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숙제를 끝내고

by 마하

해묵은 숙제를 하나 끝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시선 끄는 제목으로 계속 귓가에 맴맴 돌던 '그리스인(때론 희랍인) 조르바'를 드디어 끝낸 것입니다. 미뤄왔지만 언젠가는 꼭 읽어야지 했던 책이었기에,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통해 책 말미에 얻은 큰 자유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자인 나는 책의 맨 뒷장을 덮는 순간 벗어난 해방감에 작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올초 국내 개봉했던 작가의 전기 영화인 '카잔차키스'까지 최근 책 읽기 전 TV VOD로 감상한 터라 나 스스로는 미뤄온 숙제를 풀세트로 끝낸 장한 느낌이었습니다.

게으름으로 늦게 읽었지만 결과적으론 잘됐단 생각이 드는 것은 실존 인물로 서로 판이한 캐릭터인 소설 속 두 주인공인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인간과 자유에 대한 간극을 좁혀가는 이 책 줄거리의 흐름상 그 둘 사이 나이대에 있는 지금의 내가 읽는 것이 이해도의 측면에서 양자에 대한 공감성이 더 클 수밖에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읽고 보니 참 단조롭기 그지없는 소설입니다.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갈탄 탄광 개발의 고용주와 고용인으로 만난 이 두 사람이 마치 부부싸움하듯 옥신각신 알콩달콩 일어나는 별일 아니고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사의 묘사가 대강의 줄거리이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몇몇 주변 인물과 사건은 등장하지만 이 둘 간의 경박단소한 스토리로 작가는 무려 400여 페이지 위의 활자를 꽉 채웁니다. 그 속에 자유를 추구하고 추적하는 작가의 인생 숙제는 담겨 있지만 이렇게 속물적이고 평범한 줄거리 속에 특별한 주제를 녹이고 모종의 결말에까지 이르게 하는 카잔차키스의 천재성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젊음과 돈을 가졌고 많이 공부한 만큼의 지식과 세련미도 갖춰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금수저 출신의 화자 나 카잔차키스는 늙고 가진 것 없지만 매사 거침이 없이 경험과 임기응변으로 만사를 해결하는 조르바에게 일말의 열등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에 때론 혀를 차면서도 반전의 존경심까지 품습니다. 작가에겐 없는 자유가 그에겐 있다는 것이 카잔차키스를 그렇게 만듭니다.


조르바에겐 내일이 없습니다. 아니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되니까요. 그는 그저 오늘을 충분히 즐기며 닥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Carpe Diem!

그런데 그런 조르바는 자본가이며 식자인 카잔차키스를 전혀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인데 말입니다. 부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소심하게 속박된 작가의 그런 삶을 책망하며 자기 삶을 따르라고 합니다. 음악과 춤, 술과 여자가 있는 그의 정력적인 삶을..

아마 카잔차키스의 눈엔 그런 자유인 조르바가 그가 추종하는 니체의 철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그가 심취한 불교의 해탈인으로 까지 보이곤 했을 것입니다. 조르바와 생활하며 점점 그에 동화되던 카잔차키스는 결국 그가 꿈꾸던 자유인이 되는데 이 장면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탄광 작업 반장인 조르바의 수학적 계산 착오로 갈탄 사업이 바로 코앞에서 폭파 폭망하여 그는 돈, 일꾼들, 고가의 채굴 장비 등 모든 것을 날리는데 그때 비로소 그는 자유인이 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자유, 바로 그 순간 나 카잔차키스의 독백)

바로 그때였다.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그 순간에 나는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이다. 복잡하게 얽힌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자유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빗나갔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어떤 이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악마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이 강력한 적이 우리를 산산조각 내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완전한 패배인데도 속으로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의 파멸이 비할 데 없는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더 클래식 출판, 베스트 트랜스 옮김)



* 이미지는 저작권 확인이 필요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프로방스 미술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