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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배 Jan 25. 2023

딸내미의 사생활

그녀의 콧구멍과 인생이라는 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방역도우미일을 한다.


아침 등교하는 아이들의 열체크를 하고

아이들이 오고 가며 손이 닿을만한 곳을 소독하고 돌아오는 3시간의 짧은 근로.

집의 경제활동에 아주 미미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것과 더불어, 아이들이(내 아이들을 포함하여) 다니는 학교의 시설을 엄마인 내가 도맡아서 좀 더 깨끗하고 안전하게 소독해 준다는 약간의 자부심,

그리고 팁처럼 얻어지는, 아이들 수업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수시로(티 나지 않게, 관심 없는 척 지나가며) 슬쩍이나마 관찰할  있다는 게 이 짧은 근무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이다.


어린이집을 다닐 땐 묻지 않아도 그날의 이슈와 점심 메뉴와 친구들의 컨디션 등등 폭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내던 아이들이 나름 초등언니가 되고서는 학교 이야기를 도통해주질 않아 그들의 학교생활은 늘 미궁에 쌓여있었기에 내가 찰나 같은 타이밍이나마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꽤 쏠쏠한 재미였다.

물론 쉬는 시간에 오고 가며 아이들과 조용히 눈맞춤하며 모녀간의 사이가 더 돈독해지는 것도 좋았다 하겠다.


집에선 개방정에 사고뭉치를 담당하는 둘째 아이도 학교에선 (그나마 수업시간에는)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진지하게 집중하는 모습이 새로웠고, 언제 어디서나 바른생활하는 큰 아이의 모습은 엄마인 나로 하여금 뿌듯하게 만들었다


큰 아이는 같은 반에 예쁘장하고, 인기 있는 아이돌의 최신 춤을 꾀고 있는(이를테면 러브다이브라든가, 애프터라이크라든가) 친구와 너무 친해지고 싶어 했고, 그 친구도 반듯반듯한 큰 아이와 잘 맞아 둘은 금세 단짝이 된 듯했다.


그래서 어딜 가나 팔짱 꼭 낀 채로 꺄륵거리며 함께 다니는 두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마음이 일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두 아이가 거리 멀어진게 보였다. 둘 사이에 뭔가 심상치가 않은 일이 있나 싶은 기분이 들어 큰 아이에게 혹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지만,

"아니? 별일 없는데?" 하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도 그 둘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 듯했고, (아는게 병이라 한번 신경이 쓰이니 그 쪽으로만 온 신경이 집중 됐다.) 다시 한번 무슨일 있는거냐 물어보자 이제는 귀찮다는 듯이

"아무 일도 없다니까? 엄마는 왜 자꾸 아니라는데 계속 물어봐?" 하며 발끈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큰 아이의 콧구멍이 불안정하게 벌렁거리는 것을.


눈은 그 사람의 마음의 창이라지만, 큰 아이는 감정의 대부분을 콧구멍으로 드러낸다.

다른 사람들은 캐치하지 못하지만 10년을 키운 엄마인 나는 단번에 알 수 있는 우리 큰 딸의 콧구멍.


눈물과 분노를 참으며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걸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초등 여학생들의 교우관계는 어느 정도 상대방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이 동반됨을 알기에 혹시나 큰 아이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진 않았을까 염려가 되었다.


나 또한 저 나이 때 친구가 세상에 전부였었고, 친구 관계에 따라 내 하루의 날씨도 맑음과 흐림을 오락가락했었더랬다.

대놓고 싫은 소리를 못하는 무른 성격에 속앓이를 많이 했었던 터라, 그리고 뭣보다 내 성격 작은 것 하나하나 고스란히 닮은 큰 아이라 더 마음이 쓰였다.


이쯤 되면 이제 아이 친구 문제가 아닌 내 친구 문제로 넘어온 듯했다.

"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싸웠어? 걔가 너랑 이제 안 논대??"

" 아 아니라고~~ 별 일 없다고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다고 확신 한 나는 큰 아이를 볶아쳐대기 시작했고, 나의 닦달에 질려 버린 큰 아이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큰 아이의 콧구멍 속에 숨어버린 이야기가 듣고 싶어 안달복달인 나와 달리 남편은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유치원 다니는 애도 아니고 친구 문제는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나이니 기다려 주라고 나의 호들갑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래, 얘기하고 싶을 때 얘기 해줘. 엄마는 여기서 기다릴게.

어떤 때는 입에도 올리기 싫을 정도로 말하기 싫은 것도 있지만, 어떤 때는 말하면서 풀리기도 하는 법이니 네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하라며(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 달라는 뜻을 숨기고.) 나에게 질려버린 큰 아이의 등을 보며 넋두리하듯 말했다.


이후로도 학교에서, 잠복하는 스파이처럼 기회가 될 때마다 큰 아이 주변을(티나지 않게) 서성거렸지만, 아무래도 그 친구와 멀어진 거리에 이미 공간이 너무나 많이 커진 듯했다. 그럴 때마다 큰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캐묻고 싶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옆에서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는 나에 비해 오히려 당사자인 큰 아이는 또 다른 친구와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그 동안의 딸아이의 맘고생(그리고 나의 속앓이)이 무색하게 큰 아이는 다시 예전 그 친구와 다시금 한 몸처럼 팔짱을 끼고 꺄르륵거리는 공기를 만들어내는 단짝으로 돌아갔다.


후에 큰 아이가 들려준 바에 의하면,

큰 아이가 같은 반 다른 아이와 조금 친해진 것 같은 모습에 그 친구가 많이 서운해했고, 그래서 그 친구도 질투심에 큰 아이에게 거리를 뒀다고 한다.

큰 아이가 그 친구에게 요새 너의 행동이 조금 냉랭한데 자기에게 서운한 게 있느냐고 묻자, 그 친구가 털어놓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과한 후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말이지, 초등 여아의 우정이란 이토록 쉽고도 어려운 것이었다.


비록 엄마인 나에겐 어떤 이유에선지 털어놓지 않았겠지만, 내 아이가 자기에게 소원한 친구에게 먼저 이유를 묻고, 사과를 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아이로 자랐다는 게 가만 생각하니 너무나 기특했다. 어떤 이에겐 아무렇지 않을 이 행동은 내가 딸의 나이였을 때는 엄두도 못 낼 행동이었으므로...


내 성격의 모두를. 내 단점까지 모두 닮았다 생각했던 딸은 나보다 더 단단한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각자 인생에서

자기만의 춤을 만들어 추고 있습니다.

실패도 상처도 그 춤의 일부분입니다.

힘들까 봐 자식의 춤을 부모가 대신 춰주면

언젠가는 아이가 그 부분을 다시 춰야 합니다.

아이의 춤을 인정해 주세요.

  -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


나의 실패한 춤을 아이가 따라 추고 있다고 착각했던, 그래서 앞서서 먼저 걱정하고 염려했던 나의 행동이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는 새에 아이는 자신만의 반듯한 춤을 추며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내가 살아온 인생에 빗대어 섣불리 짐작하지 말고 딸아이의 사생활은 그야말로 나와는 다른 인생임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그녀만의 춤을 출 수 있게 응원해 주어야겠다고.

언젠가 또 딸아이의 벌렁대는 콧구멍을 목도하더라도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는, 호들갑스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길 바래보며 오늘도 마음을 다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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