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 제임스 도즈
#아버지의유산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는 기간 아버지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작은 협동조합의 이사장 직, 상상하는 ‘은행장’ 과는 거리가 멀다. 시골 마을에서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발이 되어주고, 눈이 되어주는 아들 같은, 동생 같은 역할이다. 농사짓는 동네의 가뭄과 홍수, 산불 현장을 쫓아다니고, 어르신들의 보이스피싱 사기를 막아주는 역할. 명예퇴직을 할 때까지 직장생활에 결코 적응하지 못했던, 유도리 없이 정의롭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회사원보다는 봉사원이 백번 잘 어울리는 아버지는, 그 역할을 꽤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근 칠십 평생 처음으로 꼭 맞는 역할을 찾은 듯했다.
재선 선거운동 중 아빠는 천 장의 명함에 일일이 편지를 써 담아, 하루에 두 번 양말을 갈아 신어가며 집집마다 다니며 그 명함을 전했다. 선거 당일 묵주기도를 하며 안마당을 걸어 다니시는 뒷모습 옆모습을 보는데, 한 때 운동선수였던, 지금 다니는 헬스장 관장보다 몸이 크고 부풀어있던 아버지의 젊은 날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날의 아버지는 오랜 기간 많이 걷고 긴장해서인지 공기 빠진 풍선처럼 작아져있었다. 환영과 지금의 아버지가 동일인이라는 것, 그 둘 사이에 흐른 시간의 무게가 마치 도끼처럼 둔탁하고 잔인한 타격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숨까지 꼬장꼬장 고집스럽고 힘찼던 허먼 로스도 가고, 그런 아버지의 삶과 늙어감, 죽음을 집요하게 기록해 둔 필립 로스도 갔다. 필립 로스의 기록을 읽어 내리며, 어쩌면 우리 모두는 결론이 똑같은 서사를 써 내려가는 중인 기록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서사를, 삶으로부터 죽음을, 젊음으로부터 늙어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소풍’이라 칭할 수 없는, 먹고 먹이고 살고 살게 하는 고된 삶 그 나이브하고도 냉정한 서사를.
공교롭게도 이 기간 중 아버지의 첫 손녀가 태어났다. 젊음에서 늙어감, 둘 중 후자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 아버지의 움직임과, 태어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조카의 오로지 생명과 젊음만이 가득 찬 움직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바라보는 이 복잡 기묘한 경험. 실체를 가늠해 본 적 없던 인류의 역사를 가장 가까이서 체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의 삶과 죽음, 젊음과 늙어감의 서사를 눈 크게 뜨고, 귀 열고, 조금 더 가까이서 더 많이 지켜보고 들으면서, 잘 기록하고, 기억 해나야 한다는 묵직한 숙제를, 이제야 똑바로 대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적이라는 표현 하에 무관심과 무책임함을 누리고 사는 내리사랑 수혜자의 호사를 쉬이 포기하지 못할 이기적인 인간이나, 그 어떤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문장을 쉬이 외면하지는 못할 것 같다. 딸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가장 가까이서 나를 가장 맹목적으로 보듬어 준 사람들의 인생을 더 많이 지켜봐 주고 기록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필립 로스의 문장이 그리 만들었다.
에세이도 그의 여느 소설만큼이나 집요하고, 정교하다. 문장 하나하나에 에너지가 꽉꽉 차 있다. 작품 하나하나 아껴 읽어야지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좀 더 오래 살아 주시지, 라는 너무 늦은 혼잣말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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