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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캣 Dec 14. 2018

클리포드 씨의 귀향

return to star dust

    

클리포드 씨는 캐나다 원주민이다. 미국에 아메리카 인디언이 있듯이 캐나다엔 원래 이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이 있었다. 그들은 사는 지역에 따라 외모나 문화도 조금씩 다른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1980년대까지 지속된 원주민 말살 정책으로 인해 규격화, 획일화되어 통틀어 애브오리지널 피플(aboriginal people)이라 불리는 소수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나라가 생긴 지 이제 150년을 막 넘어선 캐나다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예사롭지가 않다. 예를 들어, 밴쿠버 공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부조물이 있다. 독수리, 곰, 연어 같은 동물들을 모던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 조각품 앞에서 나는 ‘캐나다 예술가들, 이 정도면 괜찮은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캐나다인 예술가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캐나다 원주민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해야 제대로 된 표현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캐나다 정부는 지난 2008년, 하퍼 당시 수상이 과거 원주민을 괴롭히던 역사를 반성, 치유와 경제적 보상을 약속했고 그 결과 현재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이 원주민이지 우리랑 뭐가 달라?”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가? 외모마저도 몇 세대에 걸쳐 희석되다 보니 이 사람이 원주민인지, 필리핀 사람인지 아니면 남미에서 온 이민자인지 고개를 갸웃할 때가 많다. 나 또한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뭐지?에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었고.  


클리포드 씨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곱게 나이 든 할아버지를 보는 느낌. 참 따뜻하다, 그 뿐이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는 그의 모습은 서부 개척기를 다룬 흑백영화에서 자주 보던 지혜롭고 용맹스러운 추장으로 보였다. 거기에 이제는 청력을 잃어 어떤 말에도 빙긋 웃음으로 답하는 그 미소까지 더해져 대장암과 악성 림프종을 앓고 있는 팔십 대 노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져 보였다.      


“클리포드 씨 말야. 젊었을 때 완전 훈남이었을 것 같지 않아?”

“누구? 아, 모건? 몰라몰라. 훈남은 쥐뿔. 난 그 환자 냄새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아. 도대체 뭘 먹길래 저런데?”     

싸가지 없기는. 내 말을 싹둑 자르다 못해 똥물까지 쫙 끼얹는 테린의 반응에 난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테린은 거침없이 자기감정을 내뱉는 데다 게으른 구석까지 있어 왜 저런 사람이 이런 일을 하지?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곤 했다. 사실 그러든지 말든지 했었는데, 테린과 함께 클리포드 씨의 담당이 되면서부터는 난 더 이상 테린의 버르장머리 도우에 싸가지 토핑을 얹은 싸구려 피자 같은 행동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고 냄새. 모건! 지금부터 좀 씻을게요.”     


다짜고짜 그의 몸에서 이불을 벗겨낸 테린은 연달아 환자용 가운까지 벗겨내더니 차가운 물수건으로 클리포드 씨의 다리 사이를 벅벅 문질러댔다. 

‘앗! 미친 거 아냐? 수건으로?’

그건 절대 금지 행동이었다. 환자의 다리 사이, 즉 생식기와 항문 주위는 지정된 1회용 페이퍼만 사용하는 게 원칙이다. 따뜻한 온수를 써서 부드럽게 닦고 소독할 것. 그건 환자의 인권뿐만 아니라 대소변으로 인한 2차 감염을 방지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인데.      


“끝! 자기가 옷 가운 좀 입혀주라. 나 냄새 때문에 바람 좀 쐬야겠어.”

     

헐. 차라리 다행이었다. 난 테린이 나간 후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시트로 클리포드 씨의 상체를 가리고, 따뜻한 물에 소독액을 탄 다음 페리 페이퍼를 적셔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클리포드 씨. 제가 다리 사이를 좀 닦을게요. 괜찮죠?”     


내 말에 청력을 잃은 그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처럼 귀여운 미소였고 순간 난 그와 내가 호스피스 병동이 아닌, 꽃으로 뒤덮인 넓은 벌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만난 지 1시간도 채 안 돼, 난 그를 정말로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의 미소에선 자연의 향기가 불어나오고 있었고 그건 죽어가는 그의 육체와는 별개의, 아주 먼 어딘가에서 날아온 듯한 향기였다.  

‘우리 엄마도 꼭 이런 얼굴이었는데.’     




한국을 떠나 밴쿠버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난 일을 시작했다. 노인들을 돌보는 가사 도우미 비슷한 일이었는데, 그 일은 내게 썩 잘 맞았다. 그래서 내친김에 학교를 다녔고 자격증을 따 호스피스 전문 간병인으로 일하게 되다.  

  

“정말 오길 잘했어.”     


그런 날 보며 지인들은 적응의 괴물이니, 잠시도 가만 못 있는 불치병 환자에, 심지어는 타고난 역마살이 차고 넘친다는 사뭇 기괴한 표현까지 써가며 수군댔다. 그런가? 내가? 그럼 그러라지. 사실 난 남들이 뭐라 하는 거엔 좀처럼 신경을 쓰지 않는 인간인지라,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도 8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에서 말이 친구지, 내 인생엔 한 톨의 영향도 끼치지 못할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 애들의 말이 영 잘못된 건 아니다. 사실 난 어딜 가나 적응 못해 힘든 적 없고, 집이든 어디든 가만 앉아 있는 걸 제일 싫어하며 그런 성격 탓인지 이사도 여러 번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해 그리 된 건 아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피는 못 속여, 이런 마리 아닌가? 그렇다. 내 피. 난 나를 낳은 우리 모친 이해선 여사를 쏙 빼닮았다. 얼굴이며 하는 짓 까지.    

  

고등학교 다닐 때였나? 한 번은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탁탁 털면서 욕실에서 나오는데 마침 퇴근하시던 아버지와 마주쳤다. 허걱! 순간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선지 기절할 듯 놀라 짧은 신음까지 뱉어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다. 휴우.”

“뭔데?”

“니 엄만... 줄 알고.”     


사연인즉슨, 아버진 순간 나를 엄마로 착각했던 것. 문제는 나의 모친은 그 당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아버진 대낮에 귀신이라도 만난 듯 놀랐던 것이다. 아버지가 딸을 죽은 아내 귀신으로 착각할 정도니, 내가 얼마나 엄마를 빼닮았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젊은 시절 엄마의 외모가 할리우드의 원조 미녀배우 그레이스 켈리를 닮았었다는 증언도 있으니, 물론 엄마의 남편인 내 아버지가 한 말이라는 데서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엄마를 외모적으로 닮은 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문제는 성격이다. 엄마는 평생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다. 1935년생이니, 그 시절 여자라면 대부분이 그러했듯 나이 차면 시집가고, 애 낳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살림 잘 일구면서 평생을 보낸 분이다. 이렇게 말하자니 나의 엄마가 상당히 참하고, 조신했던 듯 들리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일단,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게 맞선 자리였던 건 분명하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어른들이 상대의 집안을 미리 살피고 조건을 얼추 맞춘 다음 주선한 그런 선자리가 아니었다.      


“첫눈에 반했다. 니 엄마가 어찌나 곱든지. 화장을 곱게 하고 머리를 싸악 말아 올렸는데 여배우가 따로 없더라.”

“그래서 바로 결혼한 거야?”

“그렇지. 그땐 연애고 뭐고 없이 맘에 들면 바로 날 잡고 식 올리는 때였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그 말은 실은 진짜 반, 거짓 반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일단 반한 건 맞는데,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즉, 소개팅 첫날 맘이 맞아버린 두 청춘남녀는 곧바로 동거에 돌입했고 그 후에야 고향 집엘 찾아가 우리 결혼합니다 라고 일방적인 선포식을 날려 버렸다는 게 내 부모의 결혼 펙트다. 지금도 자식이 동거 중인 여자 데리고 갑자기 나타나 그 따위로 굴면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게 상식. 하물며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65년 전. 심지어 아버지에겐 고향인 부산에 참하게 생긴 약혼녀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파장이 얼마나 컸었을지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한 마디로 나의 엄마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만난 당시, 엄마는 꽉 막힌 부모 곁을 도망쳐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상태. 그러니까 가출 상태의 열아홉 처녀. 숙식을 해결코자 한 고아원에 들어가 아이들을 돌보다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가출은 아니지만 직장을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때였으니.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두 청춘남녀가 왜 그리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동거를 시작했는지 이해할 만도 하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다 해서 엄마의 도발성이 희석되는 건 아니다. 스물도 안 된 어린 엄마는 그렇게 순식간에 한 남자의 아내가 됐고 곧 엄마가 됐다. 


문제는 나의 친가인 경주 최 씨 사성공파 31대손 장자인 아버지가 짊어지고 있는 엄청난 삶의 무게였다. 엄마가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아버지의 부친이신 나의 할아버지 최경식 씨는 술과 도박, 여기에 여색까지 밝혀 집 안 재산 다 말아 드시고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할머니 황자순 여사는 남편에 치이고 세상살이에 지쳐 몸과 마음이 말린 대추처럼 쪼그라들다 못해 툇마루에 앉아 힘없이 며느리를 맞았다고 한다. 즉, 맏며느리인 엄마가 받들어 모셔야 할 시부모의 상태가 최악이었다는 것.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 상태에서 무슨 기력들이 있으셨던지, 할머니에겐 채 세 살이 안 된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 위로 줄줄이 딸이 여섯. 그러니까 아버지가 장남이고 그 아래로 딸, 딸, 딸... 딸, 그리고 아들. 그렇게 할머니는 21년 동안 출산의 의무를 계속하셨던 거다. 문제는 그 시누이들과 아들 같은 시동생을 보살피는 게 몽땅 나의 엄마 몫이었다는 것.      

난 엄마의 엄청난 적응력을 말하고 싶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한 달음에 도망을 쳤을 그 상황에서 엄마는 엄청난 투혼을 발휘, 맏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엄청 잘 해냈다. 결혼한 지 1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곧바로 어린 삼촌을 데려와 키웠으며, 고모들을 모두 시집보내고 결국 간경화증으로 쓰러진 할아버지를 서울로 모셔와 병수발을 다 든 후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드렸으니.      


아직도 기억나는 한 가지가 있다. 할아버지의 병 수발은 쉽지가 않았다. 당시 난 서너 살 꼬마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할아버지는 정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몹쓸 노인네였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찬이 맘에 안 든다고 밥상 뒤엎기, 수시로 대소변 배출하기, 숨이 꺼억꺼억 넘어가면서도 술 달라고 떼쓰기. 그런 할아버지에게 엄마가 소주병에 긴 빨대를 꽂아 입에 넣어드리던 걸 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다.      

그런 시간들이 나에겐 재미진 일이었지만, 엄마에겐 악성 습진과 하지정맥을 가져다준 힘겨운 나날들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세탁기도, 온수도, 고무장갑도 성인용 기저귀도 없던 시절. 엄마는 그 모든 걸 하이타이라는 이름의 독한 세제 하나만 써서 맨 손으로 해냈다. 엄청난 양의 빨래였겠지. 아무리 할아버지 요에 비닐을 깔아 방수처리를 하고, 엉덩이 아래에 두툼한 기저귀를 깔아본들, 아는 사람은 안다. 더 이상 대소변을 조절할 수 없어 마구 배출해 내는 노인들의 사정거리가 얼마나 넓은지. 결국 엄마의 손은 좁쌀만 한 수포로 뒤덮이게 되었고 그 가려움증과 고통을 참지 못해 엄마는 매일 밤 침이 여러 개 달린 한의사가 준 바늘로 손바닥을 찔러 피를 뽑아냈다. 그 위에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면 뭐하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고함 소린 다시 시작됐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엄마를 몇 년이나 더 괴롭히다가 돌아가셨다.   

   



“클리포드 씨?”

“...”     


다음 날 그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클리포트 씨는 온몸을 구부린 채 침대 구석진 곳에 엎드려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제 나를 향해 웃어주던 해맑던 얼굴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고 테이블 위엔 먹지 않은 진통제가 보였다.       


“왜 약을 안 먹어요? 이것 좀 삼켜봐요. 훨씬 나아질 거예요.”

“...”     


난 더 이상 그에게 약을 권하지 못했다. 먹지 않을 권리. 그에겐 통증을 잊게 해 줄 진통제를 거부할 권리가 분명 있으니까.      

비정형 세포 림프종과 결장암을 앓고 있는 그에게 진통제는 필수. 이곳에 온 이후 그는 진통제는 물론, 일체의 약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건 그가 택한 신념이에요. 우린 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할 임무가 있고.”     


담당 간호사인 에리카에 의하면, 캐나다 원주민 중 일부는 죽음이 가까워져 오면 그 어떤 화학적 치료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천연 진통제로 쓰이는 아편과 유사한 오피오이드였다. 중추신경계에 침투하여 통증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억제, 진통 효과를 나타내는 마약성 진통제. 그렇다. 그 약은 먹으면 먹을수록 더 많이, 더 자주 먹어야 하는 중독 효과가 큰 약품이고 그만큼 몸에 오래 잔류되어 급격히 몸을 손상시킨다. 그런 이유로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에게 투입되는 데.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건데요?”

“원주민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 생각해요. 새나 곰, 연어와 동급이죠. 심지어 나무도.”

“그게 진통제 거부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마약으로 쩐 몸은 자연으로 돌아갈 때 떳떳하지 못하니까요.”     


아, 이런. 그제야 난 클리포드 씨가 죽음 직전까지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그 신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흙으로 돌아갈 몸이니, 손상되면 안 되는 거야. 그 몸으로 인해 땅이, 나무와 물이 오염될 테니.’

그는 자신이 돌아갈 그곳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마지막 시간에 그를 찾아온 극심한 고통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한 내 존경심과 경탄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난 가슴 한 가운데에 미사일을 맞아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은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 신념이라니.     

   



어쩌면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건 엄마의 그 피와 진물 투성이 손과 결국은 다리 위로 커다란 뱀처럼 솟아올랐던 하지정맥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통으로 힘들어하던 엄마의 몸에선 유방암이 발견됐고 그 암은 5년 만에 폐로 전이되어 결국 엄마를 돌아가시게 만들었다. 

의사는 암세포가 엄마의 몸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집에서 죽고 싶어요. 아이들 옆에서."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거부한 채 엄마를 퇴원시켰다. 결국 엄마는 그 후 온전히, 약물치료 없이 고통을 견뎌내다가 한 달 후 돌아가셨다. 그 때 난 열다섯 살이었고 죽음을 앞둔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고 그들에게 뭘 해줘야 하는지를 알기엔 너무 어렸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고통으로 신음조차 못 내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까맣게 탄 엄마의 혀에 숟가락으로 물을 조금씩 흘려 넣는 것뿐이었다. 


"너무 아파서 저렇게 된 거다. 니 엄마..."


엄마의 곁을 지키던 이모는 울음을 멈추질 못했고, 엄마의 눈은 점점 더 초점을 잃어갔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얼굴이나마 난 더 볼 수가 없었다. 2월 어느 추웠던 날 아침, 엄마는 쓰러진 지 석 달 만에 돌아가셨고 담임선생님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내게 엄마의 부음을 알려주었다. 


"니 엄마, 눈도 몬 감고 죽었다. 이게 다 느그들 걱정해서 아이긋나. 아이고 불쌍한 우리 언니..."


엄마의 손은 벌써 차가웠고 감겨지지 않는 두 눈은 내 뒤를 이어 작은 언니가 도착했을 때에야 겨우 감겨졌다. 차갑게 굳은 엄마의 육신은 더 이상 내 엄마가 아니었다. 그럼... 내 엄마는 어디로 간 거지? 멍하니 있는 내 귀에 성당에서 온 사람들의 성가 소리가 들려왔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나니.."        


그후 삼일 밤낮을 난 그들 옆에 앉아 있었지만 내 눈엔 엄마의 까맣게 탄 혀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간 땅은 어떤 땅일까? 메마름으로 갈라진 땅일까? 그들의 기도대로 엄마가 흙으로 돌아갔다면, 그 땅은 어떤 곳일까? 검고 메마른 거친 땅일까? 엄마의 땅은 왜 그런 걸까?     


클리포드 씨는 결국 진통제 한 알 삼키지 않은 채 흙으로 돌아갔다. 하얀 시트로 덮여 있는, 여전히 건장하고 평온해 보이는 그를 보며 난 생각했다. 

‘그는 깨끗한 흙이 되었을까?’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나니...”  

        

영혼이 떠난 그의 육식 옆에서 우리는 조용히 기도했다. 그는 그가 떠나왔던 오염되지 않은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엄청난 고통마저 견뎌내도록 만든 그의 신념이 어디서 온 것이든, 그의 신념은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고 우리는 그런 이유로 그의 마지막 날들을 꼭 기억해야 한다. 평생을 자연의 일부로 살고 결국 그의 흙으로 돌아간 클리포드 씨의 귀향을. 그리고 평생을 씩씩하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이제는 저 너머 우주의 어느 한 곳의 먼지가 되었을 나의 어머니, 이해선 씨의 귀향을. 


엄마의 죽음 후 난 나이를 먹었고 이제 죽음을 데하는 나만의 신념을 갖게 됐다. 그들이 어디서 왔든, 어떤 땅으로 돌아갔든, 우리 모두의 귀향은 결국 우주 먼지가 되어 우리가 왔던 그 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에겐 돌아가야 할 별이 있는 거라고.     


We are all made from star dust and we will all return to star dust, like cosmic palind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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