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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Mar 03. 2021

아마추어에게 스토리를 부여하는 질병

영화 ‘플로렌스’ – 매독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프로와 아마추어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추어 뮤지션이 완성도는 떨어질지라도 프로의 무대에서   없는 독특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 조건이 있다. 그의 신선함과 함께 노력, 열정, 고난이 이야기로 전달되어야 울림이 힘을 갖는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런 스토리의 뒷받침이 없어도 일관성 있는 성과를 보여줄  프로라는 명찰을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플로렌스’는 독지가이자 소프라노인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이야기다. 성악가라고 하지만 프로는커녕 아마추어로도 최악이다. 끔찍하게 노래를 못하기 때문이다.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다해 노래하는 진성 음치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뛰어난 가수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갑부인 플로렌스 주위에는 남편을 포함해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아부쟁이가 넘쳐났으므로. 역시 돈이 좋다.


이야기의 외피는 경쾌하고 코믹하다. 자기 실력을 파악 못 하는 벌거벗은 임금님 플로렌스는 성악에 대한 열정이 넘치다 못해 카네기홀에서 독창회까지 감행한다. 충성스런 매니저이자 남편인 베이필드는 공연에 ‘교양 있는’ 관객을 골라 초청하고, 후폭풍을 막고, 악평이 아내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동분서주한다.    


한 마디로 돈지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의외로 풍자적이지 않고, 플로렌스를 조롱의 대상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우스꽝스럽다 못해 기괴한 노래가 나중에는 묘하게 감동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녀에게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1937년 플로렌스의 공연. 기꺼이 박수칠 '교양 있는' 초대 손님 앞에서 노래한다. 출처: dailymail.co.uk

남편 베이필드는 매일 플로렌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자타공인 다정한 부부지만 한 침대를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남편은 공공연히 애인과 다른 집에서 지낸다. 부유하고 주변에 사람이 가득하고 좋아하는 노래도 마음껏 하는 그녀지만 외로워 보인다. 공연 후에 탈진한 플로렌스를 진단한 의사는 그의 몸에 있는 궤양을 보고 놀란다.


플로렌스에게 스토리를 부여한 일등 공신은 바로 매독(syphilis)이다.  그녀는 전 남편으로부터 매독에 감염되었고, 현재 수은과 비소를 투여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매독 환자는 피부에 궤양, 병변이 생긴다.

매독은 세균인 Treponema pallidum에 의해 감염되는 성병이다. 전염성이 높은 탓에 20세기 초반까지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쳤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초기에는 피부 병변, 근육통 등이 발생하며, 후기로 진행되면 중추신경, 심혈관계를 공격하고 정신이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모친이 매독에 걸렸다면 태아도 감염될 수 있다. 임신 중 매독을 치료하지 않으면 태아에 감염될 확률이 70%를 넘고 사산율은 40%에 이른다. 유병률이 높은데다 환자 본인뿐 아니라 자식에게도 끔찍한 운명을 선사하므로 문학에도 자주 등장한 질병이다.  



엘러리 퀸이 1932년에 발표한 추리소설 ‘Y의 비극’은 매독을 재미있게 활용한다. 이 소설은 ‘미치광이 해터가’라고 불리는 부잣집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다룬다. 이 집안 식구들은 못된 성격으로 악명이 높다.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이 흥미롭다. 집안의 어른인 에밀리 해터는 젊을 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매독에 감염되었다. 이 탓에 그녀의 자식과 손주들은 독특한 성격적 특성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아들과 막내딸은 자제력이 부족하고 충동적이며 손자들은 어린 나이부터 폭력 성향을 보인다. 에밀리의 두 딸 중 시인인 바바라의 천재적 재능도 엄마의 매독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이쯤 되면 수상하다!  


매독이 워낙 널리 퍼진데다 부모의 감염으로 인해 이상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도 많았으니, 20세기 초의 시각으로는 그럴 듯했을지 모른다. 물론 현재 생물학적 견지로는 억지스러운 설정이다. 매독 감염자에서 태어난 아기는 선천성 매독으로 사산되지 않는다면 지적장애, 피부 병변, 청각 문제, 골격 이상 등 합병증을 안고 자랄 수 있다. 하지만 매독균이 자녀의 두뇌에 영향을 미쳐 천재성을 나타낸다거나, 유전 형질을 변화시켜 손주에게 이상 성격을 전할 리는 없다. 극적 재미를 위해 여러 소재를 도입했지만 과학적 엄밀함이 부족했던 당시 추리소설가들은 이런 오류를 종종 범했다.


1910년 비소 화합물인  살바르산 606이 개발되기 전까지 매독 치료에는 중금속인 수은이 주로 사용되었다. 환자들은 세균과 중금속의 이중 공격을 받은 셈이다. 살바르산은 '마법의 탄환'이라 불릴 정도로 혁신적인 의약품이었으며 의료 체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부작용이 심하고 약효도 완전하지 않았다.

 

1936년 살바르산 샘플. 출처: Science History Institute

1943년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된 후 매독 환자의 수는 급감했다. 지금도 매독 치료에는 일차적으로 페니실린요법(benzathine penicillin)을 실시한다. 21세기 들어 매독이 HIV와 동반감염된 사례가 증가하는 추세지만, 100년 전에 비하면 그 악명이 퇴색되긴 했다.


플로렌스는 1868년 태어나 1944년 죽었다. 영화에서 의사는 매독 환자가 대개 50세 이전에 죽는다고 말한다. 플로렌스는 18세에 감염되었다고 했으니 50년 넘게 매독과 동거한 셈이다. 수은과 비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으므로 중금속 또한 그녀의 몸을 갉아먹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재산은 있으나 재능이 없고, 열정은 있으나 건강이 없는 그녀. 충실한 남편과는 정신적 관계로만 만족해야 하는 공허한 플로렌스의 삶에서 음악은 자신이라는 지구를 환하게 하는 태양과도 같았다. 이 돈많은 음치를 조롱하기보다 아마추어의 열정에 감동했다면 매독이라는 질병이 부여한 스토리 때문이다.





참고문헌

Ros-Vivanco C, et al. Rev Esp Quimioter. 2018 Dec;31(6):485-492.

Sloan Science and Film. I Take Arsenic, Of Course: Florence Foster Jenkins.  http://www.scienceandfilm.org/articles/2761/i-take-arsenic-of-course-florence-foster-jenkins Accessed 01 Mar 2021

Gelpi A, Tucker JD. Sex Transm Infect. 2015 Feb; 91(1): 69–70.

Lim J, et al. BMC Pediatr. 2021; 21: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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