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천년의 어둠을 깬 르네상스 시대를 빛낸 예술가들 중 3인을 뽑으라고 하면 대다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산지오 라파엘로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래서 르네상스 3대 거장이라 불리는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분류는 누가 시작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대에 활동했던 예술가들이 모두 모여 콘테스트를 통해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가린 것도 아니고, 후대에 권위 있고 공신력 있는 르네상스 평가 협의회가 열려 당시 활동했던 모든 예술가들을 놓고 3등까지 석차를 매겨 선정한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 3인이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충분히 그런 칭송과 영예를 누릴만한 예술적 성과를 남긴 거장이라는 것엔 이견이 없지만 이 글을 열자마자 불현듯 저의 요상한 궁금증이 도져서 든 생각입니다. 누가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고 그것이 어떻게 공인되어 우리가 과거 학창 시절 시험 문제에 틀리지 않기 위해 그렇게 달달 외웠는지 말입니다.
실은 어떤 분야에서 이런 식의 위대한 3인방 등과 같은 분류는 그 자체로 그렇게 의미 있거나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이룩해 낸 각각의 성과와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것들 간에 서로 연결 관계가 있다면 그것도 분석할 만한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3인방에 경도된 또 다른 이유는 그러면 그 시대 최전방에서 르네상스를 연 지오토나, 최후방에서 르네상스를 닫은 카라바조와 그들 사이에서 활동했던 안젤리코, 보티첼리, 브라만테, 도나텔로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지하에서 이 말을 들으면 섭섭해할지 몰라서도 든 생각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도 살아생전엔 한가락 했다 자부하고 인기도 누리고 평가를 받았던 르네상스의 대가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인이라도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에 비해 라파엘로는 좀 처지는 감이 있습니다. 3인방에서 더 좁게 들어가 르네상스의 쌍벽이라 하면 그를 제외한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를 가리키기도 하니 말입니다. 마치 러시아 소설 문학을 이야기할 때 3인방이라 하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등을 가리키지만 쌍벽이라 하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로 좁혀지고 그런 평판으로 인해 투르게네프가 이들 두 작가보다는 좀 힘겨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라파엘로의 경우는 후대의 평가도 그렇지만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회화 분야에서만 돋보였던 그와는 달리 조각이나 건축, 공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걸출한 역량을 보였기에 그렇게 평가되는 것도 있으리라 보여집니다. 그러데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피렌체를 중심으로 공유했던 이들 3인의 생전엔 라파엘로의 대중적인 인기가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1510~1511
이렇게 높은 명성과 성과로 그들 사후에도 역사에서 존경을 받던 이들 르네상스인들은 후대 어느 시점 일단의 후배 화가들에게 비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과 선을 긋자는 어떤 화풍의 사조에 소환되게 됩니다. 그들 사후 300여 년 후 출현한 라파엘전파가 바로 그들입니다.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는 1848년 영국왕립미술원에 수학 중인 존 에버렛 밀레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윌리엄 홀먼 헌트 등의 젊은 화가들이 말 그대로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그림 운동을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라파엘로 한 사람만을 호출해 예술의 시계를 그 이전으로 돌리자는 형제회를 조직했지만 실상은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3대 거장은 물론 위에서 열거한 모든 르네상스 화가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새로운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중세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구현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이유는 중세의 예술이 그 대상이 인간이든 자연이든 그것들을 가장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복고주의와 함께 사실주의는 라파엘전파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그 지적은 맞습니다. 르네상스는 인본주의의 부활로 자유로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추구하여 인간과 자연을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비드> 상이나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에서 보이는 남녀는 가장 이상적인 비율과 잘생기고 아름다운 모습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빈치의 노트 속 인체의 가장 완벽한 황금비를 보여주는 스케치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실제 세상엔 그런 사람은 아주아주 극소수입니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라파엘전파의 화가들은 라파엘로가 아름답게만 그린 <성모> 시리즈의 모습에서도, 그리고 <아테네 학당>의 많은 인물들의 모습과 그 배치와 숨겨진 상징에서도 그런 부자연스러움과 비현실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트루비우스의 이론에 따른 인체 비례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1490
그래서 그러한 것에 반기를 든 라파엘전파의 화가들은 신성의 영역인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엄마인 성모 마리아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아래는 로세티의 작품 중 하나인 <수태고지(Annunciation)>입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기독교에서 매우 의미 있게 다루는 주제라 그 시대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당연히 수태고지를 받아들이는 침착하고 자애로운 마리아의 모습과 그것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인 날개 달린 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이 매우 성스럽게 표현되었습니다.
하지만 로세티의 작품 <수태고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다가 깨 겁에 질려 벌벌 떠는 한 소녀의 모습이 보일 뿐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도 어디에 두고 왔는지 그가 천사임을 보여줄 날개를 장착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천사임을 암시하는 것은 몸이 바닥에서 살짝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임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천사와 마리아의 머리 뒤 후광(Halo)인데 그것도 최소한 작고 빛도 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는 처녀에게 아기를 배게 될 것이라는데 겁내지 않을 처녀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녀는 당시 요셉이라는 성실한 목수 청년과 정혼한 상태였으니 더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로세티의 작품 아래 그림들은 똑같은 수태고지를 그린 르네상스의 라파엘로와 다빈치의 그림입니다. 확연히 차이가 날 것입니다. 매우 성스럽고 은혜롭지요.
<수태고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50
<수태고지>,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
<수태고지>, 라파엘로, 1503~1504
다음은 라파엘전파의 다른 브라더인 밀레이의 그림입니다. <부모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인데 역시 또 전혀 성스럽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요셉을 따라 목수 일을 했던 그의 집안을 묘사했는데 이 그림은 당시로선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상되듯이 이 그림을 보고 당시 영국의 인기 작가였던 찰스 디킨스는 광분하며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성 가족을 술주정뱅이와 빈민들로 묘사했다며 신성모독이라고 강하게 비판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집안이 왕족도, 귀족도, 부자도 아닌 나사렛의 허름한 목수집이니 온 식구의 생존이 걸린 생업에 모두 이렇게 매달리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10여 세의 어린 예수는 못에 찔렸는지 엄마 마리아가 볼에 뽀뽀하며 호호 불어주고 있습니다. 아빠 요셉도 고개를 숙여 그를 캐어하는 모습은 당시 여느 가정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것이 천하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도 말입니다. 이제 비로소 사람들은 제대로 된 예수의 어린 시절 집을 구경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는 물론 이전 르네상스 시대에선 볼 수 없던 예수의 생가 모습입니다.
<부모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존 에버렛 밀레이, 1851
이번엔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영향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밀레이의 다른 작품 <오필리아>입니다. 먼 곳을 응시하듯 두 눈을 뜬 채로 물에 떠 죽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밀레이는 원작에서 묘사된 그녀의 죽음과 가장 근접한 오필리아의 죽음을 연출하기 위해 먼저 배경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 배경을 그리기 위해 그는 런던 교외를 샅샅이 뒤져 저 로케이션을 발견하고 몇 달 동안 자연과 사투하며 수초와 웅덩이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오필리아의 죽은 모습을 연기할 모델을 수배해 그녀를 물에 빠트리듯 욕조에 뉘여 그의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난방이나 온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모델은 무지 고생을 하였을 것입니다. 프로 정신을 발휘해서 버텨냈겠지요. 셰익스피어가 이 그림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격하게 칭찬해주었겠지요. 라파엘전파가 추구한 사실주의의 구현이었습니다.
<오필리아>, 존 에버렛 밀레이, 1851
이렇게 라파엘전파를 대표하는 쓰리 브라더스의 작품을 보았듯 그들은 사실주의와 복고주의를 그들 사조의 생명으로 알고 그들이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의 매너리즘에 빠진 영국의 화단에 찬반양론의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이런 사조가 유행이었는지 바다 건너 유럽 대륙의 메인 사조를 이끌던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전주의, 낭만주의에 이어 사실주의가 출현하였습니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이전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과는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그림에 등장시켰습니다.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화가들이 주로 왕족이나 귀족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나 역사적이고 극적인 소재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면 사실주의 화가들은 일반 평민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험블하고 지저분한 모습을 주요 소재로 삼았습니다.
쿠르베는 채석장에서 인부들이 힘겹게 작업하는 모습을 소재로 <돌 깨는 사람들>을 그려 사실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어서 도미에는 <3등 열차>란 작품에서 역시 또 팍팍하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3등석에 앉아 생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퀭한 승객들의 눈에서 그들의 고단한 생활이 유추됩니다. 이렇듯 같은 사실주의를 추구했지만 바다 건너 영국의 라파엘전파와는 다른 그들이었습니다. 대륙의 사실주의엔 복고주의는 없었으니까요.
<돌 깨는 사람들>, 쿠르베, 1849
<3등 열차>, 도미에, 1864
그런데 왜 그 브라더들은 그들의 사조를 라파엘전파라 불렀을까요? 정확한 저의 의문은 미켈란젤로도 있고 다빈치도 있는데 왜 하필 그중에서 라파엘로만을 콕 집어서 그렇게 희생양의 간판으로 내세웠냐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전파, 다빈치전파 등 이런 식으로 그들을 호출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라파엘로의 의문의 1패입니다. 더구나 라파엘로 그는 그들 중 막내로 태어났고 그들과는 달리 37세에 죽음으로써(1483~1520) 가장 먼저 죽은 애처로운 천재였는데 말입니다. 맏형 레오나르도는 67세까지 살았고(1452~1519), 미켈란젤로는 89세까지 살아(1475~1564) 당시로는 천수를 누렸습니다. 혹시 라파엘전파가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엔 라파엘로 인기가 가장 좋아서 그를 간판으로 내세웠을까요? 생전에 높은 인기를 누렸다고 하니까요. 아니면 그들의 작품 중 회화만 딱 떼어내서 상대적으로 다작인 라파엘로를 저격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을까요?
이것은 저의 추측입니다. 물론 위의 이유도 저의 추측입니다. 일단 저는 라파엘로의 외모를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초상화입니다. 그의 외모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와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서구 역사상의 예술가라면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근엄한 얼굴에 긴 수염 등으로 아우라가 빛나는 그런 얼굴..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얼굴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얼굴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혼으로 살다 노총각인 37세에 죽었으니 그 전 모습일 텐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너무나도 매끄럽고 핸섬한 외모입니다. 700여 년 전 그가 직접 그린 자화상인데 패션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시선까지도 전혀 옛날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마치 요즘 시대 우리나라 아이돌 뺨치는 외모입니다.
아래 그림은 그들 르네상스 3대 거장의 초상화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식 속의 초상화 전형과 비전형의 대조가 그들 3인의 얼굴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라파엘로는 21세기 인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16세기에 가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또 혹시나 1848년 같은 뜻 아래 모인 밀레이, 로세티, 헌트 등은 그들 형제회의 이름을 작명할 때 이런 르네상스 대가들의 자화상을 보고 라파엘로를 가장 르네상스적으로 생긴 이상적인 인물로 보고 그를 대표 선수로 선정하여 그의 이름을 앞에 올린 것은 아닐는지요? 자화상이니 그가 그 자신을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실적이지 않게 미화해서 그렸다고 약간의 의심을 하면서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선 긋기용 작명은 후대에 라파엘로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라파엘전파를 접하면서 "대체 어떻게 그렸길래" 하며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었니까요. 제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라파엘로> 자화상, 1506
<미켈란젤로> 초상화, 다니엘 볼테라 (동시대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 1510~1513
1520년 37세의 라파엘로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은 바티칸에서 거행되었는데 당시 교황인 레오10세는 신께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천사를 지상에 잠깐 내려보냈다가 데려가셨다고 할 정도롤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라파엘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