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 Apr 13. 2019

테라노스와 엘리자베스 홈즈의 초대형 의료 사기극

<배드 블러드>

피 한 방울 만으로 수십 가지의 질병을 알아낼 수 있다. 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달콤한 말인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병으로 잃었거나 병원에서 수없이 찔러대는 바늘에 공포를 느꼈던 사람이라면 이 회사의 적극적인 지지와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배드 블러드>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공포를 느끼고 모든 사람이 해결 방법을 찾길 바라는 바로 그것,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천재 혹은 사기꾼은 바로 그 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에 웃음을 안겨 준 '극한 직업'이라는 영화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지금까지 이런 통닭은 없었다' <배드 블러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구가 아닐까 싶다. 영화 속 대사를 빌려 이 책을 정의하자면 '이 책은 경제경영서 인가? 소설인가? 지금까지 이런 경제경영서는 없었다'가 된다. <배드 블러드>는 경제경영서이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 박진감이 넘친다. 4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은 한 명에 의해 일어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실화이다. 


미국의 벤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그녀의 이름이나 테라노스가 개발하는 제품이 어떤 것인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여자 스티브 잡스, 의료계의 혁신이자 축복받은 기술을 개발했다는 테라노스와 매력적인 젊은 여성 CEO 엘리자베스 홈즈. 스티브 잡스가 만든 스마트폰이 세상을 변화시켰듯 피 한 방울에서 시작하는 그녀의 기술이 질병을 예측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바꿀 혁신의 아이콘이 아니라 악독한 CEO 이자 사기꾼이 불과했다. 


<배드 블러드>는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인 존 캐리루가 정보를 모으고 160여 명의 내부 고발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으로 인해 테라노스와 엘리자베스 홈즈의 비밀스러운 왕국은 무너져 내렸다. 이 책은 단순한 인터뷰 내용과 사기의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한편의 조사 보고서이자 소설과 같은 책이다. 엘리자베스 홈즈의 성장과정, 어떻게 테라노스를 설립하고 비밀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직원들을 다뤘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 테라노스와 엘리자베스 홈즈에 대해 전혀 몰라도 상관없다. 굉장히 흥미로운 범죄 스릴러 소설 한 권을 읽는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엘리자베스 홈즈의 성장에서부터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투자자를 모으거나 방송매체를 이용하는 방법 등 그녀의 여러 가지 행동 중에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테라노스 운영진과 직원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수없이 많은 비밀 서약서를 작성하고 직원들끼리의 의사소통을 차단시킨다. 이중삼중의 비밀 차단막을 만들어 테라노스는 거대한 미로와 같은 회사였다. 자괴감을 느끼게 만드는 홈즈의 운영 방식은 좋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감추고 덮기에 급급했던 테라노스는 그렇게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배드 블러드>의 많은 부분은 그녀가 어떻게 테라노스를 만들고 운영했으며 사람들을 속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의 비상식적인 행동보다 엘리자베스 홈즈 자체가 더 궁금해졌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사기를 쳤다는 느낌보다 욕망이 신념이 되고 거짓된 믿음이 진실인 양 믿게 된 것 같았다. 책 속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기업과 투자자, 하물며 미국 정부까지도 테라노스 신화에 한몫을 한 것이 아닐까. 


시작은 작은 의혹이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한 명의 기자와 용기를 내어 인터뷰에 응해 준 내부 고발자들 덕분에 전 세계가 극찬하고 존경해 마지않았던 매력적인 젊은 여성 CEO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게 되었다. <배드 블러드>는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성공 신화의 중심에 서 있던 엘리자베스 홈즈의 포장된 거짓을 알린 사람들의 용기가 담겨있는 책이다. 영화로 만들면 굉장히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배드 블러드>가 이미 영화 제작 중이라고 한다.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친 엘리자베스 홈즈 역에 '제니퍼 로랜스'가 캐스팅되었다고 하는데 스크린에서는 <배드 블러드>의 박진감이 어떻게 표현될지 기대된다.

작가의 이전글 환상인 듯, 현실인 듯 <엿보는 자들의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