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Aug 21. 2021

올댓 아비뇽 유수 - 1

All That Avignonese Captivity

<1> 아비뇽 다리 / 아비뇽 교황청 / 아비뇽 유수 



살면서 가본 여행지 중 끊어진 다리를 복원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는 2개의 인상적인 다리가 제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복원을 하든 철거를 해야 할 다리를 끊어진 채 그냥 방치하고 있기에 남아 있나 봅니다. 하나는 1996년 회사의 미국 연수 기간 중 플로리다에서 본 다리입니다. '세븐 마일 브릿지'라 명명된 그 다리는 20세기 초 마이애미에서 헤밍웨이의 집이 있어 유명한 미국 최남단 섬인 키웨스트까지 연결된 42개의 해상 철교 중 가장 긴 다리였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철교 이은 바다에 떠있는 수많은 섬들(Keys)은 징검다리를 연결한 열쇠 모양의 줄줄이 사탕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7마일에 달한 그 롱 다리는 허리케인으로 끊겼다는데 그것을 복원하지 않고 옆에 번듯한 새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이번엔 기차 다리가 아니라 자동차 다리로 말입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출연한 영화 '트루 라이즈'에서 등장했던 다리입니다. 세븐 마일 브릿지라는 이름은 새 다리가 가져갔기에 끊어진 그 다리는 '올드 세븐 마일 브릿지'가 되었습니다. 녹슨 흉물인 그 올드 브릿지는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2018년 가을에 방문했던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본 론강 위의 다리입니다. '성 베네제 다리'라 불리는 이 성스러운 다리는 건설된지도 끊어진지도 아주 오래된 다리입니다. 12세기에 건설되어 보수를 거듭하다 17세기 대홍수 때 유실된 다음부터는 보수를 포기하고 300년 이상 오늘의 모습으로 끊어진 채 남아 있으니까요. 베네제라 불리는 그 지역의 목동이 신의 계시를 받아 고난 속에 건설했기에 그는 죽어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 다리 역시 아비뇽의 론강 맞은편까지 건너지도 못하는 토막 난 임에도 지금은 돈을 내야 한 번 걸어볼 수 있는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남겨진 그런 유명한 다리가 있긴 합니다만 한반도 북쪽에 있습니다. 6.25 동란 때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철교'입니다.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을 연결하는데 사진으로 보니 과거 그 비극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국 측에선 역시 사람들이 몰려드는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북한 땅 신의주를 압록강 위에서 가장 가까이 볼 수 있으니까요. 위의 두 다리와 차이점이라면 압록강의 다리는 천재가 아니고 인재로 화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본 딱 두 개의 끊어진 다리처럼 평생 딱 두 군데서만 본 희귀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유수'입니다. 한 군데는 바빌론이고 또 한 군데는 역시 또 아비뇽입니다.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는 그 유수 아니고 우리에겐 볼 때마다 생경한 유수(幽囚)입니다. 영어로는 captivity로 감금, 억류, 잡아 가둠으로 해석되는 이 말이 전 참으로 요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것이 그래도 사용하다 보면 국어든 외국어든 뜻이 입에 좀 붙어줘야 하는데  단어를 글 제목으로 쓰고 있는 지금조차도 제겐 전혀 안 붙으니 말입니다. 기호학적으로 의미가 창출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역사책을 우리말로 번역하다 보니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겠지요. 근데 유수.. 혹시 저만 그런 건가요?


먼저 발생한 '바빌론의 유수'는 기원전 6세기에 유대 왕국을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가 포로가 된 유대인들을 그들의 수도인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은 이후 60여 년간 노예로 갇혀 살다가 기원전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관대한 그 왕은 노예가 곧 노동력인 그 시절에 아무 조건 없이 유대인들을 풀어주었기에 유대인들은 해방자인 그를 이방인임에도 메시아라 부릅니다. 그는 우리나라 구약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고레스'로 등장합니다. 카이사르가 가이사가 듯 키루스가 고레스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먼저 받아들인 중국의 성경책을 우리말로 번역하다 보니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겠지요.


고대 역사인 이 바빌론 유수는 두 명의 음악가에 의해 사람들에게 더 알려지게 되는데 그중 한 명은 오페라의 왕 베르디입니다. 그는 당시 조국 이탈리아의 답답한 국제 정세를 바빌론의 유수에 등장하는 유대 왕국에 비유하여 오페라 '나부코'를 작곡하게 됩니다. 곡 중 절규하듯 등장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겪은 우리의 정서와도 맞아서인가 나부코는 몰라도 그 비가는 우리 귀에 매우 익숙합니다. 나부코는 유대를 정복한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네브카드네자르)의 이탈리어명입니다.


이 유수를 소재로 한 또 한 명의 뮤지션은 - 아, 한 명 아니고 그룹이네요. - 바로 팝스타 보니엠입니다. 1970년대 말 전 세계에 히트 친 레게풍의 '바빌론의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란 노래에서 그들은 그 강가에 앉아 고향인 시온의 언덕을 울며 그리워하는 유대인을 노래합니다. 우리 세대에서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를 베르디보다 세계에 더 널리 알린 추억의 보니엠입니다.


바빌론은 못 가봤어도 아비뇽은 가봤기에 '아비뇽 유수'는 제게 더 선명합니다. 일단 아비뇽은 제게는 프로방스의 다른 도시들보다 설렘을 더 주는 도시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수도 있지만 아비뇽이란 이름에서 오는 언어적인 흥분감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아비뇽이란 지명이 참으로 예쁘고 전원적이며 낭만적인 동시에 우아하고 담백하면서 고상하게, 때론 동화처럼 때론 그림처럼 아련하게 들리고 보입니다. 불어는 못 하지만 근처 아를, 엑상프로방스, 마르세이유, 칸느, 니스 등 프로방스의 어떤 다른 도시들 이름보다 가장 프로방스적인 이름처럼 느껴지기에 그렇습니다. 유수처럼 주관적일 수도 있겠지만 아비뇽은 제겐 유수와는 달리 기호에 의미가 마구 창출되나 봅니다. 그런 고도에 역사의 본류에서 벗어난 천하지존의 교황청까지.. 뭐 이런 반전까지 더해진 설렘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비뇽 유수는 저의 기호학적 인식상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단어가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석양 무렵 도착한 그 도시, 아비뇽의 첫인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일단 도시를 둘러싼 성곽이 보였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운 성곽 고도로 보이는 것이 아닌 답답한 울타리가 도시를 콱 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랬습니다. 긍정적인 아비뇽보다 부정적인 유수가 먼저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둠이 찾아왔고 왠지 모를 그 답답함은 그다음 날에도 이어졌습니다.



아비뇽 유수의 역사적인 현장, 사진으로만 보아온 아비뇽 교황청 앞에 드디어 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교황의 청사 앞에 선 것이 맞나요? 14세기에 지어졌으니 건물은 고색창연했지만 마치 중세 전쟁 영화에서 봐온 적군의 견고한 성 앞에 선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머릿속에 로마 바티칸이 있어서인가요? 참 많이 비교가 되었습니다. 저는 바티칸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기독교 문명이 아비뇽에도 어느 정도는 보조를 맞추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교황청은 철옹성이나 감옥 같은 밖의 모습처럼 실내 또한 어둡고 답답했으며 어떤 곳은 음습하기조차 했습니다. 시대는 다음 세기에 개화할 르네상스를 얼마 안 남긴 중세의 끝자락인데 말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제 눈엔 세상에 빛을 뿌리는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한 성스럽고 은혜로운 청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제 이곳 교황청은 프랑스혁명기에는 감옥으로, 이후 20세기 초까지는 병영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제 눈과 생각이 이상했던 것이지요. 이곳에 교황이 거주한 기간은 서기 64년 최초로 임명된 초대 베드로 교황 이후 2천여 년 교황청 역사 중 1309년부터 1377년까지의 68년 기간 동안 뿐입니다. 그 유수 1세기 전쯤 우리의 고려 무신정권 대몽항쟁 시기에 왕과 정부가 몽고를 피해 강화도로 옮겨갔다가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갔듯 교황청도 이곳에 그렇게 있다가 본청인 로마로 컴백한 것입니다. 그렇게 40여 년간 강화도에 고려 궁궐이 있었음에도 지금 그곳에 우리가 기억할만한 인상적인 고려의 유적지나 유물은 별로 없습니다. 일제 36년간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의 총독부 건물처럼 후세에 고의로 제거한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그러니 650여 년 전에 교황청으로서 수명이 다한 아비뇽 교황청이 안팎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하고 관리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사용자인 교황이 부재한데 과거의 모습대로 남아있기는 힘들다는 것이지요. 실내를 장식했던 화려한 성물들은 로마로 돌아갈 때 함께 돌아갔을 것입니다. 현재 진행형인 정통 로마 교황청과 역사의 격변기에 잠깐 과거완료형이었던 아비뇽 교황청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아비뇽 유수는 우습게도 왕의 빚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유수의 집행자인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통일 정책을 폈습니다. 통일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통해 얻어지는데 방법은 당연히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통일의 방해 세력은 잉글랜드와 그와 연계된 오늘날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였습니다. 전쟁은 그때나 지금이나 돈의 문제인데 그에겐 전비가 모자랐습니다. 그는 모자라는 돈을 충당하기 위해 성직자에게 과세를 명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종교인 과세 논쟁이 14세기 초 프랑스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강력한 왕은 삼부회를 소집하여 법안을 통과시켰고 교회의 수장인 로마의 교황은 칙령을 들이대며 맞섰습니다. 과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교황이 차가운 눈밭에서 굴복시켰던 '카노사의 굴욕'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2백 년 넘게 별 소득 없이 벌인 십자군전쟁으로 교권은 약해졌고 왕권은 강해졌습니다.


필립 4세는 저항하는 당시의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로마 남동부 교황의 별궁이 있는 아나니에서 체포하고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 이단으로 몰아세웁니다. 권모술수가 능한 왕의 심복 노가레가 그 일을 담당했습니다. 교황은 하찮은 왕의 가신인 그에게 3일 동안 감금되고 따귀를 맞는 등 수모를 겪게 됩니다. 역대 교황을 4명이나 배출한 교황의 도시 아나니에서 교황은 프랑스인에게 최대의 수모를 겪은 것입니다. 결국 보니파시오 8세는 화병으로 한 달 후 선종하게 되고 콘클라베를 통해 베네딕토 11세가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그 역시 단명으로 8개월 만에 선종하게 됩니다.



이에 필립 4세는 그의 수하인 보르도 대주교를 교황으로 임명하고 로마가 아닌 프랑스 땅 리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게 합니다. 로마 바티칸을 확실하게 누를 찬스를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론강 남부, 당시는 그 강을 경계로 시칠리아 여왕의 땅이었지만 프랑스의 지배력이 강한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청 공사가 시작됩니다. 정상적인 교황청 공사가 아닌 유수로 비롯된 건축인지라 침략에 대비한 견고한 요새 양식으로 설계를 하고 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95대 교황인 클레멘스 5세를 시작으로 아비뇽 교황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후 그곳에서는 6명의 교황이 더 배출되었습니다. 그들의 국적은 모두 프랑스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아비뇽의 교황 잡아 가둠, 아비뇽 유수의 전말입니다.


※ 상기 글은 인터넷 정론지 뉴스버스 2021. 0821. 0856에 게재된 글입니다. 3주말 연속 3부작 예정입니다.


http://www.newsverse.kr/news/articleView.html?idxno=366






작가의 이전글 도서관을 사랑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