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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n 01. 2021

600년의 배롱나무. 안아 주고 싶은 이유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17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놀고 그림을 그렸던 그리고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낳아 기른 오죽헌의 앞마당에는 600년의 시간을 지켜온 배롱나무가 있다. 


내가 한눈에 배롱나무를 알아본 것은 배롱나무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기억도 없는 어느 수목원에서 처음 만난 배롱나무는 딱하기 그지없었다. 대개 나무라 하면 쭉쭉 곧게 뻗은 가지와 하늘을 다 가리고도 남음이 있어 비도 거뜬히 막아줄 정도로 풍성하고 아름다운 초록잎을 떠올리게 되는데, 배롱나무의 가지는 구불구불 사방으로 흩어져있고 잎은 듬성듬성, 줄기마저 누가 금방이라도 가구로 만들려고 가공해 놓은 듯 속살이 반들거리고 있었다. 박재된 나무 같았다. 


두 번째로 배롱나무를 만났을 때에는 눈에 익숙해서 인지, 구불구불한 가지가 춤을 추는 듯이 느껴져서인지, 배롱배롱 메롱메롱 어린 꼬마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떠오르는 이름을 가진 탓인지 개구쟁이 같았고 다정했다. 


그 배롱나무를 오죽헌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600년의 수령이라고 하기에는 나무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죽헌에 있는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다시 자란 것으로 엄마 배롱나무와 지금의 배롱나무의 수령을 모두 합하여 600년이 되었다고 한다. 모르는 나무들 사이에서 아는 나무 한 그루를 만나 반가웠는지 나는 배롱나무를 안아주고 싶었다.

      


신사임당의 삶을 기억하고 율곡 선생의 시간을 담고 있는 배롱나무. 그 긴 시간 동안 한 곳을 지키며 많은 이들의 삶을 보았을 그리고 함께 했을 배롱나무. 


600년을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아직 50년도 살지 못했고 또 100년도 삶으로 채우지 못할 내가 감히 600년의 시간을 가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반려동물을 키우고 떠나보낸 많은 이들이라면 생명의 시작과 끝을 들여다보고 견뎌내야 하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900년을 산 김신에게 불멸은 행운과 축복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떠남을 지켜보고 홀로 남아야 하는 끝을 알 수 없는 반복되는 고통과 비극이었다. 배롱나무도 함께 있어 좋지만 떠남을 지켜봐야 하는 처연한 마음으로 이곳을 스쳐간 많은 이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600년의 시간을 가졌다면 이런 마음쯤은 다 내려놓고 덤덤하게 지나간 인연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까? 배롱나무 한 그루를 앞에 두고 내 마음을 투영해 본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글에서 ‘자연이 놀랍고 아름다운 까닭은 목련이 쑥잎을 깔보지 않고, 도토리나무가 밤나무한테 주눅 들지 않고, 타고난 천성을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배롱나무는 여느 자연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현숙하게 자신의 천성을 다 하며 그냥 이곳 오죽헌에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세파에 시달리고 감정을 쏟아내고 버리고 안온해지는 과정은 온전히 사람들의 몫일뿐 배롱나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나무가 좋다. 나무의 그 우직함이 근사하다. 어린 새싹으로 있을 때에는 쉽사리 꺾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에게 휴식과 위로가 되고 또 다음 순간에는 감탄과 존경을 받는다. 가만히 한 곳을 지켰을 뿐인데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낸 것이다. 그래서 나무는 지구에서 가장 약한 존재였으나 가장 강한 존재로 우리네 어머니와 닮은 자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도 내가 배롱나무를 안아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배롱나무에 잠시라도 안겨 있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photo by 짝꿍]  



#배롱나무 #오죽헌 #강릉 #강원도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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