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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Nov 19. 2018

우리 땅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역사의 명암 <땅의 역사>

처음 <땅의 역사>를 지리에 관련된 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곳곳의 역사를 소개하는 이야기겠거니 편안한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다. 하지만 <땅의 역사>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강렬하고 진한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땅, 그것은 발을 딛고 사는 공간적인 의미보다 오랜 세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의 개념이 더해진 그 '땅'이었다. 


<땅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잘못 기록된 역사를 땅에 남은 흔적을 통해 확인한다. 책 속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기억되지 않은 수많은 민초들에 대해 말한다. <땅의 역사>를 읽으며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그런 말을 했나 보다. '읽기 전에 심호흡이 필요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가 반드시 정의롭지는 않다. 역사에 빛이 있다면 반드시 어둠이 있고 권력 뒤에는 비겁함과 추함이 감춰져 있다. <땅의 역사>는 어떤 역사 책보다 역사의 뒤편에서 잊혀진 사건과 사람들에 대해 집중한다. 1, 2권으로 이어지는 <땅의 역사>로 잊혀진 역사를 모두 알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것과 알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므로 우리는 일단, 읽어야 한다. 왜 작가는 책을 읽기 전에 심호흡을 하라고 했을까? 


2권으로 구성된 <땅의 역사>는 각각의 주제에 맞게 길지 않은 이야기와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부터 읽어도 좋지만 목차를 보며 흥미로운 것부터 우선 읽어도 좋다. 

<땅의 역사> 1권은 소인배 비겁 혹은 무능, 대인배 고집 혹은 지조, 막힌 놈들 그리고 신화시대로 구성되었다. 1장과 2장은 소인배와 대인배라는 주제로 역사의 흐름을 끊어버린 사람들과 그 반대로 고난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백성들을 버리고 도주한 선조, 눈 뜨고 조선의 모든 걸 도둑맞은 강화도 조약 등과 최근 상황과 맞물려 사람들에게 알려진 국정을 농단한 무당인 진령군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우면서도 서글펐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 이미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땅의 역사>를 통해 제대로 알게 된 것들도 많았다. 그중에서 '만주로 떠난 이회영 형제와 투사의 아내 이은숙'에 대한 긴 이야기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회영 집안은 물론 시아주버니 건영과 석영과 철영, 시동생 시영과 호영까지 여섯 형제 집안이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한꺼번에 만주로 떠났다. 식솔이 60명에 달했고 마치가 열 대가 넘었다. 1910년 경술년 12월 30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고 넉 달이 지난 엄동설한 동지섣달이었다. 단순한 이사 혹은 이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 망명이었다.


<땅의 역사>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이야기 중의 하나는 바로 '그 많은 장영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였다. 면천을 하고 내시 대신 옆에 둘 정도로 세종이 아꼈던 장영실이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왜 장영실은 기이하게 역사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물론 책에서 장영실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특출난 장영실이 이끈, 찬란하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 기술의 시대가 그의 몰락과 함께 빛을 잃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땅의 역사> 1권의 마지막 주제는 신화시대이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상징하는 의미, 선화공주와 서동에 대한 진실, 대한민국 고고학사상 최대 경사이자 낭보인 무령왕릉 발굴기 그리고 김유신과 김춘추를 담고 있는 경주 왕릉 비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치욕의 역사, 명예의 역사'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땅의 역사> 2권에서는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해 더 자세하게 소개한다.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친일파의 행보를 시작으로 역사 속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여자들,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까지 버리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비롯해 왕조 스캔들, 식민시대와 민초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 편 한 편이 마치 드라마와도 같았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넘길 수 없는 역사지만 <땅의 역사> 2권에서는 여자들과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강한 제주도 바람보다 더 강인하게 살아남은 제주 여자들, 잊혀진 왕국 의성 조문국의 미스터리와 황제를 꿈꿨지만 사라진 남자의 아들을 아무도 모르게 기른 이름 없는 여자 등 책 속에 등장하는 그녀들은 이름이 없거나 기억되지 않았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역시 나도 몰랐을 그녀들. 역사의 그늘에서 불타고 사그라든 그녀들의 흔적은 슬펐지만 <땅의 역사>를 통해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자가 있다면 남자도 있다. 그 남자들에게는 진한 사내의 향기가 난다. 혀가 잘리고 배가 갈라져도 끝까지 충언을 올린 내시 김처선, 혁명가 김옥균을 암살한 지식인 홍종우, 신줏단지와 문중 전답까지 팔아 노름판에서 날렸다는 그 돈을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낸 파락호 김용환 등 나라만을 생각하는 우직한 그들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각 권에서 등장한 유적지와 흔적의 주소를 기재했다. 내비게이션에 검색하면 쉽게 답사를 다녀올 수 있도록 각 장의 제목과 함께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으니 보여주는 역사가 아닌 진짜 우리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땅의 역사>와 함께 전국 곳곳으로 역사 답사를 다녀보면 어떨까. 

27년 차 여행문화 전문기자답게 <땅의 역사>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잊혀가는 이야기를 살려낸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사람, 다양한 분야에 걸쳐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는 두 권으로 이어지는 많은 분량이지만 지루함 없이 금방 읽어낸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내면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 누구의 이름이 등장할지 두근거렸다. 

<땅의 역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가슴 뿌듯하면서도 슬프고 분노했다. 지도자가 말하는 역사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해낸, 수많은 민초들의 이야기는 어떤 찬란한 역사서보다 더 오래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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