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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an 23. 2021

잉글리시 호른, 그 묘한 이름

English horn vs French horn

35km의 좁은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우방 국가이면서도 예로부터 유럽 영향력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기 위해 때론 적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긴장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백년전쟁에선 구국의 영웅 오를레앙의 잔다르크가 선봉에 선 프랑스가 영국을 물리쳤으며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선 넬슨 제독을 앞세운 영국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해 프랑스를 물리쳤습니다. 아마도 그 두 나라가 하나의 세계 속에 있었때는 브리타니아, 갈리아란 이름의 속주로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그 옛날뿐일 것입니다. 최근 영국이 대륙의 유럽과 경제 독립을 선언한 브렉시트를 최종 결정한 것도 이런 프랑스와 동등한 입장에서 위치하는 것이 싫은 자존심도 작용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 오늘날 영국과 그런 나라는 독일도 있네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시 영국과 맞서며 유럽의 강자로 올라선 나라이니까요.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기와 같이 눈에 안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래라는 것은 그것을 있게 한 뿌리이자 원인일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결과로 이름이 지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인과관계로 탄생한 이름은 그것을 가장 충실히 설명해야 하며 기호학적으로도 가장 잘 상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만 보더라도 가계를 나타내는 성이 있으며 이름 안에도 돌림자가 있어 그 이름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인의 경우는 이름 안에 아버지 이름까지 들어가 있어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두가 안다고 합니다.


오늘날 마케팅에서 상품의 이름은 그 중요도가 더욱 증대되고 있습니다. 마케팅의 주류가 브랜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된 상황에서 브랜드의 모든 것이 함축된 브랜드 네임(brand name)은 그것의 결정판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마케팅이라는 것은 그 브랜드에게 힘을 불어넣는 모든 행위와 노력인데 이름은 가히 그 선봉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의 유래는 때론 마케팅 상의 브랜드 스토리로 팬시하게 포장되어 그 브랜드의 가망 고객들에게 강한 구매 충동을 느끼게 만듭니다. 브랜드 하이어라키의 최상위에 있는 명품의 경우 브랜드 스토리가 없는 브랜드는 없다고 단언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좀 많이 나간 인트로가 되어 버렸네요. 사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호기심을 가진 악기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그 호기심의 근원이 그 악기 이름이기에 이렇게 장황한 서두를 쓰고 말았습니다. 제목에서 보여지는 잉글리시 호른이 바로 그것입니다. 호른은 호른인데 호른같이 안 생긴 악기, 잉글리시라고 하는데 영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참으로 이상한 악기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 악기의 정보를 모르는 누군가가 이 악기를 주문해 배달을 받는다면 즉시 반품할지도 모를 이상한 악기가 바로 잉글리시 호른일 것입니다. 악기 자체는 이상한 것이 전혀 없는데 이름이 매칭이 안돼서 그렇습니다.


저는 음악 전문가도 아니고 악기 전문가는 더욱 아니기에 음악적 지식은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역사적 호기심 관점에서 비 음악적 부분을 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호른은 호른인데 호른같이 안 생긴 악기 부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는 호른은 금관으로 돌돌 말아 감은 듯한 모양새로 달팽이나 나팔꽃처럼 생긴 정통 금관악기(brass instrument)입니다. 단어로서의 호른(horn) 동물의 뿔로 과거엔 신호용 뿔나팔로 사용되었는데 악기 호른의 이름은 이것에서 온 것입니다. 소리도 그렇고 곡선으로 굽은 동물의 뿔나팔은 악기 호른과 생김새도 유사하니 이름의 유래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고대나 중세 전쟁 시 망루 위 병사가 적들이 침입할 때 불어대던 그 뿔나팔입니다. 또한 이 뿔나팔은 왕이나 귀족이 사냥 시 사냥감을 몰 때도 유용하게 사용되곤 했습니다. 이 뿔나팔대적 악기로 발전을 거듭한 결과 우리도 잘 아는 유명 클래식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게 되어 오케스트라의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통상 호른으로 불리는 이 금관악기의 풀 네임은 프렌치 호른(French horn)입니다. 아래에 말씀드릴 잉글리시 호른(English horn)도 묘하지만 프렌치 호른도 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프렌치 호른의 묘함은 잉글리시 호른의 그것엔 대적할 수 없습니다.



프렌치 호른의 묘함은 프렌치에 있습니다. 프랑스식 호른이니 호른의 악기 역사에 프랑스가 무언가 대단한 기여를 했을 법한데 그런 사실을 발견하기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오히려 자연의 뿔나팔에서 브라스 재질의 밸브나 피스톤이 없는 원전 악기 호른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완벽한 호른까지 오는 데에는 독일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호른은 도이치 호른이라 불리지 않고 프렌치 호른이라 불립니다. 기껏 찾아본 자료에서는 프랑스가 사냥 용도의 호른을 연주용 궁정 악기로 편입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렇게 불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 제 생각엔 먼저 찜한 사람이 임자라고 프랑스가 가장 먼저 프렌치 호른이라 우겨 불러서 그냥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게 정설 아닌 정설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호른은 참으로 오묘한 악기입니다. 생김새도 그렇고 연주자의 연주 모습도 특이합니다. 또한 입술이 접촉하는 마우스 피스 부분이 가늘고 구멍도 작아 소리 내기가 금관악기 중 가장 어렵다는 평을 듣습니다. 음정도 워낙 섬세해 밸브나 피스톤이 못 잡는 그 미세한 차이를 나팔 출구(bell)를 연주자의 손으로 막아 조절합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천재 작곡가들은 이 악기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호른 연주 파트가 안 들어간 곡이 없을 정도로 호른 주자들은 늘 바쁩니다. 전 그 이유가 호른의 독특한 음색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흡사 몽실몽실한 구름이나 솜사탕이 바람에 밀려가는 관을 통과하며 탄탄해져서 뿜어져 나오는 그 부드러운 소리.. 그러니 작곡가들이 호른을 가만히 쉬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러한 까탈스러움에 섬세함, 부드러움을 갖춘 귀족적 면모는 독일인보다는 프랑스인이 훨씬 어울리는 듯합니다. 그래서도 프렌치 호른인가 봅니다.


잉글리시 호른은 이름만 보면 도무지 호른이라 연상할 수 없는 진정으로 묘한 악기입니다. 일단 뿔나팔이 업그레이드를 거쳐 완성된 프렌치 호른과는 달리 1720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신생 악기입니다. 첫 번째 묘함이라 함은 호른과의 연계성입니다. 프렌치 호른이 먼저 태어났으니 잉글리시 호른은 동생으로써 그 호른 패밀리의 유사성이나 DNA가 있어야 하는데 닮은꼴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금관악기의 반대편에 있는 목관악기이니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혈통을 더 따져볼 일이 없다 하겠습니다.



잉글리시 호른은 목관악기 최고의 귀족 오보에의 동생으로 태어났습니다. 실제 외모는 비슷하나 키가 더 크고 몸집도 더 있으니 오보에보단 저음의 악기입니다. 같은 목관악기인 플륫과 피콜로와 같은 유사성입니다. 같은 계보로 잉글리시 호른 밑으로는 더 낮은 소리를 내는 바순이 있습니다. 클라리넷과도 닮아 보이나 클라리넷은 색소폰처럼 마우스 피스에 나무 재질인 갈대 리드(reed)가 하나인 반면에 잉글리시 호른은 리드 두 개를 위아래로 붙여 그 사이 구멍으로 입 바람을 넣어 소리를 내는 겹 리드 구조의 악기입니다. 오보에와 바순도 같은 방식의 겹 리드로 소리를 내므로 이 세 악기는 같은 패밀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겹 리드 패밀리는 갈대가 바람에 소리를 내듯 지중해산 갈대로 만든 리드와 리드 사이로 바람을 불어 소리를 내므로 마우스 피스에 금속이나 합성물질이 개입된 다른 목관악기들보다 소리가 더 섬세하고 부드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영국식 호른일까요? 난망한 문제입니다. 프렌치 호른은 이름에 외모를 연상할 수 있는 호른이라도 있지만 잉글리시 호른에는 위에서 본 외모처럼 그것을 연상할 조각이 하나도 없기에 그렇습니다. 이 또한 자료를 찾아 찾아 확인한 결과 왠지 또 미덥지 않은 유래가 잡힙니다. 또 독일이 등장하는데요 초기형 이 악기를 발명해 제작한 독일인들은 이 악기가 중세 성화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나팔과 닮아 천사의 나팔(Engellishes horn = Angelic horn)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 Engellishes라는 말이 당시 독일 그 지방 토착어로 English를 뜻하기도 해서 잉글랜드 나팔로 잘못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내려와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부르는 잉글리시 호른이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이 악기의 개발과 발전에 하나도 기여한 것이 없이, 말 그대로 아무 상관도 없는데 이 위대한 악기의 이름을 날로 먹게 된 것입니다.


*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나팔 부는 천사 부분


이렇게 다소 늦게 데뷔한 잉글리시 호른은 오보에보다 풍부하고 구슬픈 소리로 서서히 작곡가들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워낙 독특한 음색을 내는지라 출연 빈도는 그렇게 많지 않은 악기로 자리매김되었습니다. 그래도 작곡가 입장에서 잉글리시 호른의 소리가 필요한 특별한 부분에서는 이 악기를 여지없이 등장시켜 예의 그 독특한 음색을 뽐내게 하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많은 서양 악기 중 가장 동양적인 소리를 내는 악기가 바로 이 악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흡사 우리나라 국악의 나발 저음과 유사한 톤으로 제 귀엔 들립니다. 출연 기회가 적다 보니 잉글리시 호른은 통상 주법이 비슷한 오보에 2 주자가 연주를 하곤 하는데 이는 피콜로를 플륫 주자가 연주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렇게 태생부터 특이한 잉글리시 호른을 월드 스타로 만들어준 작곡자는 '신세계 교향곡(From The New World)'으로 유명한 드보르작입니다.  교향곡 2 악장에서 잉글리시 호른이 메인 멜로디를 솔로로 치고 나갑니다. 드보르작이 뉴욕에서 머물 때 고향 체코를 그리워하며 작곡한 곡으로 알려진 이 곡은 우리 중학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곡입니다. 향수를 노래하는데 그 분위기에 가장 적합한 악기를 고심고민하다가 드보르작은 잉글리시 호른을 낙점해 그 중책을 맡겼을 것입니다. 결과는 대박, 그래서 너무 알려진 까닭에 이후 이 교향곡은 반드시 잉글리시 호른이 있어야 연주가 가능해졌습니다. 희소성이 있는 악기라 그 주자가 없어 2 악장 그 라르고를 클라리넷 등으로 대신 연주할 경우 제 맛이 안 난다는 것이지요.


https://youtu.be/Uzqh6dptL4c


묘하게도 영국 프랑스 이 두 나라는 딱히 한 일도 없이 잉글리시 호른과 프렌치 호른, 이 매력적인 악기들의 이름을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 갖게 되었습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음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존재할 이름입니다. 과연 유럽의 쌍벽이라더니 그래서 이런 생각지 않은 고귀한 예술적 지적물을 보너스로 수확하기도 나 봅니다. 침략 전쟁을 치른 것도 아니고 법적 송사도 없이 거의 거저 주웠으니 말입니다. 반면에 독일은 이 두 악기에 모두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고 감상하는 프렌치 호른을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했고, 잉글리시 호른은 최초로 제작까지 한 오리지널 국가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두 악기 이름에서 독일의 존재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음악사적이나 음악적으로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훨씬 무공이 강한 음악 선진국인데 말입니다. 이름만큼이나  또한 묘한 아이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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