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예측불가에 대하여
양성 판정을 받고, 그 잠 없던 녀석이 꼬박 이틀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시들시들 침대에만 누워서 앓다가 겨우 열을 털고 일어나니 미각을 살짝 잃어버려 뭘 먹어도 달다고 했다.
밥 먹고 간식 먹고 밥 먹고 간식 먹고.
어쩌면 간식을 먹으려고 밥을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는 것에 유난히 식탐을 부리는 큰딸의 식욕이 어느 땐 너무 과하다 싶게 느껴졌었는데 또 막상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기운 없이 누워만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짠했다.
그게 과일이든, 과자든, 아이스크림이든
기운만 차리게 한다면 한겨울의 산딸기라도 따다 줄 심산으로 물어보았더니,
"시금치 무친 거 먹고 싶어."
시금치?
이 한여름에??
서양 시금치인 여름시금치는 가격도 비싼 데다가 특유의 달큰한맛도 부족하고 금방 물러지는 탓에 가격만큼의 값어치를 못하는 것 같아 마트에서도 선뜻 사지 않게 되는 채소 중에 하나다.
뭐니 뭐니 해도 시금치라면(게다가 시금치나물이라면 더더욱이) 불그레한 뿌리에 납작하니 넓게 민들레처럼 퍼지면서 자란 질깃하지만 씹을수록 기분 좋게 단맛이 올라오는 겨울 시금치 섬초가 제맛 아니겠는가.
하지만 환우 중에 계신 따님이 드시고 싶다는데 여름에 나오건 겨울에 나오건 내 취향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했다.
200그램에 5천 원이 넘는 시금치 한 다발을.
다음날 도착한 시금치를 보니, 역시나 말이 한단이지 8살 우리 둘째가 한 손으로 쥐어도 될 만큼 얇디얇다.
그래도 기왕 산거 맛있게 무쳐나 주자 싶어 냄비에 물 조금 소금 조금 시금치 위에 올리고 약불에 삶듯이 올렸다.
여기서부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시금치와 더불어 콩나물까지 드시고 싶다는 말에 콩나물을 빠르게 무치면서 멀티로 시금치까지 마무리하고 싶었던 나의 욕심이 과했다. 항상 섬초만 조리해온 탓에 수분 많고 여리여리한 소녀 같은 여름 시금치의 성향을 깜빡하고 너무 오래 데쳐버린 것이다.
오 마이 갓.
이미 냄비 안의 시금치는 숨이 죽다 못해 돌아가실 지경이 되어버렸다.
마치 한번 먹고 두 번째 데운 시금치 된장국 안의 시금치처럼 흐느적흐느적.
손만 닿아도 물러버리는 시금치를 보며 잠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신 어머니 살리려고 산딸기를 찾아 한겨울 설산을 헤매던 효자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그래도 버릴 순 없다. 어떻게는 살려보자
국간장 조금 매실청 조금 참기름 참깨 톡톡 뿌려 최대한 슬렁슬렁 무쳐대니 그나마 간은 맞았다.
기분 나쁘게 입에서 녹는듯한 식감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아픈 딸에게 기운 나는, 먹고 힘이 될 음식을 해주고 싶었는데..
맛있다고 웃으면서 먹어주는 딸내미 얼굴을 기대했건만 정작 이렇게 망치고 나니 너무나 실망스럽고
맛있게 무쳐주지 못한 소녀 같은 시금치에게도 큰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주부가 되고 만 10년째 매일같이 부엌에서 가족들 먹을거리를 만들지만
항상 하는 생각이 있다.
너무 욕심내고 합이 과하면 제 맛을 내지 못한다.
적당히 힘을 빼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만들면 뭐든 더 맛있다는 소리를 듣는데,
오늘은 진짜 제대로 해봐야지 욕심이 과하면 조리과정 한 군데서 꼭 오버가 되어 오늘처럼 더 삶아진다는지 소금이 과하게 들어간다든지, 이도 저도 아닌 요리가 나온다.
오늘도 이 비싼 시금치를, 여름에 잘 사지도 않는 시금치를 내 돈 주고 샀으니 아주 그냥 기갈나게 무쳐서 우리 아픈 딸 입맛 돌아오게 해야지 욕심을 부렸던 게 화근이었다.
연약한 여름 시금치를 다루기에 나는 너무 격렬했다.
결국 딸의 입맛은 먹고 싶었던 시금치가 아닌, 곁다리로 후닥닥 무쳐버린 콩나물이 잡아줬다.
정말이지
인생은 내가 생각한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