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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Jul 10. 2021

경포호수. 자전거 탄 풍경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23

파도치는 바다를 좋아한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날을 마주하게 되면 창 넓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걸 정말 하고 싶다. 바다, 물결, 파도는 내가 아는 물이라는 녀석의 기본 개념이다.


그런데 짝꿍과 함께 길을 따라 걸을 때 오른편에 보이는 물은 뭔가 허전하다. 이상하리만큼 너무나 잔잔한 물이었다. '왜 이렇게 잔잔하지?'라는 내 마음속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는데 짝꿍이 웃는다. 그리고 '호수잖아.'라고 한다. 맞다. 경포 해수욕장과 마주하는 경포 호수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떠올렸다. 그래도 아무리 호수라고 해도 너무 잔잔해 이상한 건 바뀔 수 없는 나의 느낌이다.



낯설어 슬픈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쨍하니 날이 좋다. 그러나 살짝 더운 것이 호수를 살방살방 걸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짝꿍은 자전거를 타고 호수를 돌아보기로 했다. 자전거를 못 타는 나는 평소 길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창 넓은 모자를 쓴 여리디 여린 여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강가를 달리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도 한 번쯤은 자전거를 타고 시원하게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런 자전거를 호수에서 짝꿍이 태워준다는 말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순간 하얀 원피스를 입고 창 넓은 모자를 썼어야 하나 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쨍하게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과 시원한 바람과 잔잔한 물결과 초록초록한 나무들과 은은한 풀꽃들과 귀여운 새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자전거의 바퀴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간다. 짝꿍과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멈춰 서서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길 반복했다. 그때의 기분이란 달리는 내내 공기들이 길을 터주는, 2배속으로 영화를 보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흙길을 달릴 때의 살짝쿵 붕~ 뜨는 기분. '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이 맛에 타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짝꿍과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내 짝꿍의 등을 보게 되었다. 넓었다. 살짝 기대도 보았다. 편안했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에게 짝꿍은 그런 존재였나 보다.


내가 기억하는 자전거가 있다. 아버지의 자전거.


아버지에게는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보낸 동생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절대로 차를 사지도 운전을 하지도 않겠노라 선언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매일 회사에 출퇴근을 했었다. 내가 기억하는 몇 장면 속에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 본 기억이 없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분명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등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기대어도 보았을 것이다. 아마 아버지의 등도 짝꿍의 등만큼 넓고 편안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 등에 느껴지는 나의 작은 움직임에 아버지도 분명 행복했으리라고 믿어본다. 비록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라 곰살맞게 좋다는 표현은 하지 못하였지만.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시간이 주는 위로가 괜찮았는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 집에 자동차가 생겼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버지의 자전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


짝꿍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이 순간을 나는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사람들을 대할 때면 눈을 보고 이야기하라고 한다. 그러나 가끔은 그 사람의 등 뒤에서 조용히 찬찬히 바라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그 사람이 나에게, 나에게 그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도록, 입으로 전하는 말 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그 사람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짝꿍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난 후 아쉬운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자전거를 더 타고 싶은 건지, 아님 짝꿍을 조금 더 혼자만 바라보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님 넓은 등에 다시 한번 기대어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언젠가 이 순간이 그리우면 내 짝꿍과 함께 다시 이곳 경포호수에 오리라. 그때는 나의 귀여운 두 아이들과 함께 와 보리라. 그리고 내 귀여운 아이들에게도 아버지와의 자전거 기억 하나 만들어 주어도 좋으리라.


아마도 나는 가까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이곳 경포호수를 다시 찾아올 것 같다.




[photo by 짝꿍]


#강릉 #강원도 #자전거 #경포호수 #경포대 #경포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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