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8
"어후, 시끄러워서 전부 다 깰라."
새벽 05:30 알람소리에 눈만 떴다.
눈만 뜬 채로 허공을 응시하자 핸드폰의 알람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금세 온 집안을, 그리고 아파트 전체를 울리는 듯했다.
어제도 잠들기 전, 그는 습관적으로 알람을 바로 끄지 못하도록 핸드폰을 침대 머리맡이 아닌 방 한구석 멀리 책상에 두었다.
왼쪽 눈은 뜨기도 어려워 오른쪽 눈만 삼분의 일쯤 뜨고 침대를 도약 스프링보드로 삼아 책상 앞까지 튕겨져 나갔다. 핸드폰 화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낌적으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알람소리가 다시 잠잠해졌다.
데일리 플랜에 의하면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지 않고 책상에 그대로 앉아야 했다.
'나는 로봇 아니고 사람이야'를 되뇌며 침대로 돌아갔다. 그에게 알람 소리에 단 번에 일어나 계획한 대로 사는 건 사람이 아니라 로봇였다.
털썩 침대에 몸을 던지고 잔뜩 구겨져 있던 이불 모서리를 잡아당겼다. 한여름에도 이불로 어깨를 덮어야 잠이 오는 사람이다.
그냥 일어날 수 있는 시간에 알람을 맞추지, 왜 새벽에 맞춰서 온 집안사람 다 깨우고 난리야. 같이 사는 사람의 잔소리 한 숟갈 먹더라도 이 시간을 고집하는 이유는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 하루 24시간에서 몇 분 더 이득을 본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아우 씨. 진짜 일어나야 해."
입 밖으로 '씨'라는 거친 파동을 만들어내며 벌떡 일어났다. 간단히 세안과 양치를 마치고 정수기 앞에 섰다.
40도씨 물 한 컵을 따랐다. 아침 첫 물 한 잔이 건강에도 중요하다기에 온도가 조절되는 정수기를 설치한 것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유산균 한 포를 입에 털어 넣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여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첫 번째 할 일은 필사다.
손으로 필사하지 않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베껴 쓰는 타자수에 불과하다는 스승님의 말씀이 떠올라서 한 문장, 한 문장씩 옮겨 쓰고 있다.
요즘은 손으로 원고를 쓰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려 컴퓨터로 모두 글작업을 하는 마당에 손으로 쓰는 게 맞냐 하겠지만, 독서받침대에 책을 세우고 고개를 좌로 봤다 우로 봤다 하며 모니터에 옮겨 쓰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백스페이스(Del) 버튼을 누르는지. 이건 필사라기보다는 타자 연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삼십 분정도 시간을 정해놓고 필사를 한다. 필사의 양을 정해놓지 않은 것은 문장을 여러 번 읽고 옮겨 쓰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에 양을 맞추려다 보면 설렁설렁 읽게 되는 게 영 목적에 맞지 않다 생각했다.
다시 알람이 울렸다. 출근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다. 용모를 단정히 하고 출근 복장으로 갈아입고 하는 데 걸리는 시간 삼십 분, 가족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시간 삼십 분을 예상한다. 그러나 머리를 빗다가 갑자기 스치는 생각에 핸드폰을 열어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 결과를 살펴보고는 핸드폰 잠금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다.
화면을 끄자마자 다음 궁금함이 떠올라 다시 핸드폰 액정을 터치하고 얼굴을 인식시켰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네 번째 알람이 울렸다.
다급히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간다. 가족들의 아침식사를 차려주고 출근길에 나섰다. 회사원의 하루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시작되었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십여분 만에 끝낸 점심식사의 여운이 가시기 전, 잠깐 짬을 내어 읽으려고 가져간 책을 가방에서 꺼냈다. 무슨 책을 읽는지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진 않다.
얼마 전 온라인으로 구입한 북커버를 책에 씌웠더니 사람들은 북커버를 신기해하지 무슨 책이 들어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북커버 속에는 주로 소설책, **문학상 작품집이 들어있다.
두 번째 할 일, 짬날 때마다 책을 읽는다. 좀 더 몰입해서 읽고 싶지만 늘 시간이 부족하다.
바빴던 회사를 퇴근했다. 더 바쁜 삶 속으로의 출근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족들의 저녁을 준비했다.
가족들의 일정도 그의 하루만큼이나 복잡하고 바쁘기에 저녁을 한 번만 차리는 것도 다행이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몇 달 전에는 각기 바쁜 일정 때문에 그는 저녁상을 세 번을 차려야만 했다. 한 번으로 줄어든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내일 가족들이 필요로 할 준비물을 준비하고, 아침 메뉴를 대충이나마 정해 놓고, 저녁 상을 치운 후 식기세척기를 돌리면 더 바쁜 삶의 일부는 끝이 났다. 다시금 작가지망생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카페인이 들어있지 않다는 붉은색의 차를 한 잔 내려 방으로 들어갔다. 이 차 한잔을 다 마시는 동안 술술 글이 잘 써지기를 바라면서, 책상에 앉아 배경음악을 신중히 골랐다. 박혜상 소프라노의 [Breathe] 앨범을 재생한다.
세 번째 할 일은 습작이다. 그는 소설을 쓴다. 소설 소재가 생각나면 소재 노트에 수시로 적어놓았다. 좀 더 생각을 해 본 소재는 대충이나마 얼개를 만들어 놓은 것도 있었다.
스승님은 단편 소설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들여 쓰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 쓰기의 찐 초보이기 때문에 스승님이 말한 시간보다 서너 배는 걸리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글쓰기는 글로 짓는 집 짓기와 같다. 집을 지을 때는 공정 과정마다 다른 재료를 이용해 여러 구조를 짓지만 글쓰기는 오로지 '글'로만 집을 짓는 것이다. 좋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그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문장은 결국 훈련을 통해서만 쓸 수 있다고 믿기에 매일 쓰는 문장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꾸준히 훈련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매일매일이 같지는 않았다. 어떤 날은 배경에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해서 몇 페이지를 순식간에 쓰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커서의 깜빡임을 보는데만 몇 시간을 흘려보내는 날도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를 지켜보는 날도 훈련에 포함된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어느덧 시를 나타내는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11을 넘기고 있었다.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에게 소설가의 길은 마라톤이고 길고 오래 하기 위해서는 룰이 있어야 했다.
규칙적인 생활로 체력을 유지해야지.
적어도 대여섯 시간 이상은 잠을 자야지.
오래 앉아있다가 살이 붙어 몸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간헐적 단식을 지켜야지.
작가 지망생이라서 글을 써야 하니 가족일에 참여 못한다는 꼴값 하지 말아야지.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운동을 해야지.
자기 전에는 꼭 책을 읽다 자야지.
해야 할 것도 지켜야 할 룰도 많은 그는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면서 본인 입으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산다.
그의 하루 일과가 끝났다.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마지막 약속. 자기 전에 꼭 책 읽기를 실천하기 위해 누워서 패드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 두 손을 쭉 폈다.
구독형 온라인 서재를 이용해 책을 읽고 있다. 어제 자기 전 보던 부분부터 이어 보기를 눌렀다. 삼십 분쯤 책을 보니 이러다가는 패드를 얼굴 위로 떨어뜨릴 것 같은 졸음이 밀려왔다.
그는 패드를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눈을 감은 채로 어깨가 충분히 덮일 만큼 이불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