 조국 프로이센과 후신이 독일도 그 도시에서 사라졌습니다. 다른 나라의, 다른 이름의 도시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초 벌어진 양차대전이 만든 결과였습니다. 먼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독일 내 폴란드가 독립하였습니다. 상당 부분 프로이센 지역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오늘날 독일 땅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가는 육로가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차 세계대전까지 독일이 패하면서 쾨니히스베르크는 당시 승전국인 소련의 영토로 넘어갔습니다. 대서양으로 나가는 항구를 노린 소련이 이때다 하고 그 도시를 빼앗은 것입니다. 소련은 도시명도 볼셰비키의 원로인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칼리닌그라드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독일은 전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프로이센 영토를 상실했습니다.


이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며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의 영토로 남게 됩니다. 지도에서 보듯이 이젠 러시아와의 육로도 벨라루스와 발트해 3국에 막혀 러시아의 역외 영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칸트와 그의 철학과는 아무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칸트는 1804년 죽었으니 이런 사실을 알 리도 없습니다. 다만 평생 쾨니히스베르크 바라기로 살던 칸트였기에 그가 만약에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매우 분노하며 슬퍼할 것입니다. 그의 고국과 고향이 사라진 것이니까요.


소련을 거쳐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가 된 비운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


쾨니히스베르크의 새 주인이 된 소련은 도시를 해체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벌였습니다. 군주국의 색채가 짙고 파시즘 독일의 정신적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칸트의 대학이었던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은 역시나 개명된 도시명인 칼리닌그라드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과거 아름답고 낭만적인 중세 도시의 모습도 다 파괴되어 전형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밋밋한 도시로 바뀌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같은 곳 전혀 다른 과거와 현재의 쾨니히스베르크입니다. 이토록 달라진 것은 전쟁으로 파괴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서진 건축물을 재건하는데 쾨니히스베르크의 건축 자재가 쓰였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집과 건물을 뜯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칼리닌그라드에 살던 많은 독일인들을 쫓아내었습니다. 그곳이 더 이상 독일이 아니니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마 칸트도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그렇게 100마일 밖으로 추방되었을 것입니다.


2005년 독일의 슈뢰더 총리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협상을 통해 칸트의 동상이 서있는 그의 모교 칼리닌그라드대학을 이마누엘칸트대학으로 개명했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대학 동문 중 최고의 스타인 칸트의 대학으로 교명을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옛 도시명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같은 볼셰비키의 이름이 들어간 레닌그라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원복 되고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을 따서 볼고그라드로 바뀌었는데 칼리닌그라드만이 여전히 옛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러시아 입장에서 독일어로 된 쾨니히스베르크란 도시명으로 돌아가기도 난감할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은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옛 도심에 남아있는 쾨니히스베르크의 흔적은 칸트가 잠들어있는 대성당이 유일해 보입니다. 사진 속 성당 주변 둑방길이 칸트가 산책한 길이라고 하는데 옛 모습과 비교하면 산책의 대마왕인 칸트라 하더라도 지금은 별로 산책하고 싶어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칸트 생전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와 현재 칼리닌그라드의 같은 도시 다른 모습


다시 양재천으로 돌아옵니다. 수난을 겪었지만 양재천의 칸트는 예나 지금이나 그가 어디에 있든 여전히 그곳을 산책하는 많은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이 겨울 그가 추울세라 주민들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그에게 빨간 목도리를 둘러주었습니다. 살아서는 100마일 밖으로 나간 적이 없던 그였지만 죽어서는 4,500마일 밖의 양재천까지 와있는 칸트입니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왜 독일의 위대한 철학 유산인 칸트 유해 송환을 추진하지 않을까요? 독신이라 후손도 없고, 쾨니히스베르크에만 살아 그와 인연 있는 독일 내 도시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물론 정치적 이유가 더 클 것입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외벽에 조성된 칸트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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