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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Aug 11. 2021

커튼콜. 다시 찾은 8월의 강릉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24


5월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몽실몽실 피어올랐던 흰구름과 바람, 내 짝꿍과의 시간. 그게 나의, 5월의 강릉이었다. 그리고 내 어렸을 적 기억들의 조각을 찾게 되었던, 찾아진 기억의 조각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던 그 강릉에 꼭 70일 만에 다시 왔다. 나의 두 번째 강릉, 8월의 강릉이다.


미스터 선샤인의 쿠도 히나가 조선을 떠나는 유진 초이에게 살다가 그리우면 달려오라고, 글로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을 거라고 했다. 5월에 잠시 머물다 떠났던 강릉은 나에게 다시 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달려왔다. 올여름 휴가는 당연히 강릉에서 보내야 한다는 나만의 애착이었다. 혼자만의 사랑이었다.


그리웠던 걸까?


5월의 강릉에서 직면한 나의 어린 시절은 꼬박 70일 동안 계속 내 의식을 맴돌았다. 비극이라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은 분명 차갑고 어두운 회색빛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마다 분홍빛, 연둣빛 따뜻한 빛깔로 빛났던 그립고 아련한 순간도 많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 너무나 신기한 탓이었다.


다시 강릉을 찾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명 나는 굿판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텅 빈 그곳을 홀로 조용히 찾아 앞으로 다 괜찮을 거라는 다짐을 받고 싶은 걸까? 대국을 끝내고 과정을 복기하듯 되짚어 보고 놓친 부분이 있는지 곱씹어 보고 싶은 걸까? 내 모습을 찬찬히 다시 한번 돌아보며 흔들리는 나를 다잡고 싶은 걸까? 순간을 스치는 찰나의 생각에도 인생 전체의 기억과 느낌이 깃드는 것이니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8월의 강릉은 거친 파도가 가득했다. 


철썩 쏴~~~~ 하던 5월의 낭만의 파도가 아니었다. 천둥소리와 같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달려와 바위에 거세게 부딪히며 스스로를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화가 나 엄청나게 퍼붓는 것 같다가, 어느새 푸념을 하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그저 내 모습은 이렇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의 시작이 아버지 어머니인 관계로 내 회색빛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 두 분을 빼고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좋은 기억도 슬픈 기억도 이 두 분에서 시작되는데, 어쩌자고 나의 뇌는 좋은 기억만 남기는지. 한마디 원망조차 미안해서 하지 못하게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두 분의 삶은 또 어쩌자고 투정조차 못하게 하는지. 곁에 계신 나의 어머니에 대한 애잔함과 떠나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못다 한 말들에 대한 아쉬움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지. 


분명 조물주가 인간의 뇌에 망각의 필터를 끼워놓은 건 분노하고 미워하는 마음보다는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이 사는데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격 급한 나의 아버지는 성격대로 갑자기 떠나셨다. 그 흔한 영정사진 하나 준비하지 못한 채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 것 같은 아주 평범한 날 갑자기 떠나셨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해서일까. 나는 아버지의 떠남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워했다가 보고 싶었다가 분노했다가 그리워했다가 뒤죽박죽이 되어 규정할 수 없는 마음 상태로 5년의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5월 강릉에서 찾은 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기억은 나로 하여금 아버지를 충분히 생각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고 수용하게 하여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찌꺼기를 걸러내고 알맹이만 남겨놓은 듯하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보내었던 것이다. 5월의 강릉에서.


5월은 끝났고, 짧았으나 선명했던 나의 회상 공연도 끝이 났다. 

무대가 끝나고 커튼콜을 받기 위해 배우들이 무대에 다시 등장하듯 나도 해묵은 감정들을 잘 걸러냈다고 스스로 커튼콜을 받기 위해 다시 강릉에 오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굳세고 멈추지 않는 파도 소리로 커튼콜을 충분히 아주 많이 받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앞으로의 나의 시간과 일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충전했다. 나는 5월의 강릉에서, 8월의 강릉에서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제 상처에 붙여 두었던 반창고를 떼어도 좋은 시간이 온 것 같다.





[photo by 짝꿍]


#애도 #커튼콜 #강릉 #바다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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