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膿湯 설농탕
쇠머리, 쇠족, 사골, 도가니, 지라, 유통 등 온갖 잡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우설은 따끈한 물에 튀하여 표면의 불순물을 제거한다. 큰 솥에 물을 끓이다가 갖은 고기를 넣고 우르르 끓어오르면 소쿠리에 쏟아부어 물을 버린다.
다시 찬물을 붓고 푹 고면서 거품을 걷어 내고 파, 생강, 마늘 등을 함께 넣어
끓인다. 고기가 적당히 무르면 수육으로 썰어 놓는다. 간을 미리 맞추지 않으며
소금, 굵은 고춧가루, 후춧가루, 썬 파는 따로 곁들인다.
“자네, 이번 사건 너무 느슨하게 대하는 거 아닌가?”
“느슨하다….”
“아니면 말 못 할 속내라도 있는 걸인가? 그럴 테지. 그렇지 않고서야 달단 놈을 그리 무심히 지나칠 수는 없겠지. 안 그런가?”
“….”
그렇다. 홍중의 말이 맞았다. 최정보는 옥택을 느슨하게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건 무심은 아니었다. 최정보는 달단과 거골장 사이의 연계를 발견했고 옥택을 강하게 밀어붙여 자백을 받아냈어야 했다. 심문이라면 능히 조선 최고인 최정보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기회를 지나치고 있었다.
“어라? 무슨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겐가? 죄 앞에선 왕족도, 권력도 없다고 말하던 내 바위 같은 친우가 어찌하여 이리된…?”
“이보게 홍중.”
“그래, 뭔가 있는 거 맞지? 어여 말해 보게. 내 답답해 죽겠네.”
“만약, 그 장소에 옥택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일세.”
“그 장소?”
“유황이 난자당한 그 현방 말일세.”
“뭐야, 그럼 거기에 옥택이 있었던 건가? 그런 거야?”
“아직 그건 확실치 않네. 심증은 있으나… 하지만 설사 그곳에 옥택이 잇었더라도 그건 그 아이의 의지가 아니었다네. 자네도 알지 않는가. 달단의 우두머리는 옥택이 아니라 비안정일세. 옥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명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당치 않은 말일세.”
“?”
사건을 너무 느슨하게 대한다는 말 한마디에 최정보의 답이 길어졌다. 눈치 빠른 김홍중이 최정보의 이러한 흔들림을 놓칠 리가 없었다. 최정보를 쳐다보는 김홍중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작금의 상황이라면, 최정보는 옥택에게 비호감을 넘어 적대감을 가져야 했다. 그런데도 최정보는 난폭한 짓을 한 달단 청년을 두둔하고 나서다니. 범행을 입증하는 증좌나 심지어 아무런 심증이 없이도 죽이거나 멀리 국경 밖으로 추방할 수도 있는 한성부 좌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정보는 첫 번째 만남에서 그를 문책하지 않았고, 유백증의 집에서 난설의 말만 듣고 그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유황에게 옥택을 인사시키고 안채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 뜨끈한 소고기 탕까지 한 그릇 먹이고서야 돌려보냈다. 그리고 지금, 최정보는 설사 옥택이 범행 현장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으니 문제 될 게 없다는 투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고 있다. 이십 년의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친우이자 조선 제일의 순발력을 자랑하는 서풍 김홍중을 상대로. 김홍중은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최정보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누군가에겐 털어놓고 싶은 건 아닐까라는.
“정보 자네⋯ 혹 그 녀석을 상대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일을 꾸미다니. 허허.”
“그렇지? 하하.”
김홍중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눈치 빠른 친우의 적절한 반응에 최정보도 입을 닫았다. 무릇 말이란 건 입을 닫아 가두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바로 옥택에 대한 말을 아껴야 할 때였다. 어떤 사소한 말로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것이 그의 출신이니 말이다.
사실 유황을 저 지경으로 만든 범인을 색출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유황이 양반이나 세도가가 아닌 거골장의 아들인 데다가 어찌 되었든 유황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까. 하루에도 한성에서만 수십 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유황을 둘러싼 살인미수는 주목을 받기는커녕 사건 명부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어젯밤 유백증의 집에서 있던 사건으로 인해 유황에게 쏟아지던 온갖 혐의들은 일단 사그라든 상태. 하지만 최정보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조선의 권력층이 누구던가? 그들은 사백 칠십사 년 간 삼십 사대에 걸쳐 이 땅을 지배했던 관용과 자비의 나라, 고려를 내치고 권력을 차지한 이들이다. 집권 오십 년을 넘어서고 초창기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시간을 지나 이제 막 자리매김을 하려는 이 시점에서도 그들의 피에 대한 본능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채 핏자국이 마르지 않은 칼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 포기란 없었다. 유백증을 내치는 것이든, 거골장을 몰아내는 것이든, 나아가 이 나라의 소고기 유통과 권리를 가져가려는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은 반드시 가지고야 말 것이었다. 권력은 가진 자로부터 나와 가지지 못한 자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휩쓸어 다시 가진 자로 향하는 일방향의 힘이 아닌가.
윗선에서 하달된 대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황 사건을 일단락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정보의 머리는 복잡하고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앞에 세 명의 젊은이가 나타났다. 거의 죽었다 살아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다섯 영혼이 빙의되어 상상도 못 할 힘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거골장의 아들 유황. 분명 고귀한 가문의 피가 흐름이 분명한 하지만 지금은 유백증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묘령의 여자 난설. 그리고 몽골인으로서 이 나라 조선에서 반감과 동시에 애착을 갖고 부유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옥택. 이 셋은 성균관을 마치고 이십 년 넘도록 조선의 관리로서 탄탄하게 살아온 최정보의 삶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최정보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왜 그 세 명의 젊은이를 머리와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근거 없고 이유 없는 현상은 없는 법. 어쩌면 성숙치 못한 이 나라의 한 어른으로서 고난과 역경을 눈앞에 두고 막 걸어가려 하는 젊은이들에게 연민을 갖는 건 아닐까.
‘그들은 모두 이 나라 조선의 자식들이다. 하지만 버려진 자식들이지⋯ 선택된 소수의 자식들만 어버이를 어버이라 부를 수 있는 적자 소수(嫡子小數)의 나라가 바로 조선이 아닌가. 그 소수에 들지 못한 대다수의 서자들은 서럽고 험난한 삶을 통틀어 오기와 한만 남긴 채 결국 역사에 등장하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유황과 난설과 옥택은 그중에서도 가장 서러운 서자들이다. 난 그들을 보며 이 나라의 모순과 서러움을 읽는 것이다⋯.’
다음날.
오전 내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두통을 앓던 최정보가 어른 점심을 대강 들고 산책이나 하려고 한성부를 막 나오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고함을 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서윤 김훈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나리! 나리!”
“무슨 일이더냐?”
“사건이 또 터졌습니다요.”
“사건이라?”
“예. 우시장 동구에서 주막을 하던 선 씨라는 양인이 있는데 오늘 그곳에 엄청나게 큰 불이 났다고 합니다요.”
“엄청나게 큰 불이라 했느냐? 진화는 되었느냐?”
“일단 급한 대로 포도청에 전갈을 넣었고 의금부 나장까지 몽땅 나서서 진화는 하고 있습니다만 현재까지도 불길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큰 규모라 합니다.”
“우시장에 불이라. 참 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그런데 그것이 이리도 허겁지겁 나를 불러 세워야 할 만큼 큰 사안이더냐?”
“그, 그게요 그곳 주인인 선 씨가⋯ 그만⋯ 화재로 숯 덩어리가 되었는데 그자가 지금 유백증의 집에 있다 합니다요.”
“뭐라? 화재로 상해를 입은 자가 왜 유백증의 집에 있다는 건가?”
“선 씨가 죽기 전에 유황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부득부득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답니다요.”
간밤의 사건으로 머리가 무겁던 최정보에게 이 소식은 한 겨울 추위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듯 매섭게 다가왔다. 유황이라니⋯ 그는 당분간 세상의 입에 오르내리면 안 되는 인물이 아닌가. 어제의 사건으로 겨우 그를 잠시 수면 아래로 끌어내리는 데 성공을 했다 싶었는데. 유황을 노리는 무리는 이 일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다. 필시 그들은 화재와 살상의 죄를 유황에게 뒤집어씌울 것이 분명했다.
“서둘러라. 유백증의 집으로 가야겠다!”
“예!”
언제부터 유백증의 집에 이리도 자주 가게 되었나⋯를 생각해 보던 최정보는 문득 그의 집에 자주 들르는 게 비단 자신뿐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그곳을 더 자주 찾게 된 이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설만 해도 그러했다. 유황의 현방 사건이 있기 전 그녀는 유백증의 집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 날 이후 난설은 유백증의 식객이 되어 지내고 있다. 그녀가 유백증의 집에서 뭘 하고 지내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지만 그 날 이후 한 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유백증의 집은 어제와는 또 다른 분위기로 술렁이고 있었다. 어제의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득 품고 있었다면 오늘의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공포로 질려 있었다. 우시장 선술집에 불이 났고 그로 인해 사람이 몽땅 타버렸다. 이 사실을 모르는 누군가가 유백증의 집 앞을 지났더라면 이른 아침부터 고기를 굽나 하고 의심을 할 정도로 선 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타는 냄새는 이미 유백증의 집 앞에서부터 코를 괴롭힐 정도였다.
“오셨습니까요 나리.”
연이은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유백증이 아직도 여전히 그 꼬장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최정보는 놀라웠다. 조선 제일의 거골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지금 자기네 집 마당에 송장 같은 사람을 들여놓은 사람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유백증의 얼굴은 침착해 보였다.
“선 씨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것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황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인가?”
“아직입니다. 하지만 의원 말로는 아직 숨은 붙어있다 합니다.”
무녀 백지와 유황이 앉아 있던 마당 한가운데에는 까맣게 타 들어가 이미 형태를 알 수 없도록 변해버린 선 씨가 누워 있었다. 얼굴과 사지는 물론,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는 도살 직후 숯불에 그슬린 돼지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이 얼마나 한심하고 연약한가.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아니하고 머리로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가슴으로써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 돼지와 다를 게 없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다⋯⋯달⋯⋯단⋯⋯.”
죽은 짐승처럼 보였던 선 씨가 입을 열자 최정보마저도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자 비로소 그 까만 덩어리가 선 씨임을 상기했다. 누군가 지른 불로 인해 까맣게 타버린 그는 우시장에서 가장 좋은 고기로 만든 푸짐한 소 부속탕으로 유명한 선 씨인 것이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뭐라? 달단이라 하였는가?”
최정보가 선 씨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대고 물었다. 그의 몸은 이미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곧 죽을 것이었다.
“이걸⋯ 꼭⋯ 황에게⋯ 주⋯세⋯요⋯.”
최정보의 손이 까맣게 타버린 선 씨의 손을 움켜쥐자 잔뜩 오그라들었던 손가락이 그제야 펴졌다. 그리고 그 손가락 사이에는 여러 번 접어 작게 만든 종잇조각이 있었다. 언뜻 보기엔 종이라기보다는 선 씨의 떨어져 나온 살점으로 보이는 그건 너무 꼭 쥐어서 단단하게 뭉친 종이였다.
“이보게 선 씨! 정신 차리게! 누가 자네를 이렇게 만들었나?”
“⋯다⋯아⋯알다⋯아안.”
“선 씨! 이보게 선 씨!”
하지만 이미 선 씨의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최정보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은 선 씨의 상태에 집중하느라 최정보의 손으로 전해진 종이뭉치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가엾은 선 씨가 마지막 유언을 한성부 좌윤에게 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 선 씨의 마지막 말은 입에 귀를 바싹 갖다 댄 최정보조차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가늘고 연약한 것이었다. 한양 우시장 한 구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부속물탕을 먹여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선 씨는 그렇게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급작스럽고 처참한 죽음이 왜 일어난 건지, 누가 그를 그리 했는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선 씨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구경꾼들마저도 모두 돌아가고 이제는 일꾼 한 명만이 남아 아직도 남아 있는 선 씨의 자국들 위에 빗질을 하고 있는 그때. 텅 빈 유백증의 마당에 서서 최정보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선 씨는 분명 달단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즉 달단이 유황에 이어 선 씨까지 공격을 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뭔가 이상했다. 그것도 많이. 우시장에서 삼십 년을 넘도록 주점을 해 온 선 씨였다. 선 씨의 주점은 사대부를 포함한 조선의 모든 계층은 물론 거란, 여진, 말갈, 위구르에서 왜인까지 드나드는 과히 한성 우시장의 명소였다. 그런 그가 조선을 드나드는 모든 이방인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훤히 꿰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그리고 그의 입에서 달단이라는 두 글자가 명확하게 나왔다.
왜 달단이 계속 등장하는 것일까? 두 소년의 죽음과 유황 사건을 통해 이어지던 이 질문은 선 씨의 죽음으로 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달단 뒤에 숨어 그들을 조종하고 있다. 자신의 고결한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가진 것 없는 달단인들을 앞에서 소고기와 관련되어 이득을 보는 일반 양인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거골장에 이젠 우시장의 선술집까지.'
최정보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것이 누구이든간에, 그는 조선의 그 누구보다 많이 가진 이가 분명했다. 어쩌면 왕보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유백증같은 양인 거골장이나 선 씨처럼 선술집을 운영하는 상민들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의 신분에 비해 너무도 엄청난 것이어서?
'아니다. 그는 그저 더 가지고 싶은 것뿐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를 줄 모르는 탐욕스러운 육식동물처럼 그저 빼앗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누굴까? 지금의 조선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력한 발톱과 이빨을 가진 이가?'
순간, 최정보의 눈 앞에 희고 창백한 난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설은 누구일까? 왜 그 날, 그 현방에 있었던 걸까?
난설을 만나야 했다. 유백증의 집에 있는 그녀의 사연은 분명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유황과는 어찌 지내고 있느냐?”
난설의 얼굴은 어제와는 또 달라 보였다. 무릇 하루라는 시간은 아무 생각 없이 세 끼 먹고 나면 지나고 마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을 만큼 긴 시간이기도 하다. 난설의 경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을 다른 이에 비해 길고 진하게 사용하는 듯 보였다. 하루 만에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성숙하고 깊이 있는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온지.”
“그가 너를 거꾸로 매달아 모질게 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건 분명 네가 이곳을 떠날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었다. 하지만 넌 아직까지 굳이 그의 옆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궁금하구나.”
“⋯.”
그 순간. 난설은 고개를 들고 최정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 같은 난설의 눈이 뭔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난설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 사연이 무엇이든지간에 그녀가 지금 자신을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가득 담아 바라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최정보는 이 작은 여자를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옥택을 비호하든, 유황과 함께 하든. 앞으로 그녀가 무엇을 하든,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마음이.
“나리, 전 유도령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함께 한다?”
“어제 본 그 사람은 그 날 현방에 있지 않았습니다.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난설은 말이 많지 않았다. 이제 유황을 유도령이라 부르고 있었고 그와의 관계를 묻는 최정보에게 '함께 할 것이다'라는 말로 관계를 정리했다. 젊은 처녀가 남정네와 함께 한다는 건 그의 여자임을 밝힌 것이다. 게다가 최정보가 묻지 않았는데도 옥택의 신변에 대한 정리까지 덧붙여 더 이상의 추궁을 못하도록 했다. 꼭 필요한 말만 했지만 할 말은 다 하는. 최정보는 알고 있었다. 무릇 말이 적은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뉜다는 걸. 하나는 말할 게 없는 경우.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경우다. 난설은 어떤 경우일까? 어떤 사연이 있길래 그녀의 입을 꼭 닫아걸고 눈으로만 말하도록 만든 것일까?
"너무 성급한 대답은 오히려 의심을 사는 법. 다시 얘기하자꾸나."
"..."
난설의 까만 두 눈엔 분명 흔들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이해하려면 먼저 난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다. 난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고집에 그 어떤 회유도 통할리 없는 강단까지 갖추고 있으니 최정보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조만간 다시 들을 터이니, 몸조심하고 지내거라."
"네, 나리."
난설을 뒤로하고 유백증의 집을 나오는 최정보의 눈 앞에 무녀 백지가 있었다. 서윤 김훈의 말에 의하면 백지는 어제 이후 벌써 세 번이나 유백증의 집을 찾았고 마치 이곳을 그녀의 신이 모셔진 성지처럼 살피고 받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섯 영혼의 실체를 몸으로 접한 무녀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최정보와 마주친 백지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유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노비가 되어야 할 팔자를 타고났는데 그걸 거스르다니⋯ 대단한 고비를 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
“저 처녀 말이옵니다. 저 처녀에겐 사내들도 감당치 못할 엄청난 무게의 운명이 실려 있습니다.”
“저 아이를 아느냐?”
“나리. 전 스승님들이 말씀해 주시는 것을 대신 전할 뿐입니다. 제 생각이 아닌 것에 대해 물으시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백지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서늘한 표정을 짓고는 유백증의 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건 마치 접신을 위해 신집으로 들어가는 무녀의 위엄 그 자체였다. 노비가 되어야 할 팔자를 거슬렀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난설이 짊어지고 있는 그 무거운 운명이란 대체 무엇일까? 무녀의 눈에는 보이는 그것을 알아낼 방법은 없을까?
“정말? 그 무녀가 그랬단 말이지? 허허. 거 참.”
“왜? 자넨 뭔가 알고 있는 건가?”
김홍중은 그 사이 뭔가를 알아낸 듯했다.
“자네한테만 알려주는 걸세. 반드시 비밀을 지키게나.”
“알았네. 말해 보게.”
“이름은 허난설. 하루아침에 명망 있는 외척에서 노비로 전락한 명문가의 딸일세.”
“외척? 어느 집안이던가?”
“도산 허 문영의 여식이네.”
“도산 대감?”
그제야 최정보는 무녀 백지의 입을 빌어 나타났던 노인이 기억났다.
... 나는 모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죄로 인해 모든 혈족을 잃은 불쌍한 몸이라네. 평생을 글만 읽고 틈나는 대로 성균관에서 동지사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내 아들이 모반을 일으켰다니⋯ 내 아들 문영은 단 한 번도 나라와 주상을 저버린 적이 없는 충절 넘치는 학자였거늘⋯ 그런 아이를 능지처사라니⋯ 며느리는 곡기를 끊어 자결하고 손녀 아이는 노비로 끌려가고⋯.
그때 백지의 입을 통해 말한 그 노인은 분명 내 아들 문영이라 했다. 그 아들이 바로 허문영 대감? 그렇다면 난설은?
“지금 자네는 난설이 허문영 대감의 여식이라고 말하는 건가?”
“그렇다네. 허난설. 허문영의 외딸이지. 안타까우이⋯ 참 좋은 분이셨는데⋯. 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우리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종종 오셔서 동지사* 격으로 주자학을 강의하시지 않았는가. 목소리가 너무 점잖으셔서 왜 내가 손들고 좀 크게 말씀해 주십사 청했던⋯.”
“아⋯.”
*同知事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직급 중 하나. 오늘날의 교수
최정보는 난설의 부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성균관에서 강의하시던 분 중 유난히 젊고 수줍음을 많이 타시던 탓에 꽃지사라 불리던 분. 조용조용 봄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조용하시던 분.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대역죄인이 되어 홀연히 사라진 허 대감이었지만 정작 최정보는 그 배경이 무엇인지, 그분의 일족이 어찌 되었는지는 챙겨 볼 여유조차 없었다. 가심 한 구석에 아련하게 아파왔다. 그 곱고 강직했던 분이 역모죄로 사약을 받았는데도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 그리고 그 일족들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다는 것이 죄스럽고 후회가 되어 밀려왔다. 그런데, 바로 그분의 딸이 이렇게 나타나다니.
“그런데 말이네. 그게 참 이상타 말일세. 아, 자네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 어찌 그런 분이?”
“대역죄를 지으실 분이 아니었지.”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그런데 그게 말일세⋯.”
김홍중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최정보의 귀에 입을 바싹 들이대고 조용히 말했다.
“내 그 사건을 좀 찬찬히 들춰봤더니, 그게 누가 봐도 모함이라 이 말일세."
"모함?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어찌 그런 말을..."
"아니, 우리 둘만 있으니 하는 소리 아닌가.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잡아가는 건 아지니? 그렇지 내 오랜 친우는 지금 그보다는 내가 알아낸 것들이 궁금할 터이니."
"허험."
"자, 들어보게."
"..."
"선왕*께서 좀 복잡하셨나. 아마도 전하께서 선왕과의 결별을 상징하는 정치적 본보기로서 그분을 택하신 게 아닌가⋯ 싶다네. 뭐 다른 이유도 작용은 했지만 결국 전하를 움직인 건 그 이유였겠지.”
*태종 이방원을 일컬음
허문영의 죄는 모반이었다. 모반. 국가나 군주를 전복할 것을 꾀한 죄.
“평생 집안 담장 밖으로 목소리조차 내보내지 않으신 분이었다네. 허문영 대감이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데 대해 그 누구도 수긍을 하는 이가 없었지만. 시대에 필요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모두들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네. 어린 나라를 청년 나라로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피의 재단에 순결한 그분이 어이없이 바쳐진 것이지.”
어머니 쪽으로 왕족이었던 난설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관노가 되었다고 했다. 일단 모반을 꾀했다는 상소가 올라가고 이에 대해 국법으로 처단하라는 임금의 어명이 하달되기가 무섭게 허문영 대감은 사약을 받았다. 성균관에서 마지막 강의를 한지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은,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기에 대대로 권세를 누리던 양천 허 씨 가문은 대처할 사이도 없이 발칵 뒤집혔다. 허문영 대감은 대를 이어 살아온 그의 집 마당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고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이를 고스란히 지켜본 부인 이 씨는 남편의 처형 직후 혼절, 식음을 끊은 지 보름 만에 끝내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난설의 오라비는 허직은 거제도로 유배를 갔으며, 모든 식솔들은 관노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난설은 강원 감사인 신계우의 아들 신선노와 혼인 말이 오가고 있던 중이었다네. 신계우는 평산 신 씨 시간공파를 이끄는 거물이 아닌가. 이는 즉 난설이 얼마나 힘 있는 가문의 여식이었는지를 잘 알게 해주는 부분이지. 힘 있는 집안끼리의 전형적인 결탁이 진행되고 있었던 걸세.”
김홍중의 입에서 신계우의 이름이 나오자 최정보는 신경이 곧추섰다.
'신계우?'
최정보는 지난해 사헌부 집의*의 정중한 요청으로 신계우에 대한 자료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신계우가 참상 판관으로 재직할 당시의 이런저런 크고 작은 악정에 대한 비밀 자료였다. 신계우는 임금의 외종숙으로 현왕이 제위에 오르기가 무섭게 조선 제일의 권력가로 부상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학식까지 꽤 갖춘 인물로 별시 문과의 정과로 급제를 한 후 참상 판관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청도 군수, 수원 부사, 중추부 동지사 등을 두루 역임한 관록 있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그는 누가 봐도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執義 : 사헌부(司憲府)의 종삼품(從三品) 관직
하지만 그런 신계우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가 조선 제일의 식탐가라는 사실이었다. 조선 건국 후 육식이 허용되면서 적지 않은 사대부들이 식탐가가 되었다지만 신계우의 경우는 거의 병적인 수준의 식탐이라는 게 문제였다. 승승장구하던 신계우가 한성을 떠나 강원감사가 된 것도 바로 그의 탐식이 원인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음식 중 특히 소고기에 굉장한 집착을 보였는데 소 역병이 전국을 강타해 농사지을 소조차 없어 우금령이 떨어진 와중에도 멈추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신계우의 소고기 식탐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다. 매월 초닷새가 되면 신계우의 집이 몹시도 분주해지는데 그 이유는 소를 잡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가뭄이 들고, 폭우가 쏟아지거나 폭설이 내려도 그 소 잡기 행사는 어김없이 치러졌다. 그는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어린 암소만을 잡게 했는데, 그 이유는 그 고기가 가장 연하고 맛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잡은 소고기를 커다란 은쟁반에 담아 놓고 하루 다섯 번씩 구워 먹었다니 신계우의 소고기 식탐은 강원도를 넘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난하거나 건드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임금의 외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외척 권력의 대명사인 신계우라 할지라도 버티기 힘든 사건이 터졌다. 사건은 바로 지난달, 그러니 유황이 사고를 겪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매달 한 마리의 소를 줄기차게 먹어치우던 신계우가 어느 날 소고기 요리가 맛이 없다고 요리사를 매로 치다가 그만 요리사를 죽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죽은 요리사가 신계우의 사노비나 집 안에서 부리던 하인이 아닌 사옹방* 소속 대령숙수**였다는 데서 크게 불거졌다. 양인 계급이지만 궁중에서는 중요한 기술직인 대령숙수를 함부로 데려다가 사적으로 요리를 시킨 것만으로도 문제가 되고도 남을 일인데 하물며 죽이기까지 했으니 이미 신계우의 죄는 국법으로 다스릴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이 사건은 쉬쉬하면서 넘어가는 듯했고 그 와중에도 신계우의 집에선 연일 소고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司饔房 : 조선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이조 소속 관서
**待令熟手 : 이조에 속해 있는 남자 전문조리사. 궁중의 잔치인 진연이나 진찬 때 음식을 만들었다. 세습에 의해 대대로 그 기술을 전수했고, 궁 밖에 살면서 자유롭게 혼인을 하고 궁중의 잔치 때 궁에 들어와 음식을 만들었다
“이보게 홍중. 그 사건은 이조참판 조정래와 이조참의 경중하가 임금께 직접 간언을 올렸다는 점에서도 대단한 일이었네. 신계우가 죽인 대령숙수는 이조 소속이 아닌가. 참의에 참판까지 나서서 목청을 돋우니 여기저기서 그동안 참았던 신계우에 대한 비난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지. 자네 얘기를 듣다 보니 두 사건 사이에 있는 연결선이 보이는 듯하네. 자네 혹시 허난설과 신선노의 혼담 얘기가 들어가 버린 시점이 언제쯤인지 알아볼 수 있나?”
김홍중의 알찬 정보가 들어가자 최정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쩌면 이상덕의 배후에 신계우가 있는 건 아닐까?
“아⋯ 그래! 그럴 수 있겠어. 대쪽 같은 성품의 허 대감이 사방에서 살인자라 손가락질하는 신계우의 아들에게 금지옥엽 딸을 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는 곧 하늘을 찌르는 신계우의 자존심을 건드린 일이었다⋯ 이거 아닌가?”
“그렇지.”
허문영이 사약을 받은 건 혼담이 깨진 후 두 달이 채 안 지나서였다. 그리고 난설이 노비가 되어 가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신계우의 집이 있는 강원도 지역이었다. 최정보가 볼 때 허문영 모반 사건은 아무래도 신계우의 계책으로 보였다.
“이런 음모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네. 그저 흔한 정치 싸움일 뿐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말야⋯ 이건 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혼인을 깼다고 그 보복으로 한 일가를 몰살시키다니. 게다가 며느리가 될 수도 있었던 난설을 자신의 관할 구역 관기로 불러들이기까지⋯ 도대체 이게 과연 글 꽤나 읽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인가? 쯧쯧.”
“관기?”
“그렇지! 난설은 관노의 신분이 되었으니 당연 관기가 될 예정이었을 걸세. 곱디 고운 스무 살 미만의 젊은 처녀인데 관기가 되는 것이 상례가 아닌가.”
노비가 되어야 할 팔자를 타고났는데 그걸 거스르다니⋯.
최정보의 머리에는 무녀 백지의 얼음장 같던 말이 생생하게 똬리를 틀며 맴돌았다. 난설은 그렇게 기생이 될 운명 속으로 집어던져졌던 것이다. 그랬던가. 그래서 그 아이는 그토록 말을 아꼈던 건가. 하긴. 왕실의 먼 외척으로서 안온한 삶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노비로 전락할 뻔한 어린 처녀가 세상에 쏟아낼 수 있는 말이 무어가 있겠는가.
“그런데 정보. 자넨 왜 난설이 유백증의 현방으로 가게 된 것이라 생각하나? 도망을 친 게 아닐까? 그렇더라도 왜 하필 유백증의 현방으로 간 걸까? 정보 자네가 난설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고 나한테 얘기 좀 해주지 않을 텐가? 진짜 궁금하군.”
그렇다. 최정보는 난설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왜 그날 난설은 유백증의 현방에 있었던 건가? 솔직히 열 번도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난설로 하여금 그녀가 겪은 지옥 같은 사건들을 스스로 말하게 하는 일종의 고문이라는 걸, 어쩌면 최정보는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누구라도,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있게 마련이고 최정보의 눈에 난설의 과묵함은 그런 징후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난설을 만나 물어야 했다. 과연 그 굳게 다물어진 입에선 어떤 말이 나올까?
한편 선 씨의 안타까운 죽음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준행 살인죄로 억울한 처벌을 받고 결국 죽고 만 박과 송 두 사내의 사연이 채 잊히기도 전에 또다시 발생한 또 하나의 죽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느끼기에 차고도 넘치는 일이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은 다를 줄 알았어. 근데 이게 뭐야? 고려보다 더 흉측하잖아?”
“나라 이름이 바뀌었다고 못된 것들이 착해집디까? 뭘 바래요?”
누가 봐도 분명 범인이 아님이 확연한 이들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어 결국 죽게 만든 것,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족들 삶의 기반까지 송두리째 빼앗은 것, 그리고 달단인들을 사주해 불을 질러 생사람을 타 죽게 했다는 사실은 민심을 들끓게 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배고픔을 이겨내며 역병과 싸우고 있는데 한편에선 가진 자들이 매일매일 고기나 구워 먹고 몸에 기름기를 채우다니⋯ 역병으로 농사지을 소도 없는 판국에 소고기 잔치가 매일 벌어지는 한양의 상황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담으로 나뉜 전혀 다른 두 개의 세상이었다.
‘내가 허물어야 할 담은 너무나 높아 하늘을 찌르고 지독히도 길어 그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 나는 과연 지금의 이 세상에서 무슨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몇 달 사이 더욱 깊어진 주름이 새겨진 얼굴에 더욱 무거운 근심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최정보는 서고에 앉아 깊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해시가 지나고 자시가 가까이 오자 최정보는 서안의 서랍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작은 주머니를 열자 잘 접어놓은 종이가 나왔다. 최정보는 종잇조각을 펼치지도 않은 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선 가. 자네는 이걸 왜 남긴 건가? 왜 하필 난설에게 남긴 건가? 왜 그 아이에게 짐을 얹어준 건가? 이미 너무나 힘든 아이가 아닌가⋯.”
그건 바로 숨을 거두기 직전 선 씨가 전해준 그 쪽지였다.
雪濃湯
그 날 잡은 소에서 쓸 만한 살점을 다 떼 내고 나면 온갖 잡육이랑 내장이 남습니다요. 이것들을 죄다 모아서 뼈가 붙어 있는 그대로 설렁설렁 찬 물에다가 헹궈서는 그대로 커다란 무쇠솥에 담아서 하루쯤 푹 과야 합니다. 이때 머리며 꼬리, 발톱까지 모두 넣어야 합니다요. 평생을 인간을 위해 일하다 죽은 소는 뼈 하나, 살점 하나도 허투루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소중하고 감사하게 그 모든 것을 다 넣고 눈처럼 뽀얀 국물이 우러나도록 곱니다.
국물이 우러나면 고기를 건져내 따로 둡니다. 국물은 무쇠 솥에서 계속 끓이다가 미지근하게 데워 낸 뚝배기에 국물을 담고 식은 밥을 넣어 토렴을 한 번 합니다. 다시 국물을 붓고 썰어낸 고기와 송송 썬 파를 얹어 냅니다. 고기는 초장에 찍어 먹고 소금 간을 한 밥을 만 국물을 훌훌 마시면 됩니다.
난설 아가씨.
전 오십 평생을 이 탕을 끓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저를, 놈들이 협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놈들 말은 안 들을 것입니다. 아가씨가 있는 곳을 자백하느니 차라리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전 곧 죽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제가 아가씨께 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탕 끓이는 법을 남깁니다. 사람들은 선 씨가 끓이는 진한 탕이라 해서 선농탕이라 부르지만, 전 그보다는 아가씨의 이름에 있는 설자를 넣어 이름을 설농탕이라 지어 봤습니다요. 눈처럼 뽀얀 국물이 있는 이 탕은 사람들이 영원히 아가씨를 기억하게 할 것입니다.
난설 아가씨.
아가씨의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분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뭐라 해도 저는 압니다. 오갈 데 없는 저를 거둬 주시고, 양인 신분으로 풀어주시고, 우시장에 전방도 내주신 분들이옵니다. 덕분에 저는 평생을 잘 살아왔고, 이제 죽어도 더 이상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소는 우리 백성들의 가족입니다.
소는 평생 우리를 위해 일하다가 나이 들어 병들고 쓰러지면 그제야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나를 푹 고아서 잡수세요. 소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마지막까지 모두 내놓고 갑니다.
그러니 붉은 살점만 도려내서 먹어치우고는 내장이며 껍질이며 발톱 같은 것들을 지저분하다 하여 버리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건 일평생을 뼈 빠지게 일하며 나라와 양반들을 위해 세금을 내던 백성들을 늙고 죽었다고 왜구에게 던져주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난설 아가씨.
제가 만드는 탕의 조리법을 꼭 기록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 그리고 저와 함께 한 소들은 이 설농탕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을 그 날, 아가씨가 저를 찾아오셨을 때 드렸어야 하는데 글 짧은 제가 바삐 쓰기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전해드릴 수 있어 감사, 또 감사합니다.
선 농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