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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l 13. 2017

왈츠 2번을 들으며 읽어야 할  <시대의 소음>

예고편을 보지 않고 보는 영화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듯이 어떤 줄거리인지 모르고 읽는 책이 더 재미있다. 하지만 가끔 알고 읽는 편이 더 좋은 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줄리언 반스의 장편소설 <시대의 소음>이 바로 그런 책이다.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우리에게 익숙한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대표 작가이다.

<시대의 소음> 역시 줄리언 반스의 유려하면서도 세심한, 하지만 읽기 쉽지 않다는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그래서 미리 알려주고 싶다. 만약에 그의 책을 읽기가 다소 불편했다면 <시대의 소음>은 꼭 어떤 내용인지, 누구에 대해 쓴 이야기인지 알고 시작하길 바란다. 모르고 읽었을 때와 알고 난 후의 <시대의 소음>은 전혀 다른 책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대의 소음>의 주인공인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책은 제삼자가 보는 시선으로 쓰여있지만 그 제3의 인물이 바로 드미트리 자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의 감정 표현은 디테일하다. <시대의 소음>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뛰어난 예술가가 격동의 시대를 거치고 있는 러시아의 수많은 권력집단에 맞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투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순응이었으며 <시대의 소음>에는 영웅이 아닌 겁쟁이로 권력과 타협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예술가의 슬픔이 가득 담겨있다. 

<시대의 소음>에 등장하는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실존 인물이다. 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곡은 바로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두 주인공이 왈츠를 추는 장면에서 나온 왈츠 음악으로 올드보이를 통해 더 유명해진 곳이다. 왈츠 2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중의 하나인데 작곡가가 러시아 사람으로 쇼스타코비치라는 사실은 <시대의 소음>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만약에 책 속에 등장하는 드미트리예비치가 단지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면 이 책은 읽기가 조금 힘들수도 있다. 주인공의 상황이나 러시아의 권력층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주인공의 내면을 들려주는 식으로 예고 없이 변화하는 이야기의 시점들만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시대의 소음>을 읽는다면 지루하기만 했던 장면들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의 스탈린 독재 체제와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며 많은 권력집단 속에서 살아왔다. <시대의 소음>속의 주인공인 드미트리예비치 역시 12년마다 바뀌는 정치권력 아래에서 예술가로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늘 고뇌하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스탈린의 러시아에는 이 사이에 펜을 물고 작곡을 하는 작곡가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종류의 작곡가만 있게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들과, 죽은 작곡가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체포당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매일 밤 승강기 옆에서 밤을 새우는 모습, 자신을 심문하는 자가 심문당하는 상황이 되어 버려 다행히도 체포되지 않았다는 구절, 그리고 저명한 작곡가의 서재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며 그것이 바로 스탈린 동무의 초상화라 말하는 권력층의 대화를 읽으며 과거, 먼 나라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닌 어디선가 느껴보고 분개했을 법한 기시감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그러나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영웅이 되기가 훨씬 더 쉬웠다. 영웅이 되려면 잠시 용감해지기만 하면 되었다-총을 꺼내고, 폭탄을 던지고, 기폭 장치를 누르고, 독재자를 없애고, 더불어 자기 자신도 없애는 그 순간 동안만. 그러나 겁쟁이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어지게 될 길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한순간도 쉴 수도 없었다.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머뭇거리고, 움츠러들고, 고무장화의 맛, 자신의 타락한, 비천한 상태를 새삼 깨닫게 될 다음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겁쟁이가 되려면 불굴의 의지와 인내, 변화에 대한 거부가 필요했다. 

줄리언 반스의 책은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책 속의 숨어있는 문장들은 다시금 그의 책을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고 쉬운 단어들만으로 표현하는 그의 문장들은 <시대의 소음>에서도 어김없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생존 인물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겁쟁이의 길을 선택했지만 끊임없이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용한 투쟁을 해온 드미트리예비치처럼 줄리언 반스 역시 자신만의 방법으로 모든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설이 곧 현실이고 현실이 곧 소설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을 좋아한다면 그의 음악을 들으며 그가 살아온 과정을 한 번쯤 함께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거가 아님을, 소설이 아님을, 단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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