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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n 02. 2021

오죽헌. 나에게도 외갓집이 있다.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15

쨍한 하늘 아래 소담스럽게 앉은 오죽헌은 나에게 그냥 '오죽헌'이었다.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을 낳은 곳, 오천 원 지폐에 그려져 있는 곳, 문화재.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낯선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말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이 태어나 자란 곳,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을 낳고 기르던 곳, 신사임당이 하늘로 떠난 뒤 외할머니를 뵙기 위해 율곡선생이 방문했던 곳. 


오죽헌은 바로 율곡 선생의 외가였다.

      


어머니가 하늘로 떠난 뒤 외할머니를 뵈러 외가인 오죽헌에 올 때면 율곡 선생은 외할머니를 뵈러 온 걸까? 어머니를 뵈러 온 걸까?

     

나에게도 외갓집이 있다.


나의 외갓집은 울산 두동면 만화리에 있다. 동네 이름이 만화리라니. 철든 뒤 알게 된 외갓집의 동네 이름은 피식 웃음이 날 만큼 나에게 신선하고 재밌었다. 나의 외갓집은 지금은 벽돌로 지어진 여느 단독주택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내 어린 날의 기억 속의 외갓집은 싸리문 옆에 커다란 감나무 두 그루가 든든히 지켜주고 있었고,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흙바닥 넓은 마당에 빨간 고추, 참깨, 들깨가 가을 햇살에 구워지고 있었다. 마당 왼쪽 외양간에는 ‘음매’하고 나를 맞아주는 어미소와 새끼 소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귀한 쌀을 모셔두는 광이 있었다. 마당 정면에는 나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삶이 담긴 기와지붕에 흙벽, 문풍지를 바른 문이 있는 나의 진짜 외갓집이 있었다.  

   

싸리문을 열고 흙마당을 밟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갱아 왔나.”

자신의 딸 보다 외손녀를 먼저 반겨주시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곳 나의 외갓집에는 그 두 분이 계셨다.

그리고 내 어머니의 어린 날이 어려있었다.


외갓집을 갈 때면 며칠 전부터 설레고 설레었다. 알 수 없는 포근함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그냥 마냥 좋았다. 내가 자라 결혼을 한 후 다시 찾은 외갓집에서는 어린 날 그 포근함의 이유를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가난한 집 칠 남매 맏며느리였다. 어려운 살림살이는 기본 옵션이었고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런 어머니가 편해하는 곳, 늘 가고 싶은 곳, 바로 외갓집이었을 것이다. 내가 느낀 편안함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내 어머니의 편안함을 내가 나눠 느꼈던 것이다. 시집살이의 힘듦을 잠시 내려놓고,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을 받고, 편히 쉴 수 있는 곳.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면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위해 싸주시던 김치며 쌀이며. 그저 어머니 마음이 든든해졌을 그런 곳. 


내 어머니의 자존감이 잠시나마 되살아 나는 곳. 
그곳이 바로 나의 만화리 외갓집이었다.

    


오죽헌에 대한 율곡 선생의 느낌과 내가 만화리 외갓집에서 느낀 느낌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한 구석은 닮아있으리라는 생각에 오죽헌을 보는 나의 마음이 달라졌다. 오죽헌이 율곡 선생의 외갓집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잠시 오죽헌의 마당에 앉아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 끝에 처마가 걸린다. 처마 아래로 오랜 시간 집을 지켜온 대들보가 보이고 툇마루도 보인다. 툇마루에서 신사임당이 그림을 그리고 어린 율곡 선생에게 글을 가르치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툇마루 아래에는 꽃이 핀 마당이 보인다. 마당에는 어린 율곡 선생이 뛰어놀고 그 모습을 온화한 미소로 보고 있는 외할머니가 보인다. 

      

문화재일 뿐이었던 오죽헌은 이제 나에게 다 자란 딸과 손주와 외할머니의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간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율곡 선생도 훌쩍 커 다시 찾은 오죽헌에서 외할머니를 통해 어머니를 느끼고 그 가르침을 되새겼을 것이다.


아마도 율곡 선생은 외할머니를 뵈러 왔다가 어머니를 뵈었던 것 같다.                         




[photo by 짝꿍]



#오죽헌 #강릉 #신사임당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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