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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배 Jun 16. 2021

그래서 그저 손 만 잡고 있었다.

아침 7시30분,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 출근준비와 아이들 학교, 유치원 등교 준비로 한참 바쁠시간이란걸 모를리가 없는 엄마임에도 그 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했다는건 뭔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있다는 뜻이기에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으니 역시나.


"외삼촌 돌아가셨댄다. 장지는 좀 이따 알려줄게"


어릴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같은 시에 산다는 이유로 엄마는 종종보다 더 자주, 언니와 나를 삼촌네 맡기고 돈을 벌기 바빴다.

엄마 혼자 어린 딸 둘을 데리고 살기 퍽퍽한 세상이란걸 삼촌도 모를리 없었기에 주말마다, 방학마다 찾아가 방 하나를 차지해버리는 조카딸들을 삼촌은 늘 살갑게 대해주었다.


고속버스 운전기사를 하셨던 삼촌도 집에 항상 계시는건 아니었기에 우리를 살뜰히 살펴주는건 늘 외숙모의 몫이었다. 삼촌처럼 외숙모도 우리에게 화 한번 내지 않고, 싫은기색 한번 비치지 않고 당신들의 딸들과 똑같이 대해주었다. 

그래서 난 삼촌과 숙모가 참 좋았다.


삼촌도 자매를 두고 있었고, 우리도 자매였기에 여자애 넷이서 알록달록 참 재밌게도 놀았다.

유년기 귀여운 추억들은 다 그곳에서 피어났다.


그러다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우리가 다른지역으로 이사를 하고, 어른들의 알수 없는 자존심 싸움과 이해갈등관계에 얽혀 어느 순간 엄마는 이모, 삼촌들과 남처럼 살게 되고 나도 어릴적 추억이 잔뜩 묻어있는 그곳을 한참이나 잊고 살았다.


삼촌은 늘 중년의 그 모습 그대로 일것 같았지만 세월을 누구에게도 공평하기에,  삼촌은 일흔이란 나이로 나의 돌아가신 친아빠가 계신 곳으로 떠났다.

떠나기 불과 보름전, 엄마가 삼촌의 살날이 얼마남지 않은것 같다며 같이 얼굴이나 보러가자고 했었다. 그때 함께 갔었어야 했다. 삼촌이 앉아서 엄마와 그간의 설움과 오해를 풀며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눴다기에 걱정할 만큼은 아니라고 속단했던게 문제였다. 삼촌은 그렇게 몇년만에 당신의 첫 동생인 엄마를 만난 이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떠나셨다.


외숙모와 사촌은 아마도 삼촌이 몇년동안 서로의 오해가 쌓인 동생을 기다렸나보다고 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삼촌까지 옆에서 지켜주느라 그 고생의 시간만큼 하얗게 바래 버린 외숙모의 모습도 가슴이 미어졌다. 언제나처럼 온화한 얼굴이셨지만 그간 세월의 고단함이 드러나는 얼굴표정이 지쳐보였다.

이~ 유영이 왔냐 하면서 구수한 청양 사투리와 함께 항상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시던 삼촌의 모습만이 사진 그대로였다.

내년이면 마흔이지만, 아빠 마지막을 나만 봤어. 하며 엉엉 우는 사촌의 얼굴도 어릴때 울던 8살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상실의 시간 앞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내 찬란하진 않았지만 반짝였던 유년시절 한켠을 크게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의 잃은것에 대한 슬픔.

이제 내 주변의 이들도 하나둘씩 떠나가겠구나 하는 두려움.

피해갈수 없는 세월의 무자비함.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별과 상실을 겪어야하는가 하는 막막함.

머릿속에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쳤지만, 정작 입밖으로 꺼낼수 있는 말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난 그들의 손을 잡고 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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