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있으나 없는 존재이다.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남자.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깊이 남긴 그 남자를 부르는 이름은 붉은색 명찰에 새겨진 474번이다. 유령같이 살아온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수많은 생명을 빼앗으며 살았던 474번은 열두 명의 국회의원을 죽인 뒤 저항하지 않고 잡혔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하고 사형수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궁금해한다. 왜 그는 국회의원을 죽였을까?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정용준 작가의 <유령>을 현대문학 핀 시리즈 7번째 작품으로 만났다. 제목처럼 <유령>의 주인공은 유령 같은 남자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유령>은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는 474번과 그를 담당하는 교도관 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모든 사람들은 열두 명의 국회의원을 죽인 474번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그는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자신의 방식으로 천천히 관찰해 가는 교도관 윤.
담당님. 삶의 작은 비밀을 지키려는 건 본능입니다. 누군가 그걸 강제로 엿보려고 하면 공격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고 묻고 싶으시겠죠. 그건 답할 수가 없어요. 답이 없습니다. 본능이거든요.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담당님. 궁금하시다는 것 잘 압니다. 나도 담당님이 호기심에 이끌려 서서히 다가오는 게 좋아요. 재밌기도 하고요. 그런데 각오하셔야 합니다.
474번은 자신의 비밀을 윤에게 하나씩 털어놓는다. 그가 선천성 무통각증이라는 유전적 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 끈질기게 474번을 찾아오는 여자와의 관계,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474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윤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윤의 감정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살인을 저지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책을 읽을수록 진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간다.
범죄자가 있다. 수도 없이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아온 불쌍하고 연약한 영혼을 가진 자였다. 자, 이제 말해보자. 그는 악인인가, 아닌가.
간단한 흑백논리로 규정지을 수 없겠지만 우리는 수많은 474번, 신해준과 살고 있기에 <유령>을 단지 소설로만 읽고 덮을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사라질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각자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 <유령>이라는 소설은 불편할 수도, 또는 인상적인 책이 될 수도 있다.
소설로 읽기에는 사회적이고, 사회 문제라고 보기엔 너무 소설스러운 <유령>을 읽으며 삶과 악,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소재의 무게에 비해 쉽고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지만 474번과 윤, 신해경의 감정과 함께 마구 흔들렸던 내 생각을 붙잡는 데는 책을 읽었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