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쓰고 햇살이가 그리다 2
illustrator by 햇살
엄마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햇살이에게 엄마는 늘 자기만의 엄마였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엄마에게 ‘햇살 엄마’라고 불렀고, 햇살이 옆에 언제나 있는 엄마였으며, 엄마에게 1순위는 늘 햇살이었으니까요. 의심할 여지라곤 1도 없는 진심 햇살이의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엄마가 햇살이 옆에 있는 시간보다 요술이 옆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니 햇살이 입장에서는 당연히 ‘내 엄마인가? 아닌가?’ 의심과 질투가 생길만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누구 엄마냐고 따져 묻는 말을 들을 만큼 엄마가 뭘 많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엄마는 참 억울할 것 같기도 하고, 또 첫 아이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들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럴 때 엄마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당연히 아기 엄마지.”라고 첫 아이를 놀리는 말을 해 첫 아이를 울리기도 하고, “말 잘 듣는 사람 엄마지.”라고 말해 아이들을 은근히 경쟁하게 하며 엄마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쪽도 상황 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 보다는 좀 더 근본적으로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엄마의 역할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동생이 생긴 현실 앞에 한 명뿐인 엄마를 서로 나누고 함께 공유하며, 마음 상하지 않게 지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훨씬 좋겠습니다. 햇살이의 기억 속에 엄마는 늘 햇살이 엄마였겠지만 엄마도 처음부터 햇살이 엄마였던 건 아니지요. 그래서 엄마는 햇살이에게
“외할머니랑 있을 때는 딸이고, 아빠랑 있을 때는 아내고, 요술이랑 있을 때는 요술이 엄마고, 햇살이랑 있을 때는 햇살이 엄마야.”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고맙게도 햇살이는 엄마가 자기 엄마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분이 풀리는가 싶더니 여전히 요술이에 대한 묘한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네요.
대부분의 아이들도 햇살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한 술 더 떠 “쟤 엄마는 아니고 내 엄마만 해 줘.”라고 말해 엄마를 시험에 들게 하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아이와 잠시 머물러 주며 자신의 곁에 늘 엄마가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너만의 엄마였으면 좋겠구나.”
“엄마는 늘 너의 곁에 있을 거야.”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더 잘 가르쳐주고 싶어서 동생은 가족이므로 엄마가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해시키려 노력하거나, 이 만큼 설명했으면 알아들어야 한다고 이해를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훈육은 의미가 없습니다. 첫 아이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할 테니까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자신의 엄마임과 동시에 동생의 엄마임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 아이가 원하는 것은 동생이 생겨도 여전히 자신이 엄마에게 사랑받는 존재인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첫 아이의 감정에 집중하고 제3자인 동생을 배제한 상태에서 엄마가 첫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겠다는 다짐 정도면 충분합니다.
엄마는 햇살이로부터 받은 ‘누구 엄마야?’라는 질문에 답을 한 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요술이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맥락이 조금 달랐습니다. 요술이와 함께 만난 엄마의 지인들이 모두 엄마에게 ‘햇살 엄마’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지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호칭이지만 듣고 있던 요술이는 마음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엄마는 누구 엄마야?”
“난 요술이인데 왜 ‘햇살 엄마’라고만 해?”
요술이 마음이 이해되지요? 한 번도 요술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계속 ‘햇살 엄마’라고 불렸던 엄마는 요술이에게
“미안. 요술이랑 있을 때에는 ‘요술 엄마’라고 불러달라고 할게.”
라고 말하였답니다.
[오늘의 양육표어 - 정체성을 묻는다면 다양성을 말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