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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캣 Jan 30. 2019

꽃은 리스로 오래 남을 수 있죠

for Rosemary Morrison

"제발 날 소중히 대해줘. 난 너무 연약하단 말이야."

"내 머리엔 손대지 마. 아, 안돼. 물이 닿으면 웨이브가 망가진단 말이야."

"아니지, 비뚤어졌잖아. 이렇게, 똑바로, 반듯하게 해야지."

"침대 머리를 조금만 더 세워줘. 아니, 너무 많이 말고 아주 조금만. 아니 그것보단 많이. 그래 바로 그거야."

"커피엔 설탕을 네 스푼 넣어줘. 우유는 큰 스푼으로 하나. 더 많아도 안 되고 적어도 안 돼. 딱 그만큼이어야 해."


로즈메리 할머니의 주문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하며, 동시에 철저히 자기 자신의 기호에 맞춘. 그래서 처음엔 까탈스러운, 왕비병 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인 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정말로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날 이렇게 소중하게 대해 주다니. 신께서 널 보호하실 거야."

"음... 네가 만든 커피 정말 좋아. 어쩜 이렇게 딱 내 입맛에 맞게 잘 만들었니."

"날 깨끗하게 해 줘서 고마워. 이제야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닦아 준 틀니 덕분에 입 안이 상쾌해. 조금 전까지 별로였던 기분이 좋아졌어."


할머니는 인사성도 아주 바른 분이었다. 뭐랄까. 시녀의 시중을 받지만 언제나 깍듯하게 감사히 마음을 표현하는 예의 바른 여왕. 


할머니의 방은 다른 방들과 달리 예쁘고 정갈했다. 롱 텀 케어 퍼실러티. 죽음을 앞둔 노인환자들이 기거하는 곳. 정신줄을 놓아버린 노인들의 물건들은 짝이 맞지 않거나 색이 바랬거나 심지어 너덜너덜한 것도 있다. 정신이 멀쩡하다 하더라도 인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는 그들에게 꾸밈이나 장식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 그들의 방은 어둠이 내려앉은 황량한 사막 같기 일쑤다. 매니저의 허락이나 가족의 요청 없이는 외출조차 불가능한 그들이기에 누군가에겐 감옥이 될 수도 있는 곳. 


하지만 로즈메리 할머니는 달랐다. 곱고 깨끗한 꽃무늬 이불과 레이스가 달린 베개, 창가에 놓인 노란 장미꽃 화분과 바로크 풍의 화려한 거울. 환자 전용 뒤트임 옷이 아닌 부드러운 고급 면 잠옷을 입은 채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할머니에게 그곳은 자신만의 성이었다. 


그래서일까? 난 로즈메리 할머니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동화 속 여왕이 사는 성으로 초대된 느낌이었다. 품위 있는 여왕의 시중을 드는 시녀로서 나 또한 할머니를 정성으로, 예의를 갖춰 대했고 그런 보살핌의 시간은 황량한 감옥에서 보내는 다른 시간들에 비해 한결 기분 좋게 흘러가곤 했다. 


"장미 좋아하시나 봐요? 이번엔 핑크색이네. 너무 예쁘다."

"오호~ 그렇지? 장미뿐만 아니라 난 꽃은 다 좋아. 아름답잖아."

"노란 장미는 죽었어요?"

"아아니."


할머니는 씩 웃으며 핏줄이 파랗게 솟은 가느다란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곳엔 노란색 장미가 꽂힌 하트 모양 리스가 걸려 있었다. 


"우와! 리스로 만드신 거예요?"

"응. 내가 한 건 아니고 딸들이." 

"정말 잘 만들었는데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그렇지? 꽃이 시들었다고 버리면 안 돼. 저렇게 리스로 만들면 오래오래 더 볼 수 있어. 잘 말리면 몇 해도 가."


작고 귀여운 하트 모양 리스 곳곳에 박힌 노란 장미를 보자 시든 꽃 한 송이도 소중하게 여기는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난 할머니가 더 좋아졌다. 난 그중 목이 푹 꺾여 앞으로 고꾸라진 장미를 손으로 가다듬어 바로 세우며 생각했다.  나도 해봐야지. 


할머니의 노란 장미 리스가 방문에 걸린 그 주. 기침감기가 밴쿠버 일대를 강타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기침을 안 하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뉴스에 의하면 캐나다 북부의 만년 빙하가 이상고온으로 녹으면서 그 안에 갇혀있는 고대의 바이러스가 밖으로 나와 생긴 일이라 했다. 그 바이러스가 노인들을 지나칠 리는 없었다. 면역력 약하고 미세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노인들은 여기저기서 기침을 했고 산소호흡기 없이는 숨도 쉴 수 없는 환자들이 늘어만 갔다. 밤낮없이 기침으로 하며 숨 쉬기 어려워하는 그들의 몸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우리 모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봐야 했다. 


"로즈메리는 컴포트 집중 케어 부탁해. 가능한 물이랑 주스 많이 마시게 하고, 구강 청결 특히 신경 써 줘."


이틀간의 휴일을 끝내고 출근했을 때 담당 간호사인 리셸이 모두에게 말했다. 컴포트 집중 케어라니. 할머니의 증상이 이틀 사이 심각해진 걸까. 


할머니의 방문에는 노란 장미로 만든 작은 하트 모양 리스 대신 여러 가지 꽃으로 만든 크고 화사한 리스가 걸려 있었다. 꽃과 허브 이파리, 그리고 리본과 작은 카드까지 달린 대형 리스. 난 조용히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목이 앞으로 푹 꺾인 로즈메리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방에는 고농축 산소를 공급하는 대형 컨테이너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할머니의 코에는 compressed-oxygen breathing 관이 삽입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모습은 며칠 전 내가 손으로 잡아 주었던 그 노란 장미처럼 보였다. 목이 꺾인 채 앞으로 숙여진, 마른 장미. 웨이브가 사라진 머리카락에 더 이상 여왕의 기품은 없었으며, 레이스가 달린 부드러운 면 잠옷 대신 입고 있는 밋밋한 환자용 가운을 입은 할머니는 이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주문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로즈메리 할머니. 어서 기운 차리셔야죠. 다들 할머니 보고 싶어 해요."


맘 같아선 난 할머니의 꺾인 목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꽃이 아닌 할머니의 목은 그 누구도 바로 세워줄 수가 없었다. 얼마나 힘들까. 90도로 꺾인 가느다란 할머니의 목을 부드러운 타월로 닦아주며 난 아마도 딸들이 가져다 놓았을 화사한 리스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할머니는 이틀 후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여왕의 성도 사라졌다. 방을 화사하게 장식하던 꽃무늬 침구도, 창가의 꽃화분도, 그리고 문에 걸려 있던 리스도. 동시에 그 방은 칙칙하고 황량한 황야처럼 바뀌었다. 할머니만 사라진 게 아니라 할머니가 만들었던 공간이 사라졌고 그리고 할머니가 있었던 시간들도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난 인간의 죽음을 소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소멸. 꽃이 시들고 목이 꺾이듯, 인간도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중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바로 세운 다음  리스로 만들어 문에 걸어두고 싶은 그런 소멸도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 더 기억하고 싶은 삶. 나에게 로즈메리 할머니는 그런 분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 그건 나만의 리스 만들기다. 두고두고 기억할 수 있는 나만의 보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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