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전’ – 땅콩과 아나필락시스
2020년 초반, 코로나19 백신은 2021년 말에나 가능할 거라고 큰소리쳤다. 의약품의 개발과 사용에는 기술의 진보 이상으로 규제(regulation)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제약사들이야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겠지만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정부 기관과 의료 관계자들, 층층이 쌓인 규제의 벽을 단시간에 넘을 수 있을까?
근데 넘었다. 잘난 척했지만 카산드라 되기는 글렀다. 적게 잡아도 5년 이상 걸리는 백신 개발에서 수급까지 1년만에 가능했다. 2020년 12월 미국에서 코로나19 백신이 처음으로 투여되었다. 코로나는 기술뿐 아니라 규제에서도 향상을 가져다 준 셈이다. 역시 협력의 가장 큰 동인은 공통의 적이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걱정도 많다. 깐깐한 이쌤은 코로나19 백신을 절대 맞지 않겠단다. 접종을 먼저 시작한 국가에서 보고되는 안전성 사례를 유심히 보게 된다. 현재까지 심각한 부작용이 유의하게 많지는 않아 보이지만, 젊은 백신이다 보니 경험이 필요하다. 가장 걱정되는 증상, 아나필락시스 사례도 어김없이 뉴스에 등장한다.
아나필락시스는 일종의 알레르기 과민반응이다. 특정 항원에 노출된 후 두드러기, 호흡곤란 등 증상이 나타나고 심한 경우 실신, 사망으로 이어지는 급성 증상이다. 알레르기는 인체의 면역물질이 외부 침입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염증 반응으로 인해 나타나는데, 빠른 시간에 급격하게 나타나 생명을 위협하면 아나필락시스다. 코로나19뿐 아니라 단백질이 포함된 백신에서는 아나필락시스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 실상 백신뿐 아니라 음식 섭취에서도 보고된다.
’유전’은 기이하고 끔찍한 장면으로 가득찬 영화지만, 유독 깊이 각인된 장면은 소녀 찰리의 죽음이다. 오빠 피터와 파티에 갔다가 음식을 먹던 찰리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이 붓는다. 급성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 찰리를 차에 태우고 집에 가는 피터. 숨쉬기 힘들어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던 찰리는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만다. 이게 다 땅콩 때문이다.
서구권에서는 땅콩 알레르기가 꽤 흔하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영화에도 종종 등장한다. ‘좀비랜드 더블탭’에서는 핑크걸 매디슨이 갑자기 발진을 일으키고 구토한다. 주인공 콜럼버스는 그녀가 좀비로 변하는 줄 알고 총으로 쏜다. 사실 매디슨은 땅콩을 먹고 알레르기 증상을 보였을 뿐이다.
땅콩이나 견과류(nuts)는 잘 알려진 알레르기 유발 식품이다. 가벼운 알레르기 증상은 가려움이나 발진 정도지만, 아나필락시스는 사망하는 사례도 있다. 외국에서는 땅콩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사망한 손님의 유족이 식당을 고소한 경우도 있다.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이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고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식품 포장에 난류(가금류), 우유, 메밀, 땅콩, 대두, 밀, 고등어, 게, 새우, 돼지고기, 복숭아, 토마토, 아황산류, 호두, 닭고기, 쇠고기, 오징어, 조개류처럼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는 재료가 들어갈 경우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유전’의 땅콩 알레르기는 유전될까? 나라마다 흔한 음식 알레르기가 다른 걸 보면 그렇지 않을까? 식품 알레르기는 분명 가족력이 있고 관련 유전자도 연구되었다. 하지만 유전적 영향이 100%는 아니다. 부모가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도 아이는 없을 수 있다.
서양에서는 어린이의 1-3%가 땅콩 알레르기를 겪는다는 보고가 있다, 싱가폴 및 필리핀에서 실시된 연구에서는 땅콩 알레르기가 0.7% 미만으로 보고된 반면, 해산물 알레르기 비중은 더 높았다. 인종별로 발생한 알레르기 종류 차이가 있나?
인종 다양성이 높은 호주 연구 결과가 흥미롭다. 호주에서 태어난 아시아계 어린이는 비아시안보다 땅콩 알레르기 유병률이 높았다. 반면 아시아계 어린이라도 아시아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민온 경우 땅콩 알레르기 위험도가 낮았다. 환경 요인이 있는 것이다. 아시아 음식의 특성상 어릴 때부터 땅콩에 노출되어 서서히 탈감작(desensitization)되기에 알레르기 위험이 더 적다는 주장이 있다.
영화 유전에는 찰리의 알레르기에 대비해서 약을 준비하라는 대사가 나온다.가벼운 알레르기 증상에는 먹는 항히스타민제가 도움되지만 심각한 아나필락시스에는 에피네프린을 투여하도록 한다. 한번 아나필락시스가 발생하면 또다시 발생할 수 있기에, 에피네프린 주사제를 구비하고 응급 상황에 자가주사하도록 한다. 알레르기 발생 위험 자체를 없애는 건 아니라서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다행히 2020년 2월 미국에서 땅콩 알레르기 치료제로 먹는 약(Palforzia)이 처음 승인되었다. 땅콩 성분이 들어 있어 지속 복용하여 면역계의 과민성을 서서히 완화(탈감작)시키는 약이다.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치료하진 않지만 발생 가능성 자체를 낮추어 주니 반가운 일이다.
실제로 영화처럼 치명적인 아나필락시스 사례는 드물지만 가벼운 음식 알레르기는 종종 볼 수 있다. 옻닭 먹기 전에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있다. ‘기생충’에서는 기생을 위해 복숭아 알레르기를 활용한다. 불쌍한 문광.
땅콩 알레르기가 있으면 코로나19 백신 투여 시 아나필락시스 위험이 높을까? 음식과 백신에서 각각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항원은 전혀 다르다. 임상 결과나 실제 부작용 사례를 보아도 코로나19 백신의 아나필락시스와 음식 알레르기 간 연관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미국 CDC에서는 주사용 약물과 무관한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 백신 접종의 금기가 아니라고(접종을 권한다고) 명시했다.
경험 적은 젊은 백신이니 쌓이는 데이터를 면밀히 봐야겠지만, 위험성을 굳이 과장할 필요도 없다. 임상에서 기록되는 부작용이 전부 치료와 연관된 건 아니다. 활성 성분이 없는 빈 약, 위약(placebo) 투여군에서도 일정 수준의 이상반응은 항상 나타난다. 백신 투여 후에 과식해서 두통이나 설사가 생겨도 부작용으로 보고된다. 치료 관련(treatment emergent) 이상반응이라고 판단되는지 유심히 볼 일이다.
코로나19 백신보다 화제성은 떨어지지만 땅콩 알레르기 치료제도 반갑다. 어떤 원인이든 알레르기와 두드러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고통과 당황스러움은 잊기 어렵다. 내 몸을 지키는 면역반응이 나를 위협하다니,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복잡한 것이 생물이다.
친구들과 심심풀이 땅콩에 맥주 한잔 하면서 밤늦도록 도란도란 수다떨 그 날이 빨리 오기를.
참고문헌
Panjari M, et al. Clin Exp Allergy. 2016 Apr;46(4):602-9.
Shek LP, et al. J Allergy Clin Immunol. 2010 Aug;126(2):324-31.
CDC. COVID-19 Vaccines and Allergic Reactions. https://www.cdc.gov/coronavirus/2019-ncov/vaccines/safety/allergic-reaction.html. Accessed 17 Jan 2021
FDA. Palforzia. https://www.fda.gov/vaccines-blood-biologics/allergenics/palforzia. Accessed 17 Jan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