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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Oct 08. 2020

죽음의 신도 상처에는 빨간약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살균소독계의 판타지 스타




“으악, 아프겠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쉬거가 총상 치료하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신음 소리를 낸다.


무표정한 얼굴로 살인을 저지르는 죽음의 화신 안톤 쉬거는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범죄자인만큼 병원에 갈 수는 없으니 약국을 털어 몇 가지 약제를 챙긴 후 모텔로 향한다. 경력있는 살인마답게 상처 관리도 능숙하다.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고(세정), 생수통에 붉은 액체를 넣어 희석한 후 뿌리고(소독), 리도카인을 주사하고(마취), 총알을 빼낸다(시술). 거울뉴런의 작용으로 보는 내 다리가 아프다.


총상을 자가치료하는 안톤 쉬거. 보기만 해도 아프다.



쉬거가 상처 소독에 사용한 붉은 액체는 다들 아는 그 빨간약, 포비돈 요오드다. 


한 드라마에서 마음이 아프다고 가슴에 빨간약을 발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신과보다 빨간약을 먼저 찾다니, 이렇게 만병통치약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걸 보면 가히 국민 약제다.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에서 빨간약은 머큐로크롬, 요오드팅크였다. 머큐로크롬은 수은 성분이 포함되어 안전성 우려 때문에 퇴출되었고 요오드팅크는 효과에 비해 바를 때 통증이 심하여 포비돈 요오드에 자리를 내주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빨간약은 포비돈 요오드로 대체되었다.


의약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빨간약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나 향수를 소환하는 데 종종 사용된다. 상처 부위에 스틱으로 조물조물 바르는 모습 자체가 향수를 자극하는 듯하다. 최근에는 이 빨간약이 가글, 비강 스프레이 등 다양한 제형으로 출시되어 사용범위가 한층 더 넓어졌다.


포비돈 요오드를 검색하면 상처 소독뿐 아니라 식수 정수, 가글, 집안 물건의 살균소독 용도 등 다양한 상황에서 용례를 소개하는 글이 지천에 널려 있다. 그만큼 살균소독 효과가 강하고 스펙트럼이 넓다.



시중에 판매되는 포비돈 요오드 제품


포비돈 요오드의 살균소독 작용은 요오드 성분 때문에 나타난다.

요오드는 강력한 산화력을 가지고 있으며 세균에서 세포벽, 세포막 등 세균의 구조를 박살낸다. 바이러스의 외피막을 파괴하기 때문에 에볼라, 사스, 메르스 바이러스도 제거한다. 물론 이런 효과는 실험실에서 바이러스에 적용한 결과이고 이미 감염된 상태에서 마시거나 발라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경구용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기에 먹거나 마시면 효과는커녕 구토를 비롯한 부작용만 경험할 수 있다.


‘진열장 위의 들고양이(니코 오빠의 비밀)’라는 장편 동화에는 주인공인 멜리사가 집안 어른들 몰래 산에 갔다가 발에 큰 상처를 입고는 혼날까봐 바닷가에서 다쳤다고 거짓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바다에서 입은 상처는 괜찮다고 안심시킨다. 바닷물에는 요오드 성분이 있어서 소독 작용이 있기 때문에 세균 감염 우려가 적다는 것이다. 물론 거짓말한 멜리사는 감염되었을까봐 끙끙 앓는다.

(바닷물에 염화나트륨과 요오드 등 살균 성분이 있긴 하나 각종 오염물질이나 미생물도 득시글하므로 다치면 병원이나 약국에 가는 게 맞다.)


요오드는 살균소독력이 탁월하지만 인체세포까지 파괴하고 자극이 심해 사용에 제한이 있었다. 이런 단점을 개선한 제제가 포비돈 요오드다. 요오드에 폴리비닐피롤리돈(포비돈)을 결합시켜 기존 요오드 제품에 비해 효과적이면서 자극은 적다. 포비돈 요오드는 1950년대 등장한 이후 살균소독계의 판타지 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포비돈 요오드의 구조


스캔들이 없으면 스타가 아니라고 했던가, 포비돈 요오드도 심심할 만하면 매체에 오르내린다. 2020년에는 코로나19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만능 치트키의 면모를 자랑했다. 사스 바이러스, 메르스 바이러스를 사멸하는 것처럼 외피형 바이러스인 신종코로나바이러스를 파괴하는 게 기전상 신기한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옷(제형)을 입고 새로운 데이터로 무장하니 정말 새로운 그 무엇이 등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포비돈 요오드는 가글이나 인후스프레이로 구강, 비강에 투여해서 거기 있는 바이러스를 사멸하지만 치료제는 아니다. 이미 감염되어 몸 속에서 바이러스가 증식한 사람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포비돈 요오드가 기존의 요오드 제품보다 덜 자극적이긴 하지만 안톤 쉬거처럼 깊은 상처에 들이부으면 아프다. 몹시 고통스러울텐데 그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통증을 못 느끼는 병도 있지만, 영화에서 쉬거가 땀을 흘리고 잠시나마 참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무통각 설정은 아닌 듯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내하기 힘들 신체적 고통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처리하는 장면에서 안톤 쉬거의 비인간성을 볼 수 있다.


극단적인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이자 죽음과 운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이 인물에게 잠깐의 아픔 따위는 그냥 지나갈 사건일 뿐이다. 이런 죽음의 신도 빨간약을 사용하니 살균소독계의 판타지 스타가 맞다.



참고문헌

NIH. Povidone iodine. https://pubchem.ncbi.nlm.nih.gov/compound/Povidone-iodine. Accessed 01 Mar 2021

Naqvi SHS, et al. J Otolaryngol Head Neck Surg. 2020 Oct 27;49(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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