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arm stor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캣 Dec 02. 2018

필 아저씨네 농장, 어쩌면 내가 오래오래 살고 싶은 곳

유기농 채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참 행복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그날 난 지각을 했다. 


그 건물은 구조가 특이해서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1층이 아니라 3층이 나온다. 크고 작은 파티나 중요한 발표가 있을 때 사용되는 홀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할 곳은 1층에 있어서 그 홀을 가로질러 계단을 두 번이나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난 마음이 급했다. 지각을 하면 일단 모두에게 미안하고, 또 1분만 늦어도 바로 점수를 깎는 말라깽이 조교에겐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핑곗거리를 만들까 했지만 결국 씩 웃으며 들어가기로 했다.      


1층 도착. 수업이 있는 교실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불투명 유리로 만든 슬라이딩 도어 안쪽에 있다. 스르륵.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문을 열고 삐죽 고개를 들이미는데 몇몇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누구지?’ 

가능한 한 빨리 상황을 파악하자. 다행히 저 편에 내가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고랭지 배추처럼 생긴 안경 쓴 남자 선생과 녹색 이파리가 알린 길쭉한 홍당무 같은 여자 조교다. 그 외엔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다들 초여름 텃밭 채소처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트처럼 붉은 얼굴의 대머리 아저씨는 파프리카처럼 통통하고 땅딸한 중년의 여자와 볼 살이 옴폭하게 들어가도록 씩 나를 보며 웃었고, 그 뒤엔 키가 크고 마른 남자아이가 뻘쭘하게 서서는 볼과 이마에 난 여드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까딱했다. 덩굴에 매달린 오이 같은 아이였다.     

        

"어서 와! 이리로 와서 앉지.“    

 

배추 선생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난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그날 수업은 책 대신 맛있는 음식 먹기였다. 두꺼운 책이 잔뜩 올려져 있던 책상 위엔 맛난 음식이 가득했다. 배추 선생은 참기가 힘들었는지 내가 나타나자마자 잽싸게 오목하게 생긴 흰 접시를 집어 들고 수프를 담기 시작했다. 모두들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지각은 이래서 하면 안 된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먹기 직전, 그때가 가장 행복하니 저의 지각은 여러분의 수업을 위한 양념으로 생각해 주시고 용서 부탁드립니다. 오늘 수업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난 모두에게 꾸벅 절하며 큰 소리로 말한 뒤 배추 선생이 한 대로 접시를 들고 수프를 담았다. 다행히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수업은 시작됐다.      

오목한 접시에 담은 수프를 한 입 먹자 난 행복해졌다. 궁금했다. 이건 무슨 수프지? 처음 보는 건데? 그러고 보니 다른 음식들도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걸쭉하지만 부드럽고 상큼한 수프는 햇빛을 받은 엘도라도의 황금 탑처럼 반짝였고, 작은 글씨가 소복하게 박힌 갈색 빵에선 이른 아침 대도서관의 향기가 났다. 검은색의 넓적한 자기에 담긴 신기한 채소도 있었는데, 줄기는 둥글고 끝은 뾰족한 심이 나 있어 씹을 때마다 오독오독 연필 씹는 소리가 났다. 수프랑 빵, 그리고 연필 채소 스틱을 몇 개 담은 다음 난 창가에 있는 빈 의자로 가서 앉았다. 당근 조교가 빵을 오물오물 씹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는데 그녀도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행복이다. 늘 까칠했던 그녀마저 웃게 만들다니.     

 

"오늘 수업은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에요."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음식 맛은 기가 막혔다. 수프와 빵, 채소 스틱을 먹으며 재료가 뭘까 따져 보았다. 일단, 확실한 건 수프엔 어떤 치즈가 충분히 들어있는 듯했다. 감칠맛 나면서도 신선한 수프 맛은 분명 어떤 치즈로 인함이었다. 무슨 치즈지? 잘 모르겠다. 일단 패스. 글씨 때문에 거칠어 보이는 빵은 의외로 촉촉하고 부드러워서 손으로 뜯어먹기에도 적당했고 또 잘게 찢어 수프에 적셔 먹어도 살살 녹았다. 특별한 가루를 썼을까? 조금 남은 수프 국물에 빵을 넣어 싹싹 발라 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가 깨끗해졌네. 

     

“어쩌죠? 잘 모르겠어요. 먹긴 잘 먹었는데.”

“맛은 어땠나요?”

“끝내줬어요! 최고요! 뭐로 만들 거예요? 이 수프랑 빵이랑?”

“하하! 이제 그게 뭔지 알아봅시다. 자, 다들 다 먹었으면 밖으로 나갈까요?”     

 

밖으로 나온 우리는 기분이 좋아 고깔모자를 쓰고 기념 촬영을 했다.      


“나무 열매로 만든 과자 고깔이에요. 무슨 열매인지 맞춰봐요.”     


수업의 연장이었지만 기분 짱이었다. 시나몬 향에 바닐라를 살짝 섞은 것 같은 향이 솔솔 풍기는 고깔은 짧은 단발인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맞았고 움직일 때마다 비뚤어지지도 않아 난 당분간 그 이상한 고깔모자를 계속 쓰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모르겠어요. 수프랑 빵이랑 채소 스틱이랑 고깔까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내 말에 배추 선생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기분은 어떤가요?”

“너무! 좋습니다!!”

“하하, 그럼 됐어요. 충분해요.”     


수업을 마치고 난 필 아저씨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저씨의 차에는 오늘 아저씨의 농장에서 머물 관광객들이 이미 가득 타고 있다. 아, 필 아저씨가 누구냐면, 사실 필 아저씨는 아까 교실에 있던 안경 쓴 배추 선생이다. 이제 학교를 나왔으니 난 다시 그를 선생이 아닌 필 아저씨라 부른다. 필 아저씨의 집은 나무 박스랑 버려진 깡통, 헌 옷과 각종 플라스틱 등 재활용품들로 만든 농장이다.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 중엔 쓸만한 게 많아 아저씨의 농장은 자끄만 커져가는 중이고 벌써 집이 세 채다. 그중 한 곳에는 필 아저씨네 가족이 살고 나머지 두 개엔 농장을 찾는 게스트들, 그리도 나 같은 장기 거주자들이 살고 있다.      


“자, 기분도 좋은데 한 잔 할까?”

“네! 네!”  

   

맛있는 음식으로 잔뜩 업 된 아저씨와 난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가 한 잔 하기로 했다. 오늘 게스트 하우스 담당은 빌리. 마당에 있는 크고 작은 텃밭을 가꾸는 빌리는 얼굴이 동그랗고 불그스름한 볼을 가진 토마토처럼 귀여운 청년이다. 

     

“오늘 딴 거예요.”   

  

그가 가꾼 채소는 단연 최고! 바구니 가득 담긴 야채가 오늘의 안주. 빌리의 바구니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니 처음 보는 노부부가 창가 테이블에 앉아 쿠키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와 필 아저씬 입구 쪽 바닥에 깔린 낡은 털실로 만든 러그에 자리르 잡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스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조용 가방을 풀고 사진을 찍고 있자니 계단을 올라오는 빌리의 나무 슬리퍼 소리가 들렸다. 빌리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와선 우리에게 내밀었다. 

     

“직접 만든 증류주예요. 이 채소들이랑 먹으면 환상이죠.” 

    

아무런 조리를 하지 않고 심지어 씻지도 않은 빌리의 야채와 투명한 증류주를 마시던 나와 필 아저씬 흐음~하고 행복한 비명을 내뱉었다.    

 

"와... 죽인다. 이 야채는 신이 주신 선물이야. 이 증류주도 그렇고."

"아까 먹었던 수프도 그랬어요. 난 눈물도 흘렸다니까. “     


그런데, 필 아저씨와 감동의 멘트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번쩍! 유레카의 순간이 찾아왔다. 


"아! 알았다! 나 알 것 같아요! 그 빵에 들어간 재료도 모두 이 농장에서 가꾼 거죠? 필?"

“하하! 하하하!”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는 필 아저씨의 얼굴엔 행복함이 가득 차 있다. 차가운 바람을 맞고 푸르르 떨리는 고랭지 배추처럼, 아저씨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을 직접 기르고 수확을 하지. 그것이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비결이야.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매일 행복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고."     


하하.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내가 머물고 있는 필 아저씨의 농장이 자랑스럽고, 수업시간에 먹은 수프랑 빵, 야채스틱에 이어 빌 리가 준 멋진 야채와 증류주 덕분에 더 행복했다. 나무 행복했는지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휘리릭 지나갔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부부는 테이블에 앉아 연신 하품을 해대며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앉아 있었다.      


“갈까?”

“네!”     


나와 필 아저씨는 씩 웃으며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일찍 잠을 자야 하는 그들에게 조용한 방을 내주고 싶기 때문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나오면서 난 테이블 위에 있는 빌리의 작은 당근 두 개를 고깔모자 속에 쓱 넣었다. 두 손엔 가방이 들려 있었고, 또 빌리의 당근이 사랑스럽게 유혹을 해서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히! 당근 두 개!”   

  

그런 날 보며 필 아저씬 손가락 두 개를 이마에 올려 굿바이 인사를 하곤 환한 웃음과 함께 집 안으로 사라졌다. 아저씨와 헤어진 뒤 내가 머무는 집으로 행하면서 난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진 모르지만. 참 좋다. 여기.’


하루의 끝인데도 하늘은 맑고 밝고 마당의 야채들은 쑥쑥 자라고 있는 이상한 날씨였다. 그곳은 필 아저씨의 농장. 유기농도시. 날씨도, 사람들도, 음식도, 시간도, 추억도... 모두 유기농인 곳. 어쩌면 내가 오래오래 살고 싶은 곳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