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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배 Feb 09. 2021

우리집 오지라퍼

AI 스피커의 존재감이란

"여보 이거 8천원에 판다는데 살까?"

평소 당근마켓을 끔찍히 애정하는 남편이 링크를 보냈다.

귀여운 어피치가 눈을 감은채 미소지으며 살포시 얹어진 스피커.


흠.

굳이 AI 스피커가 필요해? 왜? 싶었지만

그 동안 이모네 갈때마다 사촌언니가 "아리아~ 동화들려줘" 라고 외치는걸 며 세상 신기해하고 부러워하던 큰딸이 생각나 사자고 했다.



"헤이 카카오" 



하고 부르면 띵~하는 대답소리를 내며 명령을 기다리고, 세상 다정하고 스윗한 목소리로 대답해준다. 신문물이 신기한 우리집 네 식구는 며칠동안 헤이카카오가 정신 못차릴정도로 귀찮게 굴었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무언가를 소리내 부른다는 자체가 남사스러워서 빅스비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 처음엔 헤이카카오라고 부르고 싶어도 크게 부르지도 못했다. 스피커를 부르는 순간 아이들이 미어캣처럼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잽싸게 날 쳐다본다. '왜? 뭐 말할려고? 뭔데? 뭔데??' 라는 무언의 눈빛이 여간 부담스러운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말을 틀릴까, 목소리가 갈라질까 왠 울렁증이 여기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지...


날씨도 물어보고, 시간도 물어보고, 뉴스도 물어보고.. 어느덧 식탁밑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 스피커와 금새 정이 붙었다.

또 이 아이의 알고리즘은 꽤나 대단해서, 노래 하나를 틀어달라고 하면 이어서 틀어주는 노래들이 하나같이 주옥같다.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내 취향을 잘아는지.. 

AI가 실로 대단하고 놀랍구나, 이 정도면 조만간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것도 무리는 아니겠단 생각까지 하게되었다. 

이런 믿음직한 녀석.


그런데 그때부터 이 녀석이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른 스피커들은 "다녀올게~" 라고 하면 "네,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 하고 상냥하기 짝이없게 대답해준다는데 이 녀석은 고작 한다는 소리가 "네, 알겠어요" 란다.

아니, 인간미를 기대한건 아니지만 너무 정없고 차갑잖아!!


어느날은 신랑이 씻는 물소리(콸콸콸)에 자기혼자 반응하더니

 "잘 못알아들었어요. 다시한번 말해주세요" 라고 하질 않나,

아이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는데 그 소리에 자기도 같이 놀고 싶었던건지 뭔지 혼자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노래를 틀어주질 않나.. (그런데 그 노래들이 너무 내 취향이라 2시간이 넘게 들었는데, 대체 어떤 명령을 듣고 노래를 틀어준건지 알수가 없어 다시 들을수가 없다.)

그래놓고는 정작 필요해서 뭐라도 해달라치면 잘 못알아들었다고 단칼에 거절하고..

이쯤 되면 우리랑 밀당을 하고 있는게 확실하지 싶다. (정말 우리를 지배하려고 이러는거니??)


식탁옆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쏙쏙 골라 틀어주는 똑똑한 녀석.

화나고 짜증난 목소리로 불러도 언제나 쿨하게 대답해주는 녀석.

틀리더라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녀석.


우리집 오지라퍼는 오늘도 자신의 존재를 잊지말라고,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아도 열심히 띵~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열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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